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진남북조시기에 경학교육과 연구가 법학에 대한 영향은 주로 다음과 같이 나타나고 있다. 첫째, 율학의 발달을 촉진하였다. 조위명제(曹魏明帝)때 한 나라 말에 경학가들이 만든 율학의 장구(章句)들이 지나치게 방대하고 복잡한 것을 감안하여 “천자가 명을 내려 정현(鄭玄)만 사용하고, 여가(余家) 장구를 섞어서 사용할 수 없도록” 하였다. 동시에 위 명제 때 정위(廷尉) 하에 ‘율박사’의 관직을 설치하였는데, 그 직책은 지방 사법관리에게 법률연수를 진행하고 율학의 장구에 대하여 연구정리도 해야 하였다. 그리고 한나라의 관례에 따라 박사라고 칭하기도 하고, 제자들을 받아 강의도 하였다. 서진 초 장비(張斐), 두예(杜預)가 <진율(晉律)>을 주석하여 <장두율>을 작성하였는데, 당시 율학의 최고 성과로 그 중 두예의 주석은 고문 경학가의 법률에 대한 통찰력 있는 이해를 나타냈다. 둘째, 유가의 경의(經義)가 입법에 스며들기 시작하였다. 한나라는 <구장율(九章律)>의 제약으로 유가 경의는 주로 경전을 인용하여 판결하거나 장구율학에 나타났다. 위진 이후는 직접 입법 내용에 나타났다. 예컨대 <조위율>에 규정된 ‘팔의(八議)’, <진율>에 규정된 ‘관당(官當)’, <북제율(北齊律)>에 규정된 ‘중죄10조’ 등이다. 셋째, 유가 종법원리의 기초와 친등(親等)계산의 기준으로서 상복은 위진남북조의 경학교육과 법률에서 모두 전례없는 중시를 받았다. <진율>에서 ‘준오복제죄(准五服制罪)’원칙을 초보적으로 확정한 후, 더욱 더 상복교육과 연구의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그 결과는 남북조 입법에 반영되었고, 당률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진율>도 이로써 후세 학자들로부터 ‘첫 유교화 된 법전’으로 간주되었다.
Ⅳ. 당나라 경학교육의 특징 및 그 법률적 영향
1. 당나라 경학교육의 특징
당나라 경학교육의 특징은 대부분 과거의 흥행과 관련이 있다.
(1)과거시험의 흥행은 경학교육이 중․하층 사회로 보급되는 것을 확대시켰다. 한(漢) 위(魏) 육조(六朝)이래의 찰거제도는 문벌세족, 구품중정제도의 시행으로 가난한 집안출신 자제들의 벼슬길을 점점 더 가로막았으며, 일반 민중의 교육에 대한 열정도 막았다. 당나라 초기에 창립된 평등한 고시의 과거제도는 벼슬 길이 귀족계층에게만 폐쇄적이었던 것을 넘어 수많은 중‧하층 가난한 선비들에게도 개방되었다. 과거제도의 좋은 점은 절차상 찰거제도의 천거가 주가 되는 것이었고, 고시는 보조로 하였던 것이 바뀌어 지식인이 ‘투첩자응(投牒自應)[스스로 서한을 보내 응함]’을 하여 스스로 고시에 접수신청해서 정해진 날짜에 따라 정해진 고시장에서 고시에 참가하도록 허용하였다. 합격여부는 완전히 문장의 우열로 결정되었다. 말하자면 출신이나 지위 그리고 재산으로 결정되는 것도 아니고, 달변과 사회활동의 영향력으로 결정되는 것도 아니었다. 이렇게 해서 수많은 중‧하층 출신 인사들이 교육을 받을 원동력과 벼슬로 가는 가능성이 생겼고, 경학교육의 청중 역시 대대적으로 확대되었다.
(2)<오경정의>는 경학교육의 기준 교재와 과거시험의 기준 답안이 되었다. 위진남북조이래 학자들은 의소체(義疏體)를 창립하여 각자의 이해로써 경전을 해석하는 ‘유학다문’의 상황이 형성되었다. 과거시험에서 경학의 통일된 표준답안이 필요하므로, 당 태종은 국자제주(國子祭酒) 공영달(孔穎達)과 여러 유학자들에게 <오경정의(五經正義)> 170권을 짓도록 지시하였다. 오경에 주역, 고문상서, 모시(毛詩), 예기, 춘추좌씨전을 취하여 한나라의 주(注)와 위진남북조의 의소(義疏)가 서로 결합하는 방법으로 경학의 주소체(注疏體)를 창제하였다. 그러므로 당나라는 금문경학과 고문경학의 융합시대라고 말할 수 있으나 고문경학을 위주로 하였다. 영휘(永徽)4년 때 <오경정의>를 천하에 반포하여, 매년 과거의 명경부분은 이를 근거로 표준답안을 삼았고, 송나라 때 까지 이어졌다.
