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지경 넘어야 하리니>
도전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떤 사람이 선술을 배우기 위해 선술을 가르쳐 준다는 주인을 찾아간다. 주인은 그에게 10년 동안 머슴살이로 정성을 보이라 한다. 그래서 그는 그 집 머슴이 된다. 그리고 10년의 정성을 바친다. 그런데 그 보상으로 받은 것이 허망하게도 연못 위로 뻗은 버들가지에 올라가 연못으로 뛰어 내리라는 것이었다. 이 머슴은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주인이 시키는 대로 버들가지 위로 올라가 뛰어 내린다. 그랬더니 다 떨어지기 전에 <선악소리>가 나며 찬란한 보련이 나타나서 그를 태우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얘기다. 이 이야기를 마친 상제님께서는 이렇게 물으신다.
<이것이 학자의 정성이냐 주인의 도술이냐?>
그런데 이 이야기는 학자의 정성과 주인의 도술을 논하기 전에 <현실적인 얘기일까 아니면 추상적인 정신 현상에 대한 비유일까?>하는 것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만약 이것이 현실역사적인 사건이라면 죽어서 천국가는 선천종교의 휴거적인 이야기이지만, 정신개혁을 위한 비유라면 환상에 찌든 마음을 고치는 개심의 길을 제시한 것이다. 필자는 윤택한 현실생활을 추구하므로 후자의 관점에서 이 성구를 해석한다.
대개 사람들은 망상에 갇혀서 산다. 없는 것을 있다고 믿고 사는 것만큼 허망한 일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만든 환상을 벗어나지 못한다. 마음을 고친다는 것은 비현실적인 환상의 세계로부터 벗어나 현실로 돌아오는 것이다.
오래 전 보았던, 그래서 기억마저 가물거리는, 이외수씨의 <벽오금학도>라는 소설과 <태왕사신기>라는 드라마의 공통점은 생명처럼 숭배하던 소중한 물건을 버리고 현실역사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소설에서는 벽오금학도를 칼로 찢어버리고, 드라마에서 네 개의 신물을 없앴다는 것은 건전한 생을 위해서는 환상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상제님 신앙인들만큼, 아니 각색 종교의 종교인들만큼 환상에 젖어 살아가는 사람들도 없다. 서나동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은 곧 전쟁이 나고 시두가 돌며 병겁이 밀어 닥치면 한 생명건지는 것은 물론이요, 개벽된 세상에서 좋은 자리를 선점하겠다는 욕심이 바닥에 깔려 있는 것이다. 이것이 그들이 믿는 진리의 전모다.
또 서나동을 떠나 새로운 지도자를 만나 통일천하를 위해 종군하는 사람들 또한 환상에 젖어 살기는 마찬가지다. 정치를 해 <몽골부터 통일하면 지구촌 통일의 길이 열린다>는 꿀 떨어지는 이야기를 주워 먹고 자신의 생은 점점 피폐해지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체 오늘도 그 현란한 입 앞에 쭈그리고 앉아 환상의 모래성만 쌓고 있는 것이다.
상제님께서는 <태을주는 우주 율려律呂>라고 하셨다. 율려를 순수음양이라 하면 순수란 다른 말로 음양운동의 핵심이다. 핵심이란 또 다른 말로 알갱이요 고갱이다. 이 고갱이가 사라지면 생명이 죽은 거나 다를 바 없는 것이다.
그래서 태을주를 읽으면 율려를 깨닫게 되는데, 이것은 무엇을 하든 그 핵심을 어느 누구보다 빨리 체득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무엇을 하든 핵심을 보지 못하면 부평초처럼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기 마련이다. 진정으로 태을주를 읽으면 그 핵심에 접근하는 힘이 생긴다.
그럼 우리 삶의 핵심 요소는 무엇인가? 환상을 버리고 현실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이 현실 중에 핵심 고갱이 즉 극현실이 무엇이냐면 <녹>이다. 결혼을 <현실>이라고 하는 것은 사랑에도 녹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태을주를 읽으면 녹이 붙는다는 것은 태을주를 읽어 환상을 걷어내고 극현실을 마주하면 녹을 창출하기위해 노동의 신성함을 깨닫게 된다는 의미다. 다리 꼬고 앉아 주문만 읽으면 저절로 돈이 생겨 주머니로 들어오지 않는다.
현실에서 이런 <저절로 돈>이 가능하면 그것은 혹세무민의 선구자요 사기꾼일 뿐이다. 이런 <저절로 돈>을 추구하는 것은 목이 마르다고 바닷물을 퍼먹는 것과 같다.
다시 성구로 돌아와 보자. 여기서 버들가지 끝은 마지막 남은 환상의 의지처다. 이 의지를 버리고 허공으로 뛰어 내렸더니 어떤 환상에도 사로잡히지 않은 찬란한 현실을 만난다. 이 머슴이 들은 <선악소리>는 현실 삶의 핵심을 체득한 기쁨이다.
우리가 어떤 일에 정통하였을 때 심연 저 깊은 곳에서 밝은 빛 같기도 하고 소리 같기도 한 무엇이 꿈틀거리는데 사람에 따라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허공을 향해 탄성을 지르는가하면 자리에서 일어나 덩실덩실 춤을 추기도 한다.
그래서 태을주를 읽으면 녹을 창출하는 신성한 노동을 즐겨야 한다. 산속이나 선방에 앉아 개구리 마냥 소리만 질러대면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태모님께서는 개벽을 기다리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씀 하셨다.
8 “너희들이 앞으로 한 지경을 넘어야 하리니 나는 그것을 걱정하노라.” (道典11:159)
여기서 한 지경은 무엇인가? 개벽인가! 개벽을 기다리지 말라하신 태모님께서 다시 개벽을 말씀하셨을 리 없다. 그러므로 이제 <백척간두에서 갱진일보> 해야 하고 <물위로 뻗은 버들가지 위에서 뛰어내려야 할 때>다. 죽을 것 같은데 죽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