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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1-08 19:56
쌍차쌍조(雙遮雙照)
 글쓴이 : 호반도시
 

쌍차쌍조(雙遮雙照)

 

원융사상에 투철한 천태교학의 중도설은 삼제원융(三諦圓融), 일념삼천(一念三千) 등의 대표적인 교리에서도 드러나지만 한편으로는 쌍차쌍조(雙遮雙照)로도 이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불교 여러 종파의 중도설을 말하면서 쌍차쌍조가 중도의 근본 내용임을 누차 말하였는데, 이 쌍차쌍조를 누구보다도 능란하게 구사하며 중도를 밝힌 이가 바로 천태 지자스님입니다.

천태스님은 이 차․조(遮照)를 여러 곳에서 설하였지만, 그 차조에 입각한 중도설의 연원은 다른 대승경전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이미 대승경전인 보살영락본업경(菩薩瓔珞本業經)에서 쌍조이제(雙照二諦)에 따른 중도관을 설하고 있으며, 천태스님도 차․조에 의한 중도설을 논하면서 그 경증(經證)으로 이 『영락경』의 경문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쌍차와 쌍조를 종횡으로 구사하여 원교의 중도관을 다양하게 설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이미 밝고 청정하여 쌍으로 양변을 차단하고 바르게 중도에 들어가서 쌍으로 이제를 비추니 부사의한 부처님 경계를 구족하여 줄어듦이 없느니라.

心旣明淨에 雙遮二邊하고 定入中道에 雙照二諦하니 不思議佛之境界를 具足無減하니라. [摩訶止觀;大正藏 46, p. 17上]


중도의 내용은 쌍차쌍조로 그것은 부사의한 부처님 경계이지 보살의 경계는 아닙니다. 위에서 ‘쌍으로 양변을 차단하여 바르게 중도에 들어간다’고 하니 혹시 잘못 이해하여 쌍으로 양변을 차단하는 것과 따로 중도가 있는 것같이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 표현은 구름이 걷히니 해가 드러난다는 식입니다. 구름이 걷히면 해가 드러나고 해가 드러나면 구름이 걷히는만큼, 쌍차와 쌍조에는 절대로 간격이나 거리가 있을 수 없습니다. 언어로써 표현하자니 쌍차쌍조이지, 실상을 알고 나면 쌍차가 곧 쌍조이고 쌍조가 곧 쌍차로서 언제든지 차조(遮照)가 동시이며 그 둘을 분리할 수 없습니다.


마땅히 알아라. 종일토록 말해도 종일토록 말하지 않은 것이고 종일토록 말하지 않아도 종일토록 말한 것이며 종일토록 쌍차하여도 종일토록 쌍조한 것이다. 깨뜨린 즉 세우는 것이요 세운 즉 깨뜨리는 것이다.

當知하라. 終日說終日不說하고 終日不說終日說하여 終日雙遮終日雙照하니 即破即立이요 即立即破니라. [摩訶止觀;大正藏 46, p. 55上]


‘종일토록 말함’은 쌍조이다. 아무리 쌍조하여도 그 자취가 적정하여 설한 것이 없기 때문에 종일토록 말하여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이 됩니다. 또 ‘종일토록 말하지 않음’은 쌍차이다. 종일토록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말한 것이 됩니다. 이와 같이 쌍차가 쌍조이고 쌍조가 쌍차가 되니 대광명이 적적한 가운데 미진수의 불찰을 덮고도 남으나 그 자체는 공공적적(空空寂寂)해서 한 가지 상도 볼 수 없습니다.

‘깨뜨리는 것’이란 곧 차며 ‘세우는 것’이란 곧 조(照)입니다.  그러므로 ‘깨뜨린즉 세우는 것이요, 세운즉 깨뜨린 것이다’는 뜻은 아무리 쌍차를 해도 쌍조이고 쌍조를 해도 쌍차라는 말입니다. 차가 즉 조고 조가 즉 차로서 허공을 두 쪽 내면 냈지 이것들은 원융하여 결코 두 쪽을 낼 수 없습니다. 색(色)과 공(空)이 원융하고 선(善)과 악(惡)이 무애하며 시(是)와 비(非)가 원융하고 중생(衆生)과 불(佛)이 무애해서, 끝없는 시방의 허공계를 아무리 둘러봐도 오직 일심법계(一心法界) 이외에는 아무것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것이 무장애법계(無障碍法界)입니다. 이것은 언제든지 쌍차쌍조가 근본이 되며 이 쌍차쌍조인 중도를 떠나서는 절대로 성립되지 않습니다.


