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8일은 프랑스의 소설가 로맹 가리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외교관이자 소설가로 권위있는 문학상인 공쿠르상을 수상한 유명 작가, 영화 <네 멋대로 해라>로 시대의 아이콘이 된 배우 진 세버그와 결혼한 사교계 명사, 자살로 마감한 드라마틱한 삶, 그리고 에밀 아자르라는 가명으로 한 작가에게 일생에 단 한 번만 수여하는 공쿠르 상을 두 번이나 받은 스캔들의 주인공.
하지만 솔직히 말해보자. 로맹 가리의 소설을 읽어본 적이 있는가?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말고, 단편 소설인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말고, 로맹 가리의 장편 소설들을 말이다.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 뒤에 숨은 로맹 가리만 읽었다면 이 기회에 로맹 가리와 얼굴을 마주해 보길 권한다. 탄생 100주년이라는 건 어쨌든 단 한 번뿐인 기회이니 말이다.
마음산책에서는 국내에 출간되지 않은 로맹 가리의 작품들을 순차적으로 번역, 출간하고 있는데, 지금까지 에밀 아자르의 이름으로 『가면의 생』과 『솔로몬 왕의 고뇌』, 로맹 가리의 이름으로 『흰 개』, 『레이디 L』, 『여자의 빛』, 『이 경계를 지나면 당신의 승차권은 유효하지 않다』를 선보이고 있다.
19세기 유럽을 무대로 펼쳐지는 역사 로맨스 소설 『레이디 L』, 1960년대 흑인과 백인, 개인과 집단, 남성과 여성,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등 사회갈등을 겪던 격동의 미국에 관한 생생한 보고서 『흰 개』, 매력적인 사십 내 남녀의 짧은 사랑을 그린 『여자의 빛』등 사색과 사변, 그리고 대담함과 날카로운 블랙 유머가 공존하는 로맹 가리의 진면목을 만날 수 있는 작품들이다.
『이 경계를 지나면 당신의 승차권은 유효하지 않다』는 지하철 경고문에서 제목을 따온 소설이다. 소설 속 주인공은 예순을 앞둔 자크 레니에. 서른 다섯 살 연하의 연인이 있는, 훈장도 받고 사업도 잘 나가던 레니에는 어느 날 문득 ‘성 불능’에 대한 두려움에 빠지면서 늙어버린 육체와 아직 너무나 젊은 마음 사이에서 느끼는 절망을 고백한다. 이 소설은 로맹 가리가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으로 2미터짜리 비단뱀을 기르는 독신남 이야기 『그로칼랭』을 발표해 큰 성공을 거둔 직후에 로맹 가리의 이름으로 발표된 작품이다.
책이 출간 되자 많은 이들이 소설 속 성 불구자인 자크 레니에를 로맹 가리와 동일시 하며 수근거렸는데, 로맹 가리는 이런 세간의 루머들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곧이어 에밀 아자르의 이름으로 『자기 앞의 생』을 출간한다. 60세를 앞둔 노년의 남자와 14살 소년이라는 화자의 변화만큼이나 다루고 있는 주제, 문체, 그리고 스타일이 다르기에 이 두 작품의 작가가 동일인이라고는 쉽게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로맹 가리의 탄생 100주년을 맞았지만, 우리는 아직 그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지 못한다. 자료가 부족해서라기 보다는 그가 남긴 것들이 한 사람의 행적이라 하기엔 너무 다채롭고 또 모순적이기 때문이다. 그가 남긴 소설들을 읽으면 읽을수록 궁금증은 더해간다. 로맹 가리, 당신은 정말 누구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