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의미를 공유하지 못하는 사회
이름과 그것이 가리키는 내용이 서로 원망한 지 오래되어, 이런 까닭에 서로 끊어져 소통되지 못한다(名實之相怨久矣, 是故絶而不交).
중국의 고전 『관자』「주합」편에 나오는 말이다. 『관자』는 관포지교(管鮑之交)의 고사로 유명한 중국 춘추시대 제나라의 정치가 관중(管仲)의 이름을 가탁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내용은 그보다 아래 시대인 전국시대까지 여러 사람의 손에 의해 집필된 책이다. 이 책이 탄생한 전국시대는 ‘싸우는 나라들[戰國]’이라는 시대명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천자(天子)가 있는 주나라 왕실의 권위는 갈수록 쇠퇴하고, 대신 그 아래의 여러 제후국들이 천하의 새로운 주인이 되기 위해 각축을 벌이던 때이다.
이에 따라 주나라의 문물제도는 하루가 다르게 힘을 잃어가 통치규범으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한 마디로 구체제는 무너져가는데 이를 대체할 새로운 체제는 아직 가시화하지 않은, 그야말로 격변의 시대였던 것이다.
세대와 진영 논리에 갇힌 말
가치관의 붕괴에 따른 아노미 현상이 이처럼 일상화되자 공동체의 존립근거인 사회적 합의 체계가 삐꺽거렸다. 그 가운데 가장 심각한 것 하나가 바로 ‘말[言]’의 혼란이었다. 말의 혼란은 주로 이름과 그것이 가리키는 내용의 불일치로 나타났다. 같은 단어인데 쓰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의미는 제각각인 상황이 발생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를테면, 시대가 바뀌고 그에 따라 사람들의 생각도 바뀌어 가는데, 그것을 담아내는 말은 아직 새로운 옷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는 형국이었던 셈이다. 앞의 인용문은 바로 당시의 그러한 상황을 지적한 것이다. 격변의 시대가 야기한 언어의 혼란, 그것을 ‘이름과 그것이 가리키는 내용’, 즉 ‘명(名)’과 ‘실(實)’이 서로 원망한 지 오래되었다고 표현한 것이다.
이 사례에서 보듯이, 예나 지금이나 같은 말이 사람에 따라 서로 다른 뜻으로 사용되는 사회는 극심한 변화와 그에 따른 구성원 간의 갈등이 소용돌이치는 사회이다. 지금 우리 사회가 딱 그 모양새이다. 이쪽에서 말하는 ‘방송의 공정성’과 저쪽에서 말하는 ‘방송의 공정성’의 의미가 다르고, 저쪽에서 말하는 ‘적폐’와 이쪽에서 말하는 ‘적폐’의 뜻이 다르며, 한 편에서 말하는 ‘자유민주주의’와 다른 편에서 말하는 ‘자유민주주의’의 내용이 다르다.
진영에 따른 갈등만 심각한 것이 아니다. 부모가 생각하는 ‘담임선생님’은 아이들에게는 ‘담탱이’로 굳어진 지 오래고, 급기야는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그 이미지에 어떠한 흠집도 일어날 것 같지 않았던 ‘엄마’조차도 세대 간에 의미의 균열이 발생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아이들의 교실에서 ‘엄마’는 더 이상 떠올리기만 해도 눈물샘을 자극하는 단어가 아니라 ‘느금마’와 ‘니애미’라는 비속어로 탈바꿈하여 상대를 놀리거나 멸시할 때 쓰인다고 한다
(《시사IN》520호,〈여성혐오 교실을 점령하다〉). 아이들의 교육을 엄마가 전담하는 세태에 그 엄마로부터 시달리고 있는 아이들의 의식이 투영된 현상이다. 그리하여 “엄마지만, 나에게 잘해준다”는, 기성세대에게는 도저히 이해 불가능한 표현이 통용되기도 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 사회의 말의 혼란이 어디까지 왔는가를 새삼 절감하게 된다. 기성세대에게 ‘엄마’는 여전히 ‘신이 모든 곳에 있을 수 없어서 만든 사람’일지 몰라도 요즘 아이들에게는 가급적 빨리 벗어나고 싶은 간섭의 상징이자 귀찮음의 대상일 뿐인 것이다.
시대의 혼돈은 말의 혼란으로 나타나
말의 혼란은 단순히 세대 간 의사소통의 불통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공동체가 원활하게 운영되는 데 심각한 장애를 초래한다. 정치를 맡을 기회가 주어지면 어떤 일부터 하시겠느냐는 제자의 질문에 ‘이름부터 바로잡는 일’[正名]을 하겠다고 한 공자(孔子)의 대답 속에 이 문제에 대한 성찰이 들어있다. 무슨 그런 현실감 없는 말씀을 하시냐는 제자의 반문에 공자는 이것의 엄중함을 이렇게 말한다.
