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周易』과 중국 고대 교육2
바른 일을 해도 곤란이 있을 것이다.”, “변동 개혁하는 것을 항(恒)으로 한다. 흉하다.” 등이다. 따라서 “군자는 독립함으로써 방향을 바꾸지 않고”, 확고부동한 행동 원칙을 수립해야 한다. 《곤(困)》괘 단사 중의 “위험의 상황에 있어서도 기쁨으로 여긴다(險以說).”은 곧 군자가 곤경을 만났을 때 마땅히 유지해야 하는 태도의 문제를 지적하였다. 『주역』에서 볼 때, 자강한 사람은 간난과 어려움을 대면할 때 마땅히 일종의 부드럽고 기뻐하는 태도를 가지고 용감하게 어려움에 대면해야지, 수심에 찬 얼굴과 의기소침한 모양은 아니다. 그리고 자기의 목표를 실현하기 위하여 심지어 “생명을 걸고 의지를 관철”시켜야 한다. 이것은 『논어』 중에서 말하는 “삼군에게 장수를 빼앗을 수 있으나, 필부에게 뜻을 빼앗는 것이 불가능하다(三军可夺帅也,匹夫不可夺志也).”와 방법은 다르나 같은 효과를 내는 기발함이 있다.
두 번째, 두터운 덕으로 만물을 싣는다(厚德載物). 『주역』에서 볼 때, 대자연의 운행은 사람들에게 그 완강한 생명력을 분명하게 나타내는 것만은 아니다. 어떤 때는 또한 박대하고도 신중한 풍격을 드러낼 수 있고, 일종의 박대하고도 넓고 두터운 기개를 드러낼 수 있다. 그럼으로 사람들은 다만 천도(天道)의 자강불식의 정신만 본받을 것이 아니라, 또한 마땅히 지도(地道)의 박대하고도 넓고 두터운 것、덕이 깊고 식견이 넓은 것、두터운 덕으로 만물을 가득히 하는 정신을 본받아야 하면, 마치 대지가 만물을 싣고 견디는 것과 같이 인류 역사의 중임을 담당해야만 한다. 따라서 《곤(坤)․상》은 “지세는 곤이다. 군자는 두터운 덕으로써 만물을 싣는다.”라고 말한다. 군자로서 사람을 대하고 만물을 접할 때, 일종의 박대하고、관용하고、관유(寬柔)한 태도와 정신을 갖추어야 한다. 《함(咸)․상》중의 “군자는 자신을 비움으로써 남의 말을 받아들인다.”, 《건》괘 중의 “군자는 배워서 이것을 모으고, 관대한 도량으로 이것을 있게 한다.”라고 말한 것 또한 이 도리이다. 군자는 관용의 태도로 능히 다른 관점을 대처하고, 같은 것 중에서 능히 다른 것을 추구한다면 능히 자신의 완전하고 독립적인 인격을 유지하는 것과 동시에, 다른 사람과 함께 진보할 수 있다. 그렇다면 두터운 덕은 응당 어떻게 쌓아야 하는가? 『주역』은 두터운 덕의 양성은 하나의 티끌모아 태산의 과정이라고 여긴다. 《승(升)․상》에는 “군자는 덕성에 좇아서 작은 것을 쌓아서 고대(高大)하게 한다.”고 말한다. 즉 마땅히 작은 일을 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다만 미세한 진보를 쌓는다면 비로소 고대하고 아주 훌륭한 인격을 만들 수 있고, 아울러 이런 아주 훌륭한 풍격으로 민심을 순화하고 세속을 정화할 수 있다. 게다가 진종일의 환상을 하루아침에 능히 커다란 공명을 성취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계사전》중의 “나날이 활동 변화하여 잠시도 끊임이 없는 것을 성덕(盛德)이라고 말한다.”, 《건》괘 중의 “군자는 하루 종일 노력하고, 저녁이 되어서는 허물이 있지 않은지 두려워한다. 위태로운 지위에 있으나 화를 면할 수 있다.”, “군자가 덕을 기르고 학문을 닦는 것은 때를 기다리고자 함이다.” 등은 또한 덕을 쌓는 중요한 절차이다. “때를 기다리고자 함이다(欲及時)”는, 즉 “아침저녁으로 게으름을 피우지 않는다.”는 뜻이다. 군자에 대해서 말하자면, 마땅히 언제나 자기를 독촉하고, 경계의 마음을 지니며, 종일 게으름을 피우지 않는다면 설령 저녁에 이르러 또한 경계를 유지하고자 해도 어느 정도 해이할 수가 없다. 동시에 또한 자신으로 하여 매일 항상 어느 정도 얻고, 어느 정도 진보가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해야만 부단히 인품과 덕성을 수양할 수 있다. 그리고 군자의 자아반성도 덕을 향상시키는 하나의 중요한 절차이다. 《건괘․대상》에는 “건(蹇), 군자는 자신을 반성함으로써 덕을 닦는다.”고 말한다. 사람은 일시 극복할 방법이 없는 간난과 어려움에 부닥칠 때,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자아수양을 더하는 것으로 적극적으로 자신을 반성하는 것이다.
