북한군이 남침했음을 보여주는 문서를 통한 가장 분명한 증거는 1950년 6월 26일 북한주재 소련대사 스티코프가 소련의 일반참모 1차장인 자크하로프에게 보낸 1950년 6월 26일 전문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여기서 저는 북한군 작전계획의 준비사항과 진척사항에 관해 보고하고 있습니다. 북한군 일반참모부가 준비한 작전계획에 따르면 북한군은 6월 12일 38선 부근에 집결하기 시작하여 6월 23일 이동을 완료했습니다. 부대들의 이동은 전혀 사고 없어 상호 조정된 형태로 이루어졌습니다. 적의 첩자가 부대 이동을 발견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작전계획과 공격시점을 비밀로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소련군 고문관들은 사단 수준의 작전계획 수립과 지역 정찰 활동에 참여했습니다.(I am reporting on the preparation and progress of the operational plan of the Korean People’s Army. In accordance with the plan prepared by the General Staff Headquarters, the Korean People’s Army began to assemble near the 38th parallel on June 12 and completed the movement on June 23. Unit movements were coordinated and carried out without incident. Enemy spies probably discovered unit movements, but we were able to keep secret the operational plan and time of attack. Soviet advisers participated in division-level operational planning and area reconnaissance.)
모든 작전적 준비는 6월 24일 완료되었습니다. 공격 목표와 시점을 구비한 명령이 6월 24일 사단장들에게 하달되었습니다.(All operational preparations were completed on June 24. Orders with the date and time of attack were issued to division commanders on that date.)
인민무력부장이 하달한 정치적 명령문을 모든 단위 부대가 읽었습니다. 여기서는 남조선 군대가 38선을 월경하여 군사적으로 공격해왔기 때문에 북조선 인민공화국이 반격을 명령했다는 사실을 설명했습니다. 반격 명령에 북한군 장교와 병사들이 열광했습니다.(A political order from the Minister of National Defense was read to every unit explaining that because South Korean military forces had violated the 38th parallel and launched a military attack, the government of the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has ordered the Korean People’s Army to counterattack. The order to counterattack was enthusiastically welcomed by the officers and men of the Korean People’s Army.)
단위 부대들은 6월 24일 자정에 남침 지점에 도착했습니다. 남침은 6월 25일 새벽 4시 40분에 시작되었습니다. 포병 공격 준비가 되었을 당시 20분에서 40분 정도 포를 발사했습니다. 10분 간격으로 엄호 사격했습니다. 그후 보병들이 고개를 들고는 앞으로 진격했습니다. 어느 보병 부대들의 경우 처음 3시간 동안 3킬로미터에서 5킬로미터까지 진격했습니다.(Units reached their departure points by midnight June 24. Military action commenced at 4:40 a.m. local time [June 25]. When preparations for an artillery attack were ready, bombardment was carried out from twenty to forty minutes; barrages were fired at ten-minute intervals. Then the infantry rose up and charged with great élan. Some units advanced three to five kilometers in the first three hours.)
북한군 공격은 적의 입장에서 보면 완벽한 기습에 다름이 없었습니다. 적은 옹진, 개성 그리고 서울로 진입하는 길목이란 3군데에서만 강력히 저항했습니다. 첫날 정오경 적은 조직화된 저항을 시작했습니다. 공격 첫날 옹진, 개성 및 신읍리라는 도시를 점령했습니다.(The attack by the Korean People’s Army was a complete surprise to the enemy. The enemy showed strong resistance in only three areas: Ongjin, Kaijin [Kaesong], and the approach to Seoul. After noon on the first day, the enemy began organized resistance. The following towns were occupied the first day: Oshin [Ongjin] (Ongjin area), Kaesong, and Sinup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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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지역의 경우를 보면 북한군 부대는 12킬로미터를 진격했습니다. 동해안 지역의 경우 8킬로미터를 진격했습니다.(In the Chunchon area, units of the Korean People’s Army advanced twelve kilometers. On the East Sea coast the advance was eight kilometers.)
남침 첫날, 북한군 해군은 동해안 두 곳에서 상륙작전을 감행했습니다. 2개 해병 대대와 1,000명의 빨치산들이 강릉 지역에 상륙했으며, 오전 5시 25분경에는 600명의 빨치산들이 울진에 성공적으로 상륙했습니다. 이들 빨치산은 울진 시청과 다수의 주변 지역을 점령했습니다.(On the first day [North] Korean naval forces carried out two amphibious operations on the Japan Sea coast. Two marine battalions and 1000 partisans were landed in the Kangnung area and 600 partisans went ashore successfully in Ulchin area at 5:25 a.m. The partisans occupied the Ulchin city office and many nearby areas.)
이들 상륙은 인민해방군 함정과 남조선 함정 간의 전투의 와중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남조선 함정 1척이 침몰했으며 여러 함정이 심각한 피해를 입었지만 북한군 해군은 전혀 피해를 입지 않았습니다.(The landing was accomplished during a battle between People’s Army warships and South Korean warships. A South Korean trawler was sunk and another vessel was heavily damaged; the North Korean Navy had no casualties.)
6월 26일 북한군 부대는 전투를 통해 남조선 영토 깊숙히 진입했습니다 옹진반도와 개성을 완벽히 해방시켰으며, 북한군 6사단은 김포 비행장 부근의 인구밀집지역을 점령했습니다.(On June 26 units of the Korean People’s Army fought their way deeper into South Korean territory. (Looking from left to right), [T]he Ongjin Peninsula and the Kaishin [Kangyong] Peninsula were completely liberated, and a unit of the 6th Division forced its way across the bay and occupied a populated area near Kimpo Airport.)
북한군 1사단과 4사단이 문산과 동두천을 점령했으며, 2사단은 춘천의 중심 지역을 점령했습니다 동해안 지역에서 또한 북한군의 진격이 지속되었습니다. 주문진항을 점령했습니다.(The 1st and 4th divisions occupied Munsan and Tongduchon in the Seoul area, and the 2nd Division seized the prefectural center Chunchon. The advances continued on the Japan Sea coast, too. Toupuiri [Chumunjin] harbor was seized.)
상기 사실에 더불어 스티코프는 북한군의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1. 단위 부대들이 진격할 당시 고급 제대 참모들이 하급제대와 제대로 교신하지 못했습니다. 북한군 총사령부는 남침 첫 날부터 전투를 지시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단에 신뢰성이 있는 통신 장비가 없었기 때문입니다.(As the units advanced, higher echelon staff lost communication with lower levels. The People’s Army General Staff Headquarters already on the first day was not directing the fighting because there were no reliable communications with any division. . . .)
2. 인민해방군 일반참모들의 경우 전투 경험이 없습니다. 소련 군사고문관들이 철수한 이후 전투 지휘가 엉망이 되었습니다. 포병과 전차를 제대로 운용하지 못했으며, 통신이 두절되었습니다.(The Korean People’s Army command staff has no combat experience and after Soviet military advisers were withdrawn, combat leadership was poorly organized, the use of artillery and tanks in combat was inadequate, and communications broke down.)
상기 사실로 인해 북한군의 남침에 관해 더 이상 의문을 제기할 수 없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