중도관이라 함은 중(中)은 둘이 아님을 뜻으로 삼고 도(道)는 능통함을 이름하며 하나의 참된 도리[一實諦]를 비추어 공허하게 통하여 걸림이 없는 것을 중도관이라 한다. 그러므로 경에 말하기를 앞의 두 가지 관(觀)은 방편도이니 두 공관으로 인하여 중도에 들어가서 이제를 쌍조하고 마음마음이 적멸하여 자연히 일체지의 바다에 들어간다고 한다.

中道觀者는 中以不二爲義하고 道是能通爲名하니 照一實諦하여 虛通無滯를 名中道觀也라 故로 經云 前二觀은 爲方便道라 因是二空觀하여 得入中道하여 雙照二諦하고 心心寂滅하여 自然流入薩婆若海라 하니라. [維摩經玄疏 1;大正藏 38, p. 525下]

‘중(中)은 둘이 아니다’는 것은 모든 것이 다 원융하다는 말이며, ‘능통하다’라는 것은 일체가 막힌 데 없이 무애하다는 말입니다. ‘하나의 참된 도리[一實話]’는 자성°법계°법성°진여 등을 말하는데, 무애자재한 중도의 대지혜가 걸림 없이 하나의 참된 도리를 비추는 것을 중도관이라 합니다.

‘이제를 쌍조한다’에서 쌍조는 명°암을 떠난 자리에서 하는 말입니다. 이것을 보통 중생이 보는 명암(明暗)을 말하는 것이라거나, 전지로 불빛을 비추듯이 비추는 것으로 알면 참으로 중도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쌍조이제가 되면 대적멸 대적정 삼매를 얻어 자연히 일체지를 구족한 부처님의 바다에 들어가 유희하기 때문입니다.

 6) 불이법문(不二法門)

 

둘이 아닌 법문[不二法門]이란, 대립하는 두 존재가 본질적으로 볼 때는 둘이 아니라는 것을 설한 법문입니다. 그리고 이 둘이 아닌 것[不二]에 의해 드러나는 것이 곧 중도입니다.

불이법문을 설한 대표적인 경전으로는 무엇보다도 유마경(維摩經)이 손꼽힙니다. 그러므로 천태스님도 자신이 지은 여러 저서에서 불이법문을 논할 때 특히 ꡔ유마경ꡕ의 입불이법문품(入不二法門品)에 나오는 문수(文殊)보살과 유마(維摩)거사의 불이법문을 자주 거론하였습니다.


대열반경에 말하기를 명(明)과 무명(無明)은 그 성품이 둘이 아니니 둘 아닌 성품이 곧 중도라 하니라. 중도는 이미 양변이 공하며 이 공도 또한 공하다. 그러므로 공공공이라 이름하며 불가득공이라 이름하니 이것이 둘 아닌 법문에 들어감이다. 곧 원교는 공문(空門)에 의하여 넓은 문[普門]이라는 뜻을 밝힌 것이다.

大經에 云 明與無明은 其性不二하니 不二之性이 即是中道라 하니라.  中道는 旣空於二邊하며 此空亦空이라. 故名空空空이며 名不可得空이니 是爲入不二法門이라. 即是圓敎就空門하여 辯普門之意也라. [觀音玄義;大正藏 34, p. 888上]


‘명과 무명의 성품이 둘이 아니다’ 함은 무명 그대로가 실성이고 환화공신 그대로가 법신이란 말입니다. 중생이 변견 때문에 명과 무명을 둘로 보는 것이지 정견으로 보게 되면 그 성품이 둘이 아닙니다. 이것이 불이중도(不二中道)로서 하나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며, 같으면서 다르고 다르면서 같은 도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중도는 이미 양변에 공(空)하나 이 공도 또한 공(空)하므로 비고, 비고 또 빈 것입니다. 전체가 비었다는 그 병도 다 떨어져야 중도에 들어가는데 그것은 이름도 얻을 수 없고 모양도 얻을 수 없는 불가득공입니다. 이 공은 변견의 공이 아니라 자재무애한 불가득공입니다. 이것은 일승원교가 공문(空門)에 나아가서 십법계를 두루하고도 남는 원리를 설하는 데서 불이법문을 설한 것입니다.