세 번째, 겸허하고 근신하는 것이다. 겸허는 중화민족의 전통미덕이다. 『역경』의《겸(謙)》괘는 겸손하고 공손함의 덕을 전문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겸손하고 공손함、겸허함은 군자가 마땅히 자각하고 수양해야할 미덕이라고 여긴다. 소위 “겸(謙)은 통한다. 군자는 끝이 있다.” 즉 겸양은 좋은 결과가 있을 수 있다. 이 품격을 갖춘 사람은 그로 하여금 대단한 곤란을 극복할 수 있게 할 뿐만 아니라, 또한 능히 그로 하여금 위신을 세우도록 한다. 소위 “겸손하고 겸손한 군자가 큰 내를 건너다.”、“노력하고 겸손한 군자는 만민이 믿고 따른다.”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이 도리이다. 『주역』은 또한 겸허는 마땅히 군자가 최종적으로 추구해야하는 목표라는 것을 지적한다. “겸은 존귀하면 더욱 빛나고 …… 군자는 겸손의 덕을 끝까지 변치 않는다”. 군자가 겸손의 인품과 덕행을 성실하고 진지하게 봉행한다면 곧 더욱 빛나고 성대하게 할 수 있다. 이것은 겸허한 성품이 천도、지도、신도(神道)에 부합한 것이기 때문이다. “천도는 가득한 것을 줄여서 겸을 더하고, 지도는 가득한 것을 변하게 하여 겸에 흘러 보내며, 귀신은 가득한 것을 해쳐서 겸에 복을 내린다.” 천、지、귀신조차도 이와 같음으로, 그럼으로 군자도 “가득한 것을 싫어하고 겸을 좋아하여” 겸허를 최종적인 귀착점으로 여긴다. 《건》괘 중의 “항룡(亢龍: ‘항’은 지나치게 올라가서 내려올 수 없다는 뜻으로, 하늘 끝까지 올라간 용이 내려가려 해도 내려갈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은 후회가 있다.”는 것도 역시 지나치게 가득한 것은 합당한 역할을 다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질투하여 미워하는 것을 초래하여 탐욕을 후회하게 한다고 말한다. 『상서․대우모(大禹謨)』에는 “오직 너만 다투지 않는다면 천하는 능히 너와 재능을 다투는 것이 없고, 오직 너만 치지 않는다면 천하는 능히 너와 공로를 다투는 것이 없다.”、“가득한 것은 손해를 당하고, 겸손한 것은 이익을 받는다.”고 말한다. 『한시외전』 중에는 곧 주공이 겸도(謙道)로써 백금(伯禽)에게 훈계한 말을 기재하는데, “『역』 중에는 하나의 도가 있는데, 크게 만족하는 것(大足)으로써 천하를 지키고, 보통 만족하는 것(中足)으로써 그 국가를 지키고, 작게 만족하는 것(小足)으로써 그 스스로를 지킨다. 겸손을 말하는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겸허는 다만 일종의 미덕일 뿐만 아니라 또한 일종의 커다란 지혜인 것을 알 수 있다. 큰 것은 국가를 지키고 천하를 지키게 하며, 작은 것은 자신으로 하여금 재앙과 손해를 받는 것을 면하도록 하니, 이익이 크다. 군자의 삼가는 성품에 관해서는 『주역』 중에 여러 번 언급되어 있다. 예를 들어 《繫辭傳》상에서는 “군자는 말을 신중하고 주밀하게 하고, 절제하여 함부로 입 밖에 내지 않는다.”고 말한다. 또한 다시 말하면, 비밀을 엄수하고 신중하게 난잡하지 않게 말하는 것은 군자의 특징이다. 이런 신중함은 언어적 측면의 주의 깊고 세심함인 ― “어찌 말하는 것이 신중하지 않겠는가(盖言谨也)”가 있고, 또한 행위적 측면의 주의 깊고 세심한인 ― “평소 행위의 삼가함”이 있다. 역시 사물을 분별하는 측면에 있어 주의 깊고 세심함 ― “군자는 신중하게 사물을 구별함으로써 나누는 것이 있도록 하는 것”이 있고, 심지어 사람들에게 형법을 실시할 때에는 세 번 생각해본 후에 실시 ― “군자는 명확하고 신중함으로써 형벌을 이용”해야 한다. 오직 이런 성품을 갖춘 사람만이 비로소 실패를 당하지 않을 수 있다. 즉 『주역』 중에서 말하는 “공경하고 삼가면 패하지 않는다.”、“삼가면 해치지 않는다.”이다.