(3)과거시험에서 경학 내용은 그리 중시되지 않았다. 당나라 과거에는 여러 과목이 있었다. 경학과 관련하여 주요한 것은 명경과인데, 시험내용은 구경(위에서 이미 소개됨)에다 <효경>, <논어>를 더하여 실제로는 11경이었다. 그 중심은 <예기>, <좌전>(대경이라고 칭함)으로 원래의 오경은 아니다. 명경은 하나의 큰 과로 그 아래에 오경, 삼경, 이경, 삼예(의례, 예기, 주례), 삼전(춘추좌전, 공양전, 곡량전) 등 분과로 나눈다. 명경과 시험의 형식에는 구두시험, 첩경((帖經), 묵의(墨義), 책문(策問)이 있다. 주로 기억암송 능력을 시험하는 것이므로, 당나라 때는 사람들로부터 경시를 받았고 나날이 내리막길로 내려가는 과목이 되었다. 가장 중시를 받았던 진사과 및 각종 명목의 제과(制科)도 일부 경학의 내용에 관련되었으나 중요하지는 않았다. 당시에 가장 중시 받은 것은 시부(詩賦)였고, 경학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당나라의 경학교육은 지식인들이 모두 배워야 했지만 중시되지 못하였으며 일종의 상식교육에 불과하였다.
2. 당나라 경학교육이 법률에 대한 영향
<당률소의>는 당나라 법률의 가장 큰 성과로 중화법계의 이정표적 작품이기도 하다. 당률의 성과는 법 기술사의 성숙함 뿐만 아니라, 정죄양형의 합리성과 ‘관대한 평등’이 있었는데 바로 ‘일괄적으로 예에 준한다’는 규정으로 구현되었다. 마치 민국 시절 총통 서세창(徐世昌)이 “삼예 상복의 학문이 당나라 초기에 흥행하였으므로, 당률은 예에 근거하여 고금의 공평함을 얻었다”라고 지적한 것과 같다. ‘당나라 초기’라는 용어는 그 기초가 위진남북조에 있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고 삼례, 상복학의 흥행은 바로 위진남북조 고문경학의 성과이다. 필자의 통계에 의하면 당률 502조 조문 중 154조는 상복학 즉 친속등급과 관련이 있으며, 전체 조문의 31%를 차지할 정도로 그 비중이 큰 것을 알 수 있다. <당률소의>에 구현된 경학정신의 완선으로 인해, 한·위나라 이래 경학은 법률을 보완하는 ‘경의결옥(經義決獄)’과 율학은 점차 사라졌다.
Ⅴ. 송원명청 경학교육의 변천 및 법률에 대한 영향
1. 송원명청 경학교육의 변천
송원명청의 경학교육은 많은 공통성이 있다. 지면의 제한으로 본 논문에서는 한 단계로 서술하고자 한다.
(1)인쇄술 보급의 경학교육에 대한 촉진 : 간행물 인쇄는 아마 당나라 말년의 익주(益州)(오늘날의 成都)에서 시작하였다. 송나라 초 때는 이미 대량의 불경을 인쇄하였다. 그러나 인쇄술이 확실히 보급된 것은 송나라 제3대 황제 송 진종(眞宗) 때 필승(畢昇)이 활자인쇄술을 발명한 후, 인쇄의 자본과 시간이 대대적으로 절약되고 책 인쇄의 효율성이 향상된 때 부터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보존된 송나라 책이 당나라 때 책 보다 몇 십배가 더 많은 것이다. 인쇄술의 보급은 교육의 보급과 선진문화의 전파를 가져왔다. 교재는 더 이상 한 자 한 자씩 옮겨 적을 필요가 없었고, 오자와 누락 현상도 대대적으로 감소하였다. 정교한 품질의 보조 읽을 꺼리와 고금의 우수작품들이 아주 빠른 속도로 산간벽촌 특히 남방의 산 지역에 전파되어 교육과 경학의 보급을 촉진하게 되었다.
