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군축회의가 있었던 1921년 이후 미국은 지구상 대부분 국가의 외교망을 감청했다고 한다. 예를 들면 워싱턴군축회의에 참석하는 각 국의 입장을 통신망 감청을 통해 이미 모두 알았다고 한다. 이외에도 태평양에서의 일본과의 미드웨이 해전, 독일군의 소련 침공, 노르망디 상륙작전 등 주요 작전에 관한 주요 사항들을 미국은 감청을 통해 모두 파악했다고 한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아이젠하워는 노르망디가 아니고 빠드 깔레로 상륙할 것처럼 상황을 조작했다. 히틀러로 하여금 연합군이 빠드 깔레로 상륙할 것처럼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아이젠하워는 진정 히틀러가 연합군의 상륙이 빠드 깔레 지역에서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감청을 통해서 확인했다고 한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이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게 된 것도 감청을 통해 일본의 움직임을 파악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당시 일본은 미군이 일본 본토에 상륙하는 경우 40만에 달하던 포로들을 사살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이 같은 사실 등을 고려하여 미국이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고 한다.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이 감청을 통해 확보하여 프린트한 결과가 비밀해제되면서 이 같은 사실을 모두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1차 세계대전,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통신망 감청에 관한 것들이 비밀해제된 것은 1990년대 이전이다. 이들 결과에 근거하여 당시의 미국의 감청에 관한 책자들이 발간되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특히 소련의 통신망을 철저히 감시했다고 한다. 소련에서 외국 대사관으로 나아가는 통신망은 당연히 집중적으로 감청했다고 한다. 이 같은 외교망 이외에 미국은 6.25전쟁 직전에 북한군의 전술 통신망을 또한 철저히 감청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6.25전쟁에 관해 정보 실패를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논리적으로 타당성이 없다.
예를 들면, 1950년 1월 30일 스탈린은 북한 주재 소련대사 스티코프에게 김일성의 남침을 허용해줄 것이란 의미의 전문을 보낸다. 그런데 모스크바와 평양을 연결하는 소련의 외교망은 당연히 2차 세계대전 이후 집중적으로 관리되던 망이었다.
미국이 1950년 1월 30일 스탈린이 스티코프에게 보낸 내용을 감청했음을 암시하는 현상이 하루가 지나지 않아 나타난다. 소련과 중국을 포함한 공산세력에 대항할 목적의 NSC-68이란 비밀 문서 작성을 트루먼이 지시한 것이다.
1950년 6월 16일 평양의 스티코프는 모스크바에 북한군의 남침 일자가 6월 25일 새벽이란 전문을 보낸다. 이것도 당연히 소련과 외국 주재 소련대사관을 연결하는 통신망이란 점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감청하는 대상이었다. 미국이 6월 16일 스티코프의 전문을 확인했음을 보여주는 현상이 즉각 나타난다. 6월 16일 한국의 미 군사고문단장 대리인 화이트 대령에게 일본으로 가라는 지시가 떨어진다. 6월 18일부터 23일까지 동경에서는 맥아더, 미 국방부장관 존슨, 합참의장 브레들리, 얼마전 한국을 방문했던 덜러스란 미 국가안보 주요 인사들이 비밀회의를 한다. 당시 이들의 주요 논의는 한반도와 대만 상황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6월 19일에는 1949년 9월 당시 미국이 작성한 한반도전쟁계획 Sl-17을 관련 부서에 배포한다. 극동군사령부에는 50부가 배포되었다고 한다. 당시 맥아더, 존슨 국방부장관, 브레들리 합참의장은 한반도 전쟁계획을 논의했을 것이다.
1950년 6월 24일에는 보다 희안한 일이 수차례 벌어진다. 6월 중순부터 전선 육군부대 시찰을 하고 있던 유엔감시단이 6월 24일 철수한다. 6월 24일 미 군사고문단과 한국군 고위급 인사들이 밤새도록 술을 마신다. 많은 병사들을 휴가를 내보낸다.
1950년 10월8일 마오쩌뚱이 북한주재 중국대사관을 통해 김일성에게 중공군 참전을 통보해준다. 10월 15일경에 참전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자 10월 9일 미국은 멕이더에게 전문을 보낸다. 그 내용은 한반도 도처에서 중공군을 만나는 경우 유엔군의 행동 규칙에 관한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10월 11일 트루먼은 갑자기 웨이크섬에서 맥아더를 만날 것이라고 선언한다. 트루먼은 브레들리 합참의장 등 주요 인사를 대동하고 웨이크섬에서 맥아더와 만났다. 나중에 밝혀진 것이지만 당시 맥아더와의 단독 회동에서 트루먼은 10월 9일 맥아더에게 내린 지시문을 설명했다고 한다. 지시문의 성격은 유엔군이 압록강으로 진격한다. 중공군을 만나는 경우 도처에서 대적한다. 그런데 한만국경 너머로 공중 공격을 금한다. 여기에 더불어 유엔군 전력 증강은 없다는 내용이었다. 중공군이 1950년에는 참전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트루먼은 맥아더에게 말한다. 마음놓고 압록강으로 진격하라고 지시한다. 이 같은 트루먼의 요구에 입각하여 유엔군은 10월 20일 평양을 점령한 후 압록강으로 진격한다.