그런데 중도가 양변을 완전히 여의면 또한 양변이 통합니다. 즉 유(有)가 무(無)이고 무(無)가 유(有)로서 둘이 아니며, 조(照)가 적(寂)이고 적이조(寂而照)하여 하나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입니다. 이것이 둘 아닌 법문이고 일승원교입니다. ꡔ법화경ꡕ의 보문품에서 관세음보살이 삼십이응신(三十二應身)을 나투어 일체 중생을 제도할 때의 넓은 문[普門]은 실제로 이러한 중도관에 입각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유마경 가운데에 둘이 아닌 문에 들어간다고 설하는 것은, 생사와 열반이 둘이라도 생사와 열반에 의지하지 않음을 둘이 아니라 이름하며, 또한 다시 하나도 아니다. 무슨 까닭인가. 이미 둘을 버리고 다시 하나에 머무른다면 하나는 하나 아님에 대하여 도리어 다시 둘을 이루니 어찌 둘이 아니라 이름하겠는가? 지금 둘에 머무르지 아니하므로 하나도 아니며 둘도 아니라고 말하며, 또 있는 것도 아니며 없는 것도 아니라고 이름한다. 있지 아니하다는 것은 가(假)를 파함이고, 없지 아니하다는 것은 공을 파함이며, 있지 아니하다는 것은 둘을 파하고, 없지 아니하다는 것은 하나를 파함이다. 만약 이러하다면 응당 중도에 있으나 이 중도도 또한 공이다.

如淨名中에 說入不二門者는 生死涅槃이 爲二어늘 不依生死不依涅槃을 名爲不二며 亦復非一이라. 何以故오 旣除於二하고 若復在一하면 一對不一이 還復成二이니 豈名不二耶아 今不在二故로 言不一不二며 亦名不有不無라. 不有는 是破假요 不無는 是破空이며 不有는 是破二요 不無는 是破一이라 若爾者인댄 應在中道이나 中道도 亦空이니라.  [觀音玄義 下;大正藏 34, p. 888上]


생사와 열반이 비록 상대적이지만 생사도 의지하지 않고 열반도 의지하지 않고 양변을 완전히 여의면 이것이 곧 중도입니다. 이 중도는 둘이 아니고 또한 하나도 아닙니다. 그 이유는 둘은 내버리고 하나를 다시 취하면, 즉 양변을 여의고 그 뒤에 중도라는 것을 두게 되면 하나에 대하여 다시 하나 아닌 것이 상대가 되어 둘을 이루니 차별의 변견에 떨어집니다. ‘둘이 아니다’ 하는 것은 양변을 여의어 양변 자체도 찾아볼 수 없고 중도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을 의미하므로, 그밖에 다시 중도가 서게 되면 이것은 결코 진정한 둘이 아닌 것[不二]이 아닙니다. 열반을 증득했다고 열반에 머무르면 열반이 아니고 성불했다고 부처에 집착하면 부처가 아닙니다. 실제로 중도를 정등각해서 양변에 머무르지 않으므로 하나도 아니며 둘도 아니고, 있는 것도 아니며 없는 것도 아닙니다. ‘있지 아니하다는 것[不有]은 가(假)를 파하는 것’이란 중생들은 색을 집착하나 색이 본래 공해서 무엇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있다는 유견(有見)을 부수어 버리는 것입니다. ‘없지 아니하다는 것[不無]은 공(空)은 파한다는 것’이란 중생들이 색의 자성이 공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니 공에 집착하므로 없는 것이 아니라고 하여 공에 집착하는 것을 부수는 것입니다. 있지 아니하다는 것은 둘을 파하고 없지 아니하다는 것은 하나를 파함이니, 유(有)도 파하고 무(無)도 파하며 색도 파하고 공도 파하면 거기에 마땅히 중도가 있으나 그러나 그 중도도 또한 공입니다.

