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서원은 봉건 후기 경학교육의 생수 원천이라 할 수 있다. 주희는 시에서 “개천이 어떻게 맑아질 것인가? 원천되는 생수가 있음이로다”하고 읊은 적이 있다. 송나라 이후 무거운 교육체계에서 서원은 지식인들에게 학술토론과 사상자유를 줄 수 있는 유일한 맑은 생수의 원천이었다. 송나라 이후의 관학(官學)은 경사(京師)에는 태학이 있었고, 지방에는 주현학(州縣學)이 있었다. 태학과 주현학 하에도 소학이 부속되었다. 관학 외에 민간이 개최한 많은 사서와 서원이 있었다. 사서는 소학에 해당되며, 서원은 대학에 해당된다. 서원은 대부분 풍경이 아름다운 조용한 곳에 있으며, 학자들이 학술토론과 강의를 진행하는 기구였다. 위진남북조 시기의 정사(精舍)와 유사하며 불교사찰의 영향을 받았다. 서원이 대규모의 민간 교육기구가 된 것은 남송부터 비롯되었다. 통계에 의하면 당시에 약 300 여개가 있다고 한다. 저명한 것으로는 악록서원(岳麓書院),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 숭양서원(嵩陽書院) 등이 있다. 원나라 서원은 약 220 여개가 있는데, 그 중 삼분의 이가 양자강유역에 있다. 명나라 서원은 명나라 중기에 부흥하였다. 전성기 때는 1200 여개에 달하였고, 반 수 이상이 양자강 유역에 있었다. 그러나 명말 가정(嘉靖)에서 천계(天啓)연간에는 서원을 불사르라고 네 차례나 지시하였다. 송, 원, 명의 서원은 모두 저명학자들이 주관하였다. 경비의 출처는 주로 전조(田租)로 학전(學田)은 조정에서 찬조하고 개인이 기부하였다. 규모가 작은 경우에는 학생이 수 십인이고 크게는 천 여명에 달하였다. 당시의 저명한 학자 예컨대 남송의 주의, 육구연(陸九淵), 장식(張栻), 여조겸(呂祖謙), 명나라의 왕양명, 담약수(湛若水) 등 대부분이 서원에서 경을 강론하거나 강의한 적이 있다. <주자어류> 140권은 바로 99명의 주희 제자가 강의 필기를 모아 편집한 것인데, <논어>의 어록체 저서와 유사하다. 청나라 서원은 약 1,900 여개가 있었다. 대부분은 지방정부의 손에 통제되어, 진짜 민간이 운영하는 곳은 십분의 일도 되지 않았다. 서원 경비는 정부에서 마련해 주었고, 서원주지와 강론자의 임명권도 지방관원의 손에 통제되었다. 이러한 서원은 대부분 과거시험을 목적으로 하며, 사서오경을 배우고 팔고문 배우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서원에서 가장 활기 있는 것은 ‘강회(講會)’의 풍조로 주희는 부흥한 배록동서원에서 시작하였다. 학술적 관점이 다른 ‘심학(心學)’의 창시자 육구연을 초빙하여 강의와 변론을 하게 하였다. 또한 육구연의 강의를 서원 문에 새겨두어 주희의 학자로서의 포부를 나타냈다. 명나라 왕양명과 학술적 관점이 다른 담약수 및 그 각각의 제자들도 모두 서원에서 강의와 변론을 하였다. 강회는 월회로 이루어졌다. 일반적으로 매월 두 차례로 매번 3일이다. 대회가 있을 경우, 일반적으로 주희의 생일날 혹은 기일에 거행하였다. 청강생들은 서원 학생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소문을 듣고 온 학문에 관심을 갖는 사람도 있었는데 모두 환영을 받았다. 그러므로 강회는 거의 지역적인 학술집회 이었다. 강회의 내용은 사서오경과 관련된 교학내용이 있었다. 더 많은 경우는 학자 자신의 경학에 대한 이해로 그 중 시국의 경전의 주장이나 도통을 준수하지 않음을 비평하는 주장도 있어서 학술연구와 발전을 대대적으로 추진시켰다.