이 같은 사실 이외에 한국을 방문한 후 6.25전쟁이 벌어졌을 당시 일본에 있었던 덜러스는 전쟁이 벌어지기 하루 전날 "조만간 아시아 지역은 물론이고 유럽의 안보까지 보장해줄 Positive action이 있을 것이란 사실을 기자들에게 언급한다." 덜러스가 말한 Positive Action은 Roll-back을 의미했다. 공산세력의 세력 팽창을 치고받아서 올라간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당시 덜러스가 언급한 내용은 1950년 1월 30일 트루먼의 지시에 입각하여 4월 중순에 완료된 NSC-68 내용이었다. NSC-68은 그 후 20년 동안 그 존재 자체도 비밀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NSC-68에서는 소련과 중국의 위협에 대항하여 미 국방비를 300% 이상 증액할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 같은 증액을 가능하게 할 목적에서 공산세력과 미국이 장기간 동안 처절하게 싸워야 할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덜러스가 Positive action을 지속적으로 언급한지 하루가 지나지 않아 6.25전쟁이 벌어진 것이다.
이외에도 6.25전쟁에 관한 정보를 미 육군, 극동군사령부, 미 공군이 별도로 수집했다고 한다. 이들 정보는 북한군의 남침 동향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들 정보를 맥아더 사령부와 워싱턴이 묵살했다고 한다. 이는 2017년에 발간된 King of Spies: The Dark Reign of America's Spymaster in Korea란 제목의 책에 등장하는 내용이다.
이처럼 미국이 6.25전쟁 발발에 관해 사전에 알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상당히 많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정보실패를 주장한다.
중공군의 한반도 진입과 관련해서 또한 미국은 정보 실패를 주장한다.
이들 사실 이외에 6.25전쟁과 관련해서는 불가사이한 일들이 매우 많이 있다. 이외에도 미 국무성 차관보가 미 의회 청문회에서 미국이 이미 6.25전쟁 발발에 대비하여 유엔결의안을 사전 작성해 놓았다는 증언, 1950년 당시 미국이 한국에 원조해주기로 되어 있던 1,100만$ 예산 가운데 1950년 1월부터 6월 25일 이전까지 미국이 원조해준 금액이 109$에 불가했다는 사실 등 불가사이한 부분이 매우 많다.
왜 미국은 이처럼 정보실패를 주장하는 것일까? 1차 세계대전, 2차 세계대전의 주요 순간에 관한 모든 정보를 감청을 통해 확보하여 조치를 취한 바 있으며, 정보 기구의 중요성을 인지하여 1947년 미 CIA 등 몇몇 정보기구를 설치한 후 엄청난 예산을 투입했던 미국이 6.25전쟁에 관해 지속적으로 정보실패를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일 것이다. 첫째는 미국이 소련과 중국 위협에 대항할 목적으로 국방예산을 300% 올리기 위해 북한군의 남침을 사전에 알았지만 남침 이후 한반도 전쟁 참전을 통해 중공군과 한반도에서 장기간 동안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할 목적으로 남침을 이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같은 전쟁으로 인해 한반도에서 400만에서 600만의 한국인이 희생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 미국인의 표현을 빌리면 "미국이 한반도에서 엄청나게 나쁜 짓을 많이 했기 때문일 것이다." 미국이 남침에 관해 모두 알고 있는 상태에서 6.25전쟁이 발발했으며, 6.25전쟁을 교묘히 이용했다고 말하면, 그 과정에서 수백만이 희생되었다고 말하면 한국인들의 반발을 어떻게 감내할 수 있겠는가?
두 번째 이유는 패권경쟁 측면에서 미군의 지속적인 한반도 주둔이 필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남침 사실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6.25전쟁에 미국이 대비했다고 말하면 주한미군 주둔 가능하겠는가?
그런데 앞의 사실 이외에 미국이 한반도 전쟁을 1949년부터 사전 준비했음을 보여주는 정보가 없지 않다. 1949년 6월 27일 미국이 한반도에서 전쟁이 벌어지는 경우 유엔군의 일환으로 경찰 활동 차원에서 참전할 것이란 극비 문서를 마련했다는 사실, 북한군이 남침하는 경우 낙동강까지 후퇴한 후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반격할 것이란 내용의 한반도전쟁 계획 SL-17을 1949년 9월에 작성했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이외에도 1950년 5월 이후 미국은 한반도 전쟁에 대비하여 육군, 해군, 공군, 해병대가 별도 훈련했다고 한다.
앞에서 언급한 이유로 인해 미국은 6.25전쟁 관련 모든 정보를 사전에 감청을 통해 이미 잘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비밀 해제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중국 위협이 사라져서 더 이상 미군의 한반도 주둔이 필요 없어지는 날 6.25전쟁 당시 미국이 소련, 중국, 북한 간에 주고받은 고급 정보를 감청한 내용이 비밀해제될 것으로 예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