이름이 바로잡히지 않으면 언어가 순조롭게 소통되지 않고, 언어가 순조롭게 소통되지 않으면 일이 원활히 이루어지지 않고, 일이 원활히 이루어지지 않으면 예악(禮樂)이 흥성하지 않고, 예악이 흥성하지 않으면 형벌이 합당하게 작동하지 않으며, 형벌이 합당하게 작동하지 않으면 백성들이 손발을 둘 곳이 없게 된다.(『논어』「자로」)
국가는 기본적으로 공권력의 체제이다. 국가가 추진하는 모든 정책은 궁극적으로 공권력에 의해 강제될 수 있기 때문에 그 실효성을 지닌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가 어떤 국가 속에 산다는 것은 곧 그 국가의 법체계 속에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이 이를 잘 말해준다. 따라서 국가가 정당성을 지니려면 무엇보다도 공권력을 합당하게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 공자의 발언에서 ‘형벌이 합당하게 작동해야 한다’는 말이 가리키는 바다.
하지만 그렇다고 국가가 애오라지 공권력에만 의지해서는 구성원들의 지지를 받을 수 없다는 점 또한 자명하다. 그 공권력의 행사를 뒷받침하는 공동체의 유기적인 질서가 선행되어야 한다.
형벌이 합당하게 작동하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예악의 흥성’을 말하는 이유이다. 전통적인 유교정치사상에서 예와 악(음악)은 각각 공동체 조직의 원심력과 구심력을 상징하는 기표이다. 신분질서의 경우에서 보듯이 예는 기본적으로 구분을 지향하는 규범이고, 악은 정서적 교감을 통한 합일을 추구하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예악의 흥성’으로 대표되는 공동체의 유기적인 질서는 그 안에서 진행되는 여러 영역 또는 층위의 일들이 원활하게 성사되어 갈 때 달성되며, 또 그렇게 되려면 거기에 관여하는 사람들 사이의 의사소통이 순조로워야 한다.
시쳇말로 가정이든 직장이든 사회든 언로(言路)가 막히면 반드시 문제가 발생하는 이치와 같다. ‘일이 원활히 이루어져야 하고’ 그 전제조건으로 ‘언어가 순조롭게 소통되어야 한다’는 것은 바로 이 점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언어를 순조롭게 소통시키는 조건은 무엇인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서로 주고받는 말의 의미가 구성원들에게 공유되는 것이다. 이 일련의 시스템이 무너지면 ‘백성들이 손발을 둘 곳이 없게 된다’고 공자는 말한다. 국가는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자유민주주의’라는 말을 들으면 인간의 기본권부터 연상하는 사람과 이른바 ‘공산독재’에 대한 반대부터 떠올리는 사람 사이에 말이 통할 리 없다. ‘엄마’를 언제나 돌아가고 싶은 마음의 고향으로 생각하는 세대와 기회만 되면 벗어나야 하는 질곡으로 생각하는 세대 사이에 의사소통이 순조로울 리 없다.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그들이 몸담고 있는 공동체의 앞날이 희망적일 수 없음은 불문가지이다. 시대의 혼돈은 무엇보다도 말의 혼란으로 나타난다. 지금, 우리시대 말들의 의미가 정박할 곳을 찾지 못하고 표류하고 있다.
이 땅의 문화는 어디로 갔는가?
대선 때였다. 여러 후보자들이 제시했던 각종의 공약 가운데 우리 문화와 관련된 공약을 찾아보았지만, 이렇다 할 내용이 없었다. 대선 후 대통령직 인수위가 조직되어 여러 정책들이 논의되고 검토되고 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도 문화에 대한 직접적 안건들은 아예 언론보도에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이는 인수위가 가지고 있는 문화에 대한 관심의 질과 양을 나타내는 현상이다. 그러나 문화를 우리는 이렇게 우습게보아도 되겠는가?
대한민국 헌법 제9조에는 “국가는 전통문화의 계승발전과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야 한다.”라고 규정되어 있다. 이렇듯 전통문화의 계승발전과 민족문화의 창달은 국가를 이끌어나갈 사람들이 책임지어야 할 헌법적 가치이다.
그러나 오늘날 ‘문화의 계승과 창달’은 선언적 의미로 전락되고 있다. 이는 문화를 무의식중에 사치나 소비 정도로 인식하려는 천박성의 표출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이러한 추측이 사실이라면, 이는 민족문화의 재난이며 국가적 위기일 수밖에 없다.