늘 말하지만 양변을 완전히 여의는 동시에 중도에 집착하면 그것은 중도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실로 양변을 여의면 불가득공이라 중도라는 것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중생들을 위해 억지로 할 수 없이 공이요 중도라고 이름하는 것이지 중도 자체는 실제로 공해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것이 곧 불이법문입니다.


문수(文殊)는 설하되 설하지 않음으로써 불이문(不二門)으로 삼고, 정명(淨名)은 입을 막음으로써 불이문으로 삼는다. 자세히 살피건대 저 경문에는 모두 네 문의 뜻이 있다. 조법사(肇法師)가 주석해 말하기를 모든 보살은 모두 법의 모습을 말하니 곧 유문(有門)이요 문수(文殊)는 말하지 않음으로써 말하니 이것은 곧 공문(空門)이다. 사익(思益)에 말하기를 일체법이 바르며 일체법이 삿되다 하니 이것도 역시 넓은 문[普門]의 뜻이다. 마음이 법계에 노닒이 허공과 같으니 이것은 공하면서도 또한 유의 문의요, 정명(淨名)의 말없음은 공도 아니고 유(有) 아닌 문이다.

文殊는 說無說로 爲不二門하고 淨名은 杜口로 爲不二門이라 細尋한대 彼文皆有四門義하니 肇師注云 諸菩薩은 歷言法相하니 即有門이요 文殊는 言於無言하니 此即空門이라 思益에 云一切法正하며 一切法邪라 하니 亦是普門意라 遊心法界如虛空하니 是亦空亦有門이요 淨名黙言은 即非空非有門이니라. [觀音玄義;大正藏 34, p. 888上]


‘설하되 설하지 않음’이란 아무리 설해도 설함이 없다는 뜻이니 문수보살은 설하되 설함이 없음으로써 불이법문(不二法門)을 하였습니다. 정명(淨名) 즉 유마힐(維摩詰)은 문수보살이 무엇으로 불이법문을 삼겠느냐고 문수보살이 질문하자 아무 말도 안 하고 침묵을 지키자 이에 참으로 유마거사가 불이법문을 설한다고 칭찬했는데, 이 말은 『유마경』에 나옵니다. ‘두구(杜口)’는 입을 막는다는 것으로 곧 말을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경문에 네 가지 문의 뜻이 있다고 했는데 알고 보면 네 가지 문이 각각 다른 것이 아닙니다. 중생이 변견으로 볼 때는 네 문이 각각 다르지만 아는 사람이 볼 때는 네 문이 무애합니다. 일체법이 바르며 일체법이 삿되다는 것도 변견에 따른 정(正)과 사(邪)가 아니라, 정과 사를 완전히 성취하면 정이 즉 사이고 사가 즉 정이 되어 원융무애를 성취하게 되며, 따라서 넓은 문[普門]의 뜻이 성립됩니다. ‘마음이 법계에 노닒이 허공과 같다’에서 허공은 형상도 없고 모양도 없고 광대불변한 것을 비유하며, ‘법계에 노닌다’는 것은 활동하는 지혜 자체를 말합니다. 허공을 먼 데서 볼 때는 텅 비어 있는 허공이지만 이것은 또한 무한한 활동 능력이 있으므로 공하면서도 또한 있다는 문[亦空亦有門]입니다.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도록 설명하자니 공문(空門) ° 유문(有門) ° 역공역유문(亦空亦有門) ° 비공비유문(非空非有門)이라 구분하는 것이지, 실상 그 내용은 유가 즉 무고 무가 즉 유로서 서로 융통하여 하나를 들면 넷이고 넷을 들면 하나로 어떤 한계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무명의 인연을 관하여 둘 아닌 법문에 들어가면 부사의 해탈에 머무른다. 그러므로 이 경에서 둘이 아닌 법문에 들어감을 밝히니 곧 이것이 중도이다. 이제(二諦)를 쌍조(雙照)하면 자연히 일체지의 바다에 들어간다.