네 번째, 성실하고 신의를 지키는 것이다. 성실하고 신의를 지키는 것은 사회에서 처세의 근본이다. 성실이란 즉 사람들이 사물의 본래 모습에 충실하고, 자기의 진실한 사상을 숨기지 않고, 거짓말을 하지 않고, 거짓된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을 요구한다. 신의를 지키는 것은 바로 신용을 중시하고, 위신을 중시하며, 승낙을 충실히 준수하는 것이다. 이것은 중화민족 전통 미덕의 중요한 구성 부분이다. 『주역․중부(中孚)』에는 “중부(中孚: 마음속에 진실이 있어서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하면 돼지와 물고기 같은 검소한 제물을 사용해도 길하다. 큰 천(艱難險阻)을 건널 수 있다. 바른 도를 계속해서 굳게 지키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주역정의(周易正義)』에 의하면, “신(信)이 가운데에서 발하는 것을 중부(中孚)라고 말한다.”, “물고기란 벌레가 세상을 피하여 깊이 숨는 것이고, 돼지란 짐승들이 미천한 것이다. 임금이 안으로 성실과 신의가 있으면 곧 비록 미천하고 숨은 무리일지라도 마음으로 모두 이를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마음 속에서 성실과 신의를 일으킨다면, 설사 어린 돼지와 어린 물고기 같은 사소한 것을 이용해서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도 또한 좋은 결과가 나타날 수 있으며, 따라서 멀고 험난한 길을 건널 수 있으니 이로움이 있으며 재앙이 없다는 것을 알아보는 것이 어렵지 않다. 우리는 제사가 고대에 있어 국가의 대사 가운데 하나라고 간주되어졌고, 제사의 때에 풍부한 제사용품을 가지고 신령에게 제공해야 했으며, 신령의 환심을 얻음으로써 신령에게 사람들이 인력에 의지하여 달성하기 어려운 희망을 실현하는 것을 도와줄 것을 요구하였다는 것을 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제사용품은 소、양、돼지(豕) 3종의 희생으로, 즉 고대에 말했던 태뢰(太牢)의 예이다. 그러나 『주역』은 오히려 마음에 성의와 신의만 있다면 설령 돼지새끼(豚)、물고기 부류의 사소한 것을 이용하여도 마찬가지로 신령을 감동시킬 수 있다고 여긴다. 따라서 군자는 마땅히 성실하고 신의를 지키는 성품을 갖추어야 한다.
이외에, 『주역』은 또한 절검(節儉)의 풍조를 대단히 강조한다. 《절(節)․육삼(六三)》은 “절도를 지키지 않아서 한탄한다. 화를 면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절검을 모르는 사람은 바로 곤궁하고 가난하게 되며、탄식하는 비극의 결말을 초래할 수 있다. 그리고 절검을 고통스럽다고 여기는 사람들에 대해서 큰일을 이루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아울러 재난을 초래할 가능성이 대단히 많다. 따라서 《절》괘의 사(辭)에서는 “고절(苦節: 도를 지나쳐서 괴로워하면서까지 행하는 절제)을 고수하여 상도(常道)로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절․상육(上六)》에는 “고절은 고수하면 괴롭다.”고 말한다. 군자로서 또한 마땅히 항상 우환의식을 가진다. 《전(傳)》에서는 “군자는 편안하지만 위태함을 잊지 않고, 존재하지만 망하는 것을 잊지 않고, 다스려지지만 혼란함을 잊지 않으니, 이것으로써 몸이 편안하고 국가는 보존될 수 있다.”고 말한다. 오직 거안사위(居安思危)의 우환의식을 갖추어야 만이 비로소 안신입명(安身立命)하여 천하를 보존할 수 있다. 이러한 우환의식은 군자의 “일종의 사회 책임감、역사 책임감이고, 일종의 잠재 위기에 대한 간파와 예방이다. 즉 『주역』이 말했던 바의 ‘비가 오기 전(前)에 둥지의 문을 닫아 얽어맨다(未雨绸缪: 비가 오기 전(前)에 올빼미가 둥지의 문을 닫아 얽어맨다. 즉 화가 닥치기 전에 대비한다는 뜻)’, ‘위험을 보고 능히 그치니, 아는 것이다.’, ‘재난을 생각하여 그것을 예방한다.’”라는 것이다. 《둔(屯)》괘는 여전히 군자는 마땅히 일의 기미를 알아채는(知幾) 정신을 갖추어야 한다고 여긴다. “사슴을 쫓는데 몰이꾼(虞: 산림을 관리하는 사람으로, 군주가 사냥할 때 길을 안내하거나 몰이꾼 노릇을 한다)이 없다. 단지 숲 속을 헤맬 뿐이다. 군자는 조짐을 보아 그만두는 것 같지 않다. 가며는 후회한다”. ‘즉록(卽鹿)’은 이에 축록(逐鹿)의 뜻이고, ‘우(虞)’는 길을 안내하는 사람이다. 길 안내자가 없는 정황 하에서 사슴을 쫓아간다면 밀림의 속으로 들어가는데, 이때 군자는 마땅히 시기를 알고 움직이고, 제 때에 즉시 결단을 내려서 마땅히 버려야할 것은 버려야 한다. 만약에 시기를 알지 못하고 여전히 견지하면서 쫓아간다면, 곧 밀림의 속에서 난처해질 수 있고, 반듯이 재난이 있다. 이것은 《계사전 하》중에서 제창했던 바의 “역(易)은 다하면 곧 변하고, 변하면 곧 통하고, 통하면 곧 오랫동안 계속된다.”의 “통하고 변하는(通變)” 정신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 혁명은 증산상제님의 갑옷을 입고 행하는 성사재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