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 유가경전을 배우도록 한 것인데, 그룹을 이루어 하나의 경을 전문적으로 배우도록 하는 것이다. 교사는 지방학교인 경우 ‘경사(經師)’라 하였고, 중앙의 태학에서는 전경박사(專經博士) 맡았다. 여기서 전경박사란 어느 한 분야 학문을 이끄는 권위자를 관방측에서 인정한 사람을 일컫는 것이다. 각 단계에서 학생들의 입학연령은 서주 때와 같았다. 동한 시기 최식의 <사민월령(四民月令)>에 의하면, “성동(成童) 이상이 되면 대학 입학을 하게하고 오경을 배우도록 한다” 고 되어있는데 여기서 성동이란 15세 이상인 자를 말한다.
한대(漢代)의 경학교육은 관방 이외에도 많은 사학(私學)이 있었다. 왜냐하면 첫째, 관학은 나날이 증가하는 학생들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 우선 관료 자제들을 받아들일 뿐이었고 둘째, 사학의 교학 수준이 관학 보다는 우수하였으며 셋째, 한대의 관리를 선발하는 과거제도에 있어서 사학 출신자들을 얕보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학의 교사는 대부분이 사회에서 덕망이 높은 지식인이었는데, “<춘추>는 집에서 교수가 이루어졌고, 학자들은 멀리서 오기도 하였다”는 기록이 이를 뒷받침 한다. “유숙(劉淑)은…오경을 가르쳤는데 은거해서 정사를 세워 강습을 했으며 학생들은 통상 수백 명이나 되었다”, “포함(包咸)은…<노시>, <논어>를 익혔고, 왕망 말기에는 정사를 세워 가르쳤다”, “향리의 서자업(徐子業)은 <춘추경>을 가르쳤는데, 배우는 자들이 수백 명이나 되었다…” 는 것처럼, 사학이 이루어지는 장소는 보통 ‘정사(精舍)’ 혹은 ‘정려’라고 하였다. <후한서·유림전>에 “경을 배우는 학생들이 도처에 있고,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왔으며, 임시로 정려를 지었는데 들어가는 식량만 수백 석이었다…”는 기록을 보면, 사학의 명사에게서 배우는 것이 성황인 것을 알 수 있다.
고대에서 교육을 마치면 그 진로는 관(官), 리(吏), 사(師)가 되는 것이었으므로, 한나라 때에 경학교육이 점점 흥왕해지는 이유가 되었다. 그 원인은 바로 한 무제가 동중서의 “무릇 공자의 육예 외에 다른 모든 학파를 없애도록 하자”는 주장을 받아들인 후, 경학은 세습받는 것 외에 입신양명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한서·유림전>에는 “무제가 오경박사를 오경박사를 설치한 이래, 제자들을 받아들이고 배우도록 하여 관리가 되게 하기를 백여 년이나 되었으며, 이를 이어받아 점차 융성해지고 하나의 경에도 여러 해석이 있었으며 큰 스승만 해도 천여 명에 이르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당시에는 소학단계를 졸업하면 먼저 <논어>, <효경>을 배우면 ‘리(공무원)’에 선발될 수 있었다. 또 더 깊이 공부하여 대학의 계통적인 경학을 학습하면 과거를 볼 수 있어 ‘관’이 될 수도 있었다. 그 당시 사람들은 “경 읽기에 소홀하면 관직을 얻기가 관부에서 겨자씨를 줍는 것만큼 이나 어렵다”라고 말 할 정도였다.
2. 한대 경학교육의 법률에 대한 영향
한대 때에는 경학교육이 흥기하였는데, 이것이 법률에 미친 영향은 다음과 같다.