(2)송학의 형성은 경학교육의 활력을 유발하였다. 등광명(鄧廣銘)은 “당나라 후기에 싹터 흥행하고 북송 건국 이후에 대성한 새 유가학파를 송학이라 칭해야”하며, 이학은 단지 송학 중의 하나인 학술유파((流派)일 뿐이라고 여겼다. 송학의 주요 특징은 다음과 같다. ①기존의 경학을 의심하여 경전의 새로운 뜻을 탐구한다. ②경학은 현실을 위해 봉사해야 하며, 명확하게 세상을 구제하고 하늘의 뜻을 널리 펼치는 목적이 있다. ③유가학설을 풍부하기 위해 각 학파 특히 과거 유가와 전혀 맞지 않은 불교와 도가사상을 흡수하였다. 그러므로 송학은 ‘유교의 표면과 불교의 이면’이며, “경학이라고 하기보다 차라리 일종의 철학 혹은 실천도덕학 이다.” 이렇게 해서 경학은 다시금 생명력을 발산하게 되었고 수많은 학자, 영재를 끌어들였다. 북송 희녕(熙寧)시기에 왕안석(王安石)은 과거를 창도하여 경의(經義)로써 선비를 취하도록 하였다. 당 이래의 시(詩)와 부(賦)로 선비를 취하는 것을 폐지하고 동시에 첩경(帖經), 묵의(墨義) 등 경직된 형식을 폐지하였으며 시험을 4차례로 나누었다. 첫 번째는 본경(本經)으로 시, 서, 역, 주례, 예기를 포함한다. 두 번째는 겸경(兼經)으로 논어, 맹자를 포함한다. 이는 <맹자>가 처음으로 경의의 지위로 상승한 것이다. 이상 2차례는 경의를 시험 보는 것이나 “반드시 의리(義理)에 통해야 하고 전부 주소(注疏)를 사용할 필요가 없다”. 세 번째는 출제가 경전에 제한되지 않는다. 네 번째는 시무책(時務策)이다. 왕안석은 또 전문적으로 <삼경신의(三經新義 시, 서, 주례)를 저술하여 학교 교재로 삼았다. 남송 이종(理宗) 때 주희(朱熹)의 <사서집주>는 관학으로 세워져 시험에 주주(朱注)사용을 허용하였다. 이때부터 정주(程朱) 이학이 고대교육 무대를 점거하였다. 그러나 명나라가 팔고(八股)로써 선비를 취한 후, 송학의 이러한 활력은 점차 사라져 갔다.
(3)팔고문의 흥행은 경학교육이 말기로 치닫게 하였다. 원나라 초기에 과거가 폐지되고 원 인종 때는 과거를 회복하여 정주이락으로 선비를 취하는 정식 기준으로 삼았다. 팔고문의 과거문체는 대략 명나라 중엽 성화(成化)시기에 정형화 되었다. ‘제의(制義)’, ‘의’라고도 칭하였는데, 바로 응시의 경의를 가리킨다. 명청시기에는 일반향시(거인시험), 회시(진사시험) 가각 등 세 차례 시험이 있었는데 경의, 논, 책을 포함하고 있다. 그 중 첫 번째 시험인 경의가 가장 중요하다. 시험관의 정력에 한계가 있어 경의권이 통과되지 못하면 바로 직접 도태되고 나머지 두 차례의 시험도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경의권 내에는 사서의 3편과 오경의 4편이 포함되었는데, 모두 팔고로 작문하였다. 사서의(四書義)는 주희의 <사서집주>에 근거하여 의론을 낼 수 있었다. 팔고문은 매 편에 파제(破題), 승제(承題), 기강(起講), 입수(入手), 기고(起股), 중고(中股), 후고(后股), 속고(束股) 등 단락으로 구성되었다. 특히 뒤의 4개 단락은 모두 양고(兩股)가 문형, 글자 수에서 완전히 대응되는 문자로 구성되어 마치 네 사람의 8개 다리와 같아 ‘팔고’라고 부르게 되었다. 문체가 경직되었을 뿐만 아니라 ‘성현을 대신하여 말씀’해야 하여 공맹과 정주의 어투로 말을 하므로 내용이 공허하고 문장의 색채가 전혀 없다. 명청 팔고문의 흥행원인은 첫째 전제통치 하의 여론통제로 야기된 사상 경직화의 결과로써 수험행이 당대의 조정에 대해 의론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둘째 문체 격식이 공정하여 시험관이 통일된 평가기준을 하기 쉽게 하였다. 그러므로 일부 학자들은 이러한 시험의 규범화는 일종의 진보라고 여겼다. 명말 청초의 저명한 학자인 고염무(顧炎武)는 “팔고의 폐해에 대해 분서와 같다고 여긴다”고 날카롭게 지적하였다.
과거시험은 학교교육의 지휘봉과 같다. 그러므로 명청 시기에 관한, 사학 또는 반관(半官)반사(半私)의 서원을 막론하고, 그 교학의 중점이 모두 팔고에 있었으며, 경학교육도 응시 기교 사이에서 맴돌았다. 이러한 경학에 팔고를 더하는 교육은 경학 중에 원래 있던 호연정기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단지 노재(奴才)와 용재(庸才)만 키워졌고 과거와 팔고문만 언급되면 최소한의 충군애국의 기상도 없게 되었다. 청나라 초에는 팔고문으로 개과(開科)하여 선비를 취하였는데, 당초 반청 의사들이 잇달아 하산하여 시험에 참가하였다. 1990년 8국 연합군이 북경을 침입하였다. 연합군의 사령관 와더시는 현상 시험을 개최하였는데 청정부와 의화단을 풍자하는 ‘가르치지 않은 백성의 전쟁’ (<논어>에 어원이 있음)이라는 팔고문 제목을 출제하였다. 당일 응시한 사람의 수가 시험장이 용납할 수 있는 인원수를 훨씬 능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