若觀無明因緣하여 入不二法門하면 住不思議解脫也라. 故此經에 明入不二法門하니 即是中道라. 雙照二諦하면 自然流入薩婆若海니라. [維摩經玄疏;大正藏 38, p. 534]

‘무명의 인연을 관하여 둘이 아닌 법문에 들어가면 부사의 해탈에 머무른다’라는 것은 중도정관에서 볼 때 하는 말입니다. 무명을 바로 보면 무명 이대로가 법성이고 법계이며 전체가 모두 대광명이 되어 마(魔)°불(佛)을 찾아볼 수 없고, 세간(世間) ° 출세간(出世間)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 자리가 곧 부사의 해탈경계인데 부사의 해탈경계라 하여 마치 가제가 굴에 들어앉듯이 머무를 곳이 있는 줄 알면 큰일납니다. 본래 머무를 곳이 없지만 중생들의 이해를 도모하기 위해서 편의상 그렇게 말한 것으로 머무름이 없는 머무름[無住而住]을 말하는 것입니다. 유마경에서 불이법문(不二法門)에 들어가는 것을 밝혔는데, 이것은 곧 중도를 말합니다. 이제를 쌍조하면 자연히 살바야해(薩婆若海) 즉 일체지(一切智)의 바다에 들어가 중도를 성취하게 됩니다. 

진리를 모르고 사는 이의 백 년은 진리를
깨닫고 사는 이의 하루만도 못하다.
(불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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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반도시 16-01-08 19:56
 
진리를 모르고 사는 이의 백 년은 진리를
깨닫고 사는 이의 하루만도 못하다.
(불경)
혁명밀알 16-01-08 22:12
 
중도의 내용은 쌍차쌍조로 그것은 부사의한 부처님 경계이지 보살의 경계는 아닙니다.
혁명밀알 16-01-08 22:13
 
유마경에서 불이법문(不二法門)에 들어가는 것을 밝혔는데, 이것은 곧 중도를 말합니다.
해오 16-01-09 00:48
 
‘쌍으로 양변을 차단하여 바르게 중도에 들어간다’고 하니 혹시 잘못 이해하여 쌍으로 양변을 차단하는 것과 따로
중도가 있는 것같이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 표현은 구름이 걷히니 해가 드러난다는 식입니다.
구름이 걷히면 해가 드러나고 해가 드러나면 구름이 걷히는만큼, 쌍차와 쌍조에는 절대로 간격이나 거리가 있을 수 없습니다.
언어로써 표현하자니 쌍차쌍조이지, 실상을 알고 나면 쌍차가 곧 쌍조이고 쌍조가 곧 쌍차로서 언제든지 차조(遮照)가 동시이며
그 둘을 분리할 수 없습니다.
해오 16-01-09 00:48
 
중도가 양변을 완전히 여의면 또한 양변이 통합니다. 즉 유(有)가 무(無)이고 무(無)가 유(有)로서 둘이 아니며,
조(照)가 적(寂)이고 적이조(寂而照)하여 하나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입니다. 이것이 둘 아닌 법문이고 일승원교입니다.
겨울 16-01-09 09:06
 
마음이 이미 밝고 청정하여 쌍으로 양변을 차단하고 바르게 중도에 들어가서 쌍으로 이제를 비추니 부사의한 부처님 경계를 구족하여 줄어듦이 없느니라.
딴따라고사리 16-01-09 14:57
 
문수(文殊)는 설하되 설하지 않음으로써 불이문(不二門)으로 삼고, 정명(淨名)은 입을 막음으로써 불이문으로 삼는다.
카오스 16-01-09 19:39
 
‘종일토록 말함’은 쌍조이다.
아무리 쌍조하여도 그 자취가 적정하여 설한 것이 없기 때문에 종일토록 말하여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이 됩니다.
카오스 16-01-09 19:39
 
또 ‘종일토록 말하지 않음’은 쌍차이다. 종일토록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말한 것이 됩니다.
이와 같이 쌍차가 쌍조이고 쌍조가 쌍차가 되니 대광명이 적적한 가운데 미진수의 불찰을 덮고도 남으나
그 자체는 공공적적(空空寂寂)해서 한 가지 상도 볼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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