첫째, 동중서가 창시한 ‘인경결옥’ 즉 ‘춘추결옥’이다. 이것은 오경 및 <공양춘추>의 경의를 사법상 단죄하거나 죄가 아님을 판단하는데 주요 근거로 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경학에 의한 최초의 법률에의 삼투(滲透)라고 할 수 있다. 동중서는 24세 때 그의 스승인 호모생(胡母生)과 함께 경제(景帝)에 의하여 <공양춘추> 박사가 되었다. 그 후 지금도 보존되어 있는 <춘추번로>를 저술하였는데, 이는 교학 과정 중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 중에서 ‘춘추결옥’의 원칙은 “춘추로 사법판단을 하는데 반드시 사건의 본의를 밝혀야 한다. 그 원의가 사악한 것이면 기다리지 않고 가장 나쁜 자의 죄를 중하게 다스리되 원래가 바른 것이라면 가볍게 처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정죄를 하고 양형을 할 경우 고려해야 할 것은 범죄사실이고, 그래서 범죄동기를 심리해야 하며, 같은 범죄라 할지라도 사실과 동기가 다르면 다른 판결 결과가 있어야 한다. 동중서 만년에는 조정의 사법관들이 어렵고 복잡한 사건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지 의견을 구했고, 동중서는 “경으로써 올바르게 대처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춘추결옥>을 지어 242건의 사건을 다루었다. 그 후에도 공손홍, 아관, 준불의 심지어 장탕 역시 경의로써 결옥을 하였다. 이렇게 하여 사법에 있어서 경의로 결옥을 하는 전통이 형성되어, 적어도 7백여 년간 고대법에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둘째, 장구율학(章句律學)의 법률에 대한 영향이다. 동한 중·후기에는 “숙손선, 곽영경, 마융, 정현 등 제유들이 장구 10여 가(家)를 이루었고, 각 가에는 수십만에 달하는 해석들이 있는데, 단죄를 할 때 사용된 것은 모두 26,272개 조(條), 773만2천6백여 언(言)이 있었다. 언이 나날이 많아져서 보기에 심히 어려웠다.” 이러한 장구는 경학으로 법률을 해석한 것이었다. 동한 말기에 이미 사법에서 보편적으로 적용되었는데, 너무 많았기 때문에 사법관리들이 어떤 것을 따라야 할지 모르는 경우가 흔했다.
Ⅲ. 위진남북조 경학교육의 특징과 법률에 대한 영향
1. 위진남북조 경학교육의 특징
위진남북조는 분열할거의 시기였기 때문에 경학교육 역시 다양해지고 활력이 넘치는 편이었다.
(1)경학교육의 교재는 금문경학에서 고문경학으로 바뀌어졌다. 한대 경학교육의 교재는 금문경학으로 통일해서 전국적으로 사용되어 박사는 모두 금문경학박사였다. 동한 때에 마융, 정현 등이 고문경학을 제창하였는데, 고문경학은 그 당시 끝내 관학이 되지는 못하였다. 위(魏)나라 명제(明帝) 정시(正始) 년간에 태학에서 금문석경(즉 동한의 희평석경)을 만들고 고문(古文) <상서>와 <춘추좌씨전> 등을 인쇄하였다. 역사에서는 이를 ‘정시석경’ 이라 부르는데, 고문경학이 관학으로 되는 시작이라 할 수 있다. 이 때 부터 당나라 때까지 고문경학이 학교 교육을 주도하였다.
(2)대학과 지방학교가 변천하였다. 서진이래 문벌사족 세력이 발전하였고, 귀족관료의 자제들은 교육 우선권을 누렸다. 그래서 태학 안에 국자학을 설치하여 이학(二學)이라 부르고, 5품관 이상의 자녀로 15세가 되면 국자학에 입학할 수 있도록 하였다. 즉 귀족자제대학인 셈이었다. 지방에는 각지의 장관이 자력으로 학교를 세웠다. 서진 때 두예가 형주에 세운 ‘반학(泮學)’이 있었고, 동진 때 유량(庾亮)은 무창에 학교를 세워 “속된 청담을 없애고, 공맹의 가르침을 펼쳤다.” 주목할 만한 것은 중국 북방의 5호16국 시기에는 학교를 세우고 경학교육을 매우 중시했다는 점이다. 그 전에 조유요(趙劉曜)는 “장락궁 동쪽에 태학을 설치하고, 미앙궁 서쪽에 소학을 세워 백성 중에서 13세 이상 25세 이하인 자를 뽑았는데 가르칠만한 자가 1천5백 명이었고, 학식과 덕행이 뛰어난 자로 경을 밝히고 가르쳤다”고 하였다. 진나라 부견(符堅)은 “친히 태학에 와서 학생들 경학의 우열을 살펴 등급을 정하였다. 어려운 오경을 물었는데 박사가 많았지만 대답하지 못하였다.”
