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금산조의
함동정월 명인은 저하고 특별한 인연이 있습니다. 제가 「뿌리깊은 나무」 잡지사를 그만 두고 연극만 할 무렵, <뿌리깊은 나무 민중자서전 시리즈>의 ‘함동정월편’ 「물은 건너봐야 알고 사람은 겪어봐야 알거든」이라는 책의 집필 책임을 맡았습니다. 그 무렵 그녀는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춤추는 가얏고」라는 TV드라마의 실제 주인공으로 알려져 있을 때였습니다. 그녀를 수차례 만나서 이야기를 듣고 녹음하고 책을 만드는 동안, 저는 너무도 고통으로 가득 찬 그녀의 삶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 글은 그 책의 서문으로 썼던 글을 수정한 것입니다.
함동정월 명인은 행복과 불행의 시계추를 극심하게 오간 자신의 삶을 ‘천국’과 ‘지옥’이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그녀의 ‘천국시절’은 1917년 8월 25일에 전라남도 강진군 병영면 지로리에서 함금덕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기로 태어났을 때부터 시작됩니다.
아버지 함일권씨는 병영의 관아에서 북을 치고 피리를 불던 악공이었지만 도중에 악공 노릇을 때려치우고 농사를 지으며 살았습니다. 큰오빠인 함률씨도 어렸을 때부터 대금과 가야금산조에 재능을 보였지만 도중에 때려치우고 평범한 농부로 살았습니다. 예인으로 살아오는 동안에 사회에서 받은 천대와 멸시를 견디지 못해 포기하지 않았을까 짐작은 해보지만 확실한 이유는 알 수가 없습니다.그녀가 태어났을 때는 아버지나 오빠가 이미 음악과 인연을 끊은지 오래됐기 때문에 그녀는 평범한 농가의 소녀로 자라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도중에 집안이 망해 학교를 다니지 못할 형편이 되자, 아버지와 오빠가 그토록 끊으려고 했던 음악과의 인연이 맺어지게 되었습니다.
학교에 못 가는 것이 서러워서 날마다 울고불고 지내는 딸이 안쓰러워서 어머니가 광주의 재산가인 김창수씨에게 양녀로 맡겼고, 11살 금덕 소녀는 양아버지의 주선으로 광주 권번에서 ‘예기(藝妓)’의 수업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곳에서 1년 남짓 시조와 승무와 검무와 가야금의 기초 과정을 공부한 뒤에 고향에 돌아 온 금덕 소녀는 계속해서 여러 명인명창들에게 판소리와 가곡과 가야금 산조를 공부했습니다. 핏줄을 타고 전해 내려 온 재능 때문인지 음악에 대한 감수성이 남다르고 총기가 뛰어났던 그녀는 모든 걸 잊고 오로지 음악 공부에만 열중했습니다.
그녀는 6촌 형부였던 최옥산 명인에게 가야금 산조를 배웠는데, 그는 가야금 산조의 창시자로 알려진 김창조의 수제자였습니다. 예인 집안의 혈통과 명인명창들이 쉴 새 없이 드나드는 병영이라는 지역의 음악적인 분위기, 그리고 남몰래 똥물까지 먹어 가며 공부했던 열정 덕분에 금덕 소녀의 음악적 재능은 무럭무럭 자라났습니다.
4년쯤 고향에서 공부한 뒤 16살이 되던 해에 동아일보 지국장이었던 방씨의 손에 '머리를 얹은' 그녀는 17살에 정식으로 목포 권번에 이름을 올리고 예기로서의 삶을 시작했습니다. 첫 남자인 방씨는 그녀가 '동정호에 뜬 달과 같이 어여쁘다'고 하여 ‘동정월’이라는 예명을 지어 주었습니다. 갸름하고 둥그스럼한 얼굴에 오똑한 콧날, 가냘프고도 균형 잡힌 몸매의 전형적인 조선 미인인데다가 음악과 춤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 함동정월의 이름은 순식간에 목포의 사교계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여기저기 불려다니며 판소리도 하고 가야금도 타고 춤도 추며 바쁘게 지냈습니다. 그러는 한편으로 '목우암'이라는 절에 들어 가 판소리 100일 공부를 하기도 하고, ‘광주 콩쿨 대회’에 입상해서 레코드 취입을 하러 일본에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녀의 인생은 재능과 자질을 고루 갖춘 소녀 명창으로서 성공이 보장된 분홍빛 삶이었습니다. 그러다 21살 되던 해에 서울에 올라와 생활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녀의 삶에 어두운 그림자가 깃들게 되었습니다.
서울에 올라 온 그녀는 조선 권번에 이름을 올리고 명월관, 국일관, 식도원 같은 요정에서 예기로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두 달 만에 정씨라는 부자의 소실로 들어감으로써 그 모든 활동이 정지되고, ‘지옥과 같은’ 생활이 시작된 것입니다. 정씨에게는 이미 소실이 4명이 있었으니 그녀는 다섯 번째 부인이 된 셈인데 그들과의 시앗 싸움이 상상 이상으로 힘들었고, 음악 말고는 세상물정을 모르던 그녀는 번번이 당하는 쪽이었습니다.