예로부터 나라의 등급… 문화수준과 비례해
조선왕조 후기 19세기를 살았던 다산 정약용은 나라의 등급을 생각할 때 문화를 중시했다. 그래서 그는 문화의 정도에 따라 중화(中華)와 이적(夷狄)을 구별했다. 이는 중화를 중원(中原)이란 지리적 특성과 한족(漢族)이라는 혈연을 기준으로 하여 제한해 왔던 종전의 사고방법과는 판이하게 다른 주장이었다.
전통적 관념에서는 이적일 수밖에 없었던 탁발씨(拓拔氏)나 일본(日本)을 이적으로 규정해 왔다. 그러나 그는 문화를 기준 삼아 그들이 더 이상 이적이 아니라 이미 중화가 되었다고 넉넉히 평가해주었다. 그에게 있어서 조선은 물론 중화의 전통을 이어주는 존재였다. 그도 조선이 중화임에 남다른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20세기 전반기 우리가 국권을 상실했을 때, 독립을 지향하던 선조들은 치열하게 민족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단재 신채호, 백암 박은식 그리고 위당 정인보, 민세 안재홍 선생 등과 같은 이들에게 민족운동을 전개하게 해 준 힘은 바로 우리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었다.
일제하 독립운동을 하면서 신고의 나날을 보내고 있던 백범 김구 선생도 우리나라를 ‘문화의 나라’로 만들고자 했다. 문화는 잃었던 국권을 되찾을 수 있는 힘을 주기까지 했다.
한 나라의 국격은 경제력이나 국방력 등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그리스는 유럽 공동체의 경제적 말썽꾸러기로 되어 있다. 그러나 그 나라를 우리가 높게 평가해 주는 까닭은 그들의 문화전통이 찬란하고, 그 문화의 혜택을 함께 공유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프랑스나 독일이 존경받는 이유도 그들의 국방력이 강해서가 아니라 그 문화의 힘 때문이다. 우리는 이렇게 한 나라의 국격을 논하는 데에는 반드시 문화라는 부분을 주목하고 있다.
우리 정부는 문화의 가치를 몰라도 너무 몰라
문화는 이렇듯 한 나라의 국격을 결정짓는 중요한 기준이다. 민족문화의 창달은 우리의 헌법적 가치이기도 하다. 그런데 지난 대선 때에 나라 일을 맡아 보겠다고 나섰던 사람들 가운데 우리 문화의 계승과 창달을 위해 세금을 투자하겠다고 약속한 사람을 보지는 못했다. 그들 모두는 국민의 먹을거리를 해결하는 일과 국민을 편하게 해주는 일에 온통 관심을 집중하고 있었다.
국방을 위해 세금을 투자해야 한다는 데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라를 지켜야 할 이유가 우리 건강한 삶과 문화를 지키기 위해서임을 미처 생각하지 못한 듯하다.
가치의 핵심인 건강하고 올바른 우리 문화를 국방과 대등하게 생각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복지정책 가운데 문화복지에 대한 개념이 있는가를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보이지 않는다. 국민이 필요한 정신적 양식인 문화에 대해서는 경제와 전혀 무관한 듯 생각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국가는 민족사의 연구와 발전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역사학이 아닌 이른바 뉴라이트 세력의 정치론이 역사학의 기능을 잠식해도 되겠는가? 국가의 언어정책은 무엇이어야 하며 이에 대한 관심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강화되어야 하나? 민족의 고전을 정리하고 번역하는 데에 드는 예산을 당장 두 배로 올린다 하여도 부족하다.
도서관정책에 획기적 변동을 가해서 문화의 핵심인 출판문화를 살리려는 정책은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뉴질랜드와 같은 신생 국가의 경우에도 인구 5천의 도시에 어엿한 박물관이 있다. 그 나라는 결코 돈이 남아서 박물관과 같은 공공시설을 설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는 그 나라의 문화수준을 나타낸다.
정보통신사업의 콘텐츠를 풍부하게 하기 위해서도 우리의 전통적 문화에 대한 관심을 소홀히 할 수 없다. 아시아의 청취자들을 텔레비전 앞으로 끌어들였던 ‘대장금’이란 연속극이 있었다. 이 극의 대본은 한글로 출판된 조선왕조실록의 번역문 몇 줄에 근거하여 작성되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대장금은 조선왕조실록 전체 번역비의 몇 배를 벌어들였다.
복지나 국방뿐만 아니라 경제도, 그리고 교육도 문화와 무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문화는 언제나 마지막 장신구로 논의되는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문화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국가를 책임지겠다고 나선 사람들은 민족문화의 계승과 문화의 창달을 단순히 선언적 문구로만 해석해서는 아니 된다. 문화에는 소모적 측면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문화가 결코 소모품에 그치지는 않고, 다른 창조적 생활이나 작업을 이끌어내는 창조의 원천이다. 국가는 문화에 관한 언급이 선언에 그치지 않음을 다시 분명히 선언하고 실천해야 한다.
조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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