(3)전경박사가 오경통재(五經通才)로 발전하였다. 동한 때 어떤 사람들은 여러 경을 배우는 현상이 나타났다. 그러나 박사는 여전히 하나의 경만을 맡았는데, 위진 이후에는 박사 한사람이 몇 가지 경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전경박사의 명칭은 이 때 소멸하였고, 학교이름으로 박사이름을 대신하였다. 예컨대 국자학박사, 태학박사하는 식으로 불렀다. 북위 때는 국자학을 중서학(中書學)으로 고치고 중서학박사를 두었다. 황종학을 설치하여 황자, 황손을 가르쳤고 황종학박사를 두었다. 태학 옆에 4개의 소학을 설치하고 박사를 두었는데, 이를 사문박사(四文博士)라고 불렀다. 따라서 소학에도 박사가 있게 되었다. 한사람이 오경에 정통하거나 더 많은 경에 정통하는 상황도 흔히 볼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종회(鍾會)는 “4살 때 <효경>을 배우고, 7살 때 <논어>를 암송하였으며, 8살 때 <시>를 배우고, 10살 때 <상서>를 배웠다. 11살 때는 <역>을 배우고, 12살 때는 <춘추좌씨전> <국어>를 외웠으며, 13살 때 <주례> <예기>를 배우고, 14살 때 <역기>를 배워 15살 때 태학에 입학하여 여러 가지 기이한 문장과 색다른 교훈을 물었다.” 대학교육과 관리선발은 오경에 능통한 인재들을 격려하게 되었는데 “위나라 문제 황초5년(224년)에는 낙양에 태학을 세웠다.…만 2년에 경 하나를 통달하면 ‘제자’라 불렀고, 외우지 못하면 돌려보냈다. 제자로서 만2년에 경 2가지를 통달하면 문학장고라 하였다. 장고(掌故)로 만3년이 되어 3가지 경에 통달하면 태자사인이 되었다. 사인(舍人)으로 만2년에 4가지 경에 통달하면 랑중으로 삼았다. 랑중으로 만 2년이 되어 5경에 통달하면 언제라도 등용할 수 있는 인재가 되었다.한사람이 15세에 태학에 입학하여 만약 순조롭게 11년을 잘 보내 5경에 능통하게 되면 곧 26세에 고관이 될 수 있었다. 이것은 기타 다른 방법으로 고관이 되는 것보다 훨씬 빠른 속도인 것이다.
(4)상복(喪服)은 오경에서 떨어져 나와 독립된 학문을 이루었다. 2천여 년의 경학교육사를 종합해 보면, 오경 중에서 떨어져 나와 독자적인 학문을 이루고 교재가 된 것은 3가지이다. 즉 위진남북조 때의 <예의> ‘상복’편, 남송 이후의 <예기> ‘대학’편, ‘중용’편이다. 청나라 호배휘(胡培翬)는 “<상복> 1편이 당나라 이전에는 별도로 세상에 행해졌다”고 하였다. 근대의 장태염 역시 “<예의·상복>은 당시에 실용적어서 한나라 말부터 당나라까지 이어졌고, 연구자도 많아 매우 정밀하였다”고 하였다. <수서·경적지>의 통계에 의하면 위진남북조 시기에 ‘상복’을 연구한 전문서적은 70권에 달하고, 대부분이 당시의 저명한 학자들이었다. <상복>편은 또한 교육의 중요한 내용을 이루고 있다. 황실에서도 이를 따랐는데, 북위의 효문제는 친히 청휘당에서 신하들과 <상복>에 대해 강론을 펼친 바 있고, 남조의 대유학자 뢰차종은 “경읍(오늘날의 남경)의 종산 서편 바위 아래 암자를 지어 ‘초은관’이라 이름짓고 황태자, 제왕들에게 <상복>을 가르쳤다.” 사학(私學) 교육에서도 <상복>은 하나의 독립된 분야가 되었다. 예컨대 북위의 정광 년간에 “악손(樂遜)은…거유 서준명이 제자들에게 <효경>, <상복>, <논어>, <시>, <서>, <예>, <역>, <좌씨춘추대의>를 배우게 하였다.”
(5)현학, 불학이 유학과 공전하였다. 남조 때 동진(東晉)이래 현학의 영향을 받아 학자들은 철학에 대한 관심이 매우 컸으며, 강론 시 종종 유가와 도가가 같이 강론되었다. 또한 경학과 불학이 공존하였다. 예컨대 “복만용(伏曼容)은 어려서 학문에 충실하고 <노>, <역>을 잘하여 제자를 모아 가르치는 것을 자업으로 삼았다.” “량소능왕륜(梁邵陵王綸)은 남서주(南徐州) 자사(刺史)로 평소에 마추(馬樞)의 이름을 듣고 학사로 인용하였다. 륜은 <대품경(大品經)>을 강론하고 추로 하여금 <유마(維摩)>, <노자>, <주역>을 강론하게 하고 같은 날 발제하여 말씀을 듣는 사람은 2천 명이 되었다” “서효극(徐孝克)은…매일 두 때를 강의하였는데, 아침에는 불경을 강의하고 저녁에는 <예>,<전>을 강의하였다. 말씀을 듣는 사람은 수백 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