소녀 시절의 열정을 다 바쳐 공부한 음악을 포기하고 바깥출입마저 금지 당한 채 나이 든 부자 서방의 애첩 노릇을 해야만 했던 그 시절들은 그녀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겨 주었습니다. 감옥 생활과 같은 암울함 속에서 낳은 아이들만이 그녀의 유일한 희망이었습니다. 그러다가 태평양 전쟁을 겪으면서 그 집이 망하게 되어 계룡산 근처의 온양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후 6.25 전쟁을 겪으면서 참담한 가난과 몇 아이의 죽음을 겪은 그녀는 남편과 헤어지고 대전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그녀의 재능을 아끼던 국악인들의 주선으로 대전국악원장 노릇을 하게 된 그녀는 비로소 잃어버린 가락을 되찾아가기 시작했습니다. 마음 고생과 몸 고생으로 거칠어진 목으로 판소리 가사와 가락을 되찾아내고, 밭일로 굳어진 손가락을 움직여 최옥산 명인에게 배웠던 가야금 산조의 가락을 모두 찾아냈습니다. 그 뒤 서울로 올라 온 그녀는 올망졸망 딸린 5남매를 기르려고 요정에 나가서 기예를 파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간신히 모아 놓은 돈을 이 아무개라는 남자에게 사기 당한 뒤에 그 충격으로 정신병원 신세를 졌습니다.
그 뒤로도 어렵게 지내 던 중, 쉰 살이 된 무렵에 판소리북의 명인인 김명환을 만나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김명환 명인은 함동정월의 음악성에 탄복하여 그 재능을 갈고 닦는 일을 스스로 맡고 나섰습니다. 그녀는 예술적 열정이 불타 오르던 김명환 명인과 마주 앉아 하루종일 가야금 연습을 했습니다. 그러나 저마다 최고 경지에 오른 예술가였으면서도 현실 생활에서는 배고프고 빈털털이였던 두 사람의 생활은 오래가지 못한 채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국악인들은 흔히 그녀의 '최옥산류 가야금 산조'가 김명환 명인과의 삶에서 완성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또 북의 명인과 가야금 명인의 짧은 만남을 예술적이고 신비한 상상력으로 포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녀의 이야기 속에는 그이와의 예술적 교감을 회상하는 기억보다, 자신을 희생시켜가며 그와의 삶을 꾸렸는데 자신만이 고통의 수렁 속에 빠졌다는 배신감과 원한이 더 많이 남아 있어 듣는 저를 안타깝게 했습니다.그러던 터에 또 다른 불운이 그녀에게 닥쳐왔습니다. 사랑하던 막내 아들이 자살하여 그 슬픔으로 병이 날 지경이던 참에 방송국의 녹화를 하러 가다 교통사고를 당해서 그녀마저 몸과 정신이 더욱 파괴되고 만 것입니다. 그 이듬해인 1980년에 가야금 산조 및 병창의 인간문화재로 지정 받게 되어 예술가로서 명예는 지켰지만, 삶의 고통을 해소하는 데에는 별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녀의 의식 속에는 언제나 그녀의 삶을 ‘지옥’으로 만든 몇몇 사람의 그림자가 따라다녔습니다. 그녀는 그들이 한 패거리가 되어 늘 자기를 감시하고 괴롭히고 자기 방의 문을 따고서 뭔가를 훔쳐 간다는 느낌에 사로 잡히곤 했습니다. 그녀의 피해망상증은 김씨나 이씨 성을 가진 사람을 만나거나 대전이니 광주니 하는 단어만 들어도 곧바로 맹렬한 분노의 불꽃이 되어 일어나곤 했습니다.
그 일말고도 그녀에게는 주위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이 분노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자신에게서 가야금을 배운 제자들이 ‘아직 멀어서’ 공부를 더 해야 되는데도 대학교수가 되어 자기보다 더 큰 명예를 누리는 것도 화가 나는 일이었습니다. 또 인간문화재라고 해서 관청에서 ‘한 달에 몇 푼 던져주고는’ 마음대로 부려먹으려는 태도를 보이는 것도 화가 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어떤 때는 무형문화재 공연을 거절하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자신의 삶이 소재가 되어 「춤추는 가얏고」라는 제목의 책이 나오고, 그것이 다시 TV 드라마가 되어 방영된 일도 그녀를 화나게 했습니다. 그녀는 그 책이나 드라마에 나오는 이금화라는 여자가 자신의 삶과 관계가 있다는 생각조차 안했습니다. 그런데 출판사나 방송국에서 실존 인물이라고 선전을 해대는 통에 국악인들이 전화를 해서 무엇 하러 그런 이야기를 해서 국악인을 망신시키냐고 욕을 해대니 그것도 화가 나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삶이 왜 그렇게 이용되어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한 채, 가난과 질병과 끈질기게 자신을 괴롭히는 망령들과 싸우다가 1994년 10월 12일에 ‘지옥’ 같은 이 세상을 떠나 ‘천국’으로 갔습니다.
저는 지금도 면목동의 반지하 어두운 골방에 마주 앉아 조용조용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다가 갑자기 벽을 바라보며 연결이 안 되는 말들을 내뱉고, 욕설과 원망과 저주의 말을 쏟아 붓던 그녀의 모습을 잊지 못합니다. 너무도 아름답고 얌전하고 착하기만 했던 그 ‘예인(藝人)’이 무엇 때문에 그토록 혹독한 삶의 시련에 시달렸던 것일까요? 그녀의 삶과 예술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납니다. 출처: https://dreamnet21.tistory.com/347?category=165532 [김명곤의 세상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