2. 송원명청 경학교육의 입법 및 근대 헌정이념에 대한 영향
송나라 이후 경학교육 중 정주이학이 주도적인 지위를 차지하여 법률상의 중형화(重刑化)에 대해 영향을 미쳤다. 지식인 중에 있었던 반주류 의식 역시 고문경학과 금문경학을 이용하여 송학의 주도에 저항하였다. 특히 명말 청초 두 시기는 더욱 뚜렷하였다. 그리고 자주 반관방(半官方)과 사학의 교육장소를 이용하여 자신의 경학 견해를 발표하였다. 심지어 강유위(康有爲)의 유신변법과 장태염(章太炎)의 만청을 물리치자는 주장도 경학의 깃발을 내세웠다. 이는 중국 경학교육의 최후 섬광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정주이학은 ‘천리(天理)를 유지하고 인욕(人慾)을 멸한다’를 주장하여, 중형은 인욕을 멸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여겼다. 이러한 주장은 당시 중앙 전제집권의 요구에 부합하였는데, 입법에 대한 영향은 통치자로 하여금 더 이상 과거처럼 엄격한 형벌을 논하고 엄격한 형벌을 사용하는 것을 기피하지 않았다. 그러자 형법에서 중형의 경향이 떠오르기 시작하였고, 명나라 초의 <대고(大誥)>와 명률, 청률의 내용에 모두 이러한 경향이 반영되었다.
1840년 아편전쟁 이후 사대부와 지식인 사이에 개혁을 요구하는 외침이 매우 높았다. 이러한 개혁은 오히려 경학에서 이론적 근거를 찾을 수 없는 고충이 있어서 쉽게 보수파에게 반박을 당했다. 강유위는 과거의 실패와 북경에 올린 <청황제에게 올리는 첫 번째 서한>이후, 개혁파의 이론적 곤경을 깊이 깨달았다. 광주에서 ‘만목초당(萬木草堂)’을 운영하여 <새로 배우는 위경고(僞經考)>, <공자개제고(孔子改制考)> 두 책을 지어 교재로 삼아 변법이론을 선전하였다. 전자는 서한의 류흠(劉歆)이 고문경학을 전부 위조한 ‘위경’이라고 책망한 것이었고, 후자는 공자를 개혁가로 변모시켜 금문경학의 <공양춘추>에 대해 하휴(何休) 가 주(注) 한 ‘삼세’설을 이용하여 “공자는 만세를 위해 법을 만들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청말은 바로 공자가 말하는 ‘거난세(據亂世)’에서 ‘승평세(升平世)’의 개혁시기이며, 바로 군주전제에서 군주입헌제로 들어가는 과도기라고 주장하였다. 동시에 강유위는 또 ‘삼세’를 81개 단계의 ‘작고 작은 삼세’로 나누어 해석하여, 개혁은 반드시 순서에 따라 점진적으로 해야 하며 절대 훌쩍 뛰어 넘어서 민주공화의 ‘태평세’로 갈 수 없는 것인데 그렇지 않으면 천하에 대란이 생긴다고 보았다. 그의 제자 양계초(梁啓超)는 “무릇 사대부로서 책을 읽고 터득함이 있는 자는 당시의 제도에 완전하지 못한 점을 느낄 때 변통을 생각해야 하는 것은 가장 보편적인 것이며, 공자의 <춘추>도 그러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춘추>에서 말하는 국(國)과 사(事)는 반드시 이 국가에 이 일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공자가 이를 빌어 어떤 이치를 설명하는 것이며 모종의 이상을 나타내는 것으로, 공자가 말하는 제도는 사실 그가 실행하고자 하는 제도이며, 고인이 정말 이미 실행한 제도는 결코 아니라고 보았다. 이것이 바로 ‘탁고개제(托古改制)’이다. 탁고개제의 설에 의하여, 국가와 국민에게 유리하기만 하면 성인이 말한 근거가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모든 개혁사상은 그 어느 것도 모두 제기할 수 있으며, 심지어 일부 성인의 말도 변질될 수 있었다. 지난날 공자도 바로 그러하였다고 여겼다. 청말 금문학파의 이러한 사상은 한나라의 금문학파 보다 대담하며, 경학이론의 커다란 돌파라고 말할 수 있고, 동시에 경학과 경학교육의 말로이기도 한 것이었다.
장태염은 고문경학의 마지막 대사(大師)인데, 육경과 경학은 단지 역사의 기록이며 <춘추>는 단지 일반적인 역사로써 ‘만세를 위해 법을 제정’한 뜻이 전혀 없다고 여겼다. 또한 동중서, 강유위 등 금문학자는 모두 억지로 부합하려 하고 임금을 비위를 맞추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는 만청을 물리치고 공화국을 설립하고 공자를 교주로 삼는 것을 반대하기도 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여전히 경을 읽자고 주장하고, 경을 읽는 것은 혁명과 충돌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독경은 이로우며 폐해가 없다를 논함> 이란 논고를 쓴 적이 있는데, “오늘날 독경은 천 가지 이로움이 있고 페해가 하나도 없다”고 주장하였다. 또 제목이 <국학의 통종(統宗)> 이란 연설을 한 적이 있으며, ①<효경> ②<예기>의 <대학> ③<예기>의 <유행(儒行)> ④<의예>의 <상복> 등 4편의 경서를 읽도록 선도하였다. 아울러 “강론하고 실행하며, 자신을 수행하고 치인하는 도리는 대략 모두 있다”고 여겼다.
Ⅵ. 결론
1901년 청나라 조정은 장지동(張之洞), 류곤(劉坤)의 주장을 채택하여 각 성성(省城), 부주(府州), 현의 서원을 모두 대학당, 중학당, 소학당으로 바꾸었다. 과정은 중서문화 겸용(兼容)인데, 1905년에 과거를 폐지한 후 경학은 교육에서의 영향이 크게 약화되었으나 완전히 물러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1935년 (민국24년) 일본학자 본전성지(本田成之)가 <중국경학사> 결말 부분에서 “오늘날 민국은 비록 과학을 매우 중하게 여기지만, 각 학교는 아직 경학을 제1의 학과로 삼는다”고 언급하기도 하였다. 경학이 완전히 교육영역에서 물러선 것은 1949년 건국 이래 모든 전통문화를 물리친 후이다.
위에서 서술한 것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즉 경학은 중국 고대 농업문명의 결과물로 기원전 2세기의 서한부터 시작하여 유가학파가 선택한 상고문명에서 생성된 5부(이후에 13부로 확대)의 문화경전이다. 이에 의탁하여 주석, 의소, 해설을 기본형식으로 하는 이천 여년의 중·고문명에서 누적되어 발전하면서 형성된 극히 방대하고 복잡한 지식의 틀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가치이념은 한편으로는 사회 등급제도의 합리성을 긍정하는 것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의 화해공존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이었다. 이러한 가치이념은 역대 통치집단의 필요에 부합하기도 하였고, 또한 일반 민중이 받아들이기도 하였다. 이로써 사회 주류의 정치학이 되었고, 입법과 사법의 지도사상이 되기도 하였다. 통치자는 교육 -시험 -선발 -관리의 경로를 통해 경학이념을 선전하였고, 사회 엘리트를 모아 통치의 기초를 확대하였다. 경학교육은 비록 그 사상을 속박하는 폐단이 있었지만, 세습정치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공평한 적극적인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과거시험의 결과가 비록 백에 하나를 선택, 천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지만 필경은 교육받을 사람들을 크게 확대한 것이었고 민중의 도덕적 소양을 향상시켰던 것이다. 경학교육 및 “모두 하품(下品)이고 공부만이 높은 것이다”라는 가치관은 비록 여전히 등급사회의 산물이기는 하지만, 무인정치의 “총구에서 정권이 생긴다” 는 것 보다는 진보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더 중요한 것은 경학이 중국 전통문화에서 귀족정신을 구현한 것인데 귀족정신은 국민정신을 유지하는 관건이 되며, 국가는 귀족이 없을 수 있지만 귀족정신은 없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학교육은 소멸될 수 있으나 경학에 관철된 인, 의, 예, 지, 신의 귀족정신은 소멸할 수 없을 것이다. 어떻게 경학이 온고지신하게 할 수 있는가? 이는 오늘날 중국 지식인의 커다란 과제와 책임이라 할 수 있다.
丁 淩 華(中國 華東政法大學) 번역: 한상돈(아주대) 요약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