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호 정립 형제에 의하여 1변의 보천교는 패망하게 되엇고 태모님은 골병이 들어 오성산으로 쫒겨 들어갔으며 젊은 총사수 운산 태사부님은 해방후에 아예 거덜나게 됩니다. 이상호 정립형제는 대순전경의 기초를 남기는 공덕이 있으나 그의 신앙을 빙자한 정치적 행보 와 이상한 야욕은 역사의 판단을 받을것입니다. 뒤에 이정립의 정신을 받은 홍성열은 대법사에 모신 태모님 어진을 발로 짓밟는 행위를 하여 오성산 신도들의 많은 공분을 사기도 합니다. 평생을 신앙보다는 정치야욕에 몰두한 상호형제는 결과적으로 남는게 없다고 합니다.
여기서 내 이 상호 이 정립 형제에 대해 조금 얘기할 테니 들어봐라.
내 입이 험해져서 그들의 불의함을 다 얘기 못 한다만, 한 마디로 내가 악수를 잘못한 것이다. 태모님이 신해辛亥(도기 41년, 1911)년에 상제님으로부터 신통神通을 하셨다. 태모님이 9월 19일 성탄치성을 모시고 쓰러지셨다가 일어나시며 하신 말씀이 있다.
-수부님께서 일어나 앉으시어 갑자기 상제님의 음성으로 경석에게 “누구냐?” 하고 물으시니 경석이 놀라며 “경석입니다.” 하거늘 또 “무슨 생이냐?” 하고 물으시니 경석이 “경진생(庚辰生)입니다.” 하고 대답하니라. 이에 말씀하시기를 “나도 경진생이라. 속담에 동갑 장사 이(利) 남는다 하나니 우리 두 사람이 동갑 장사 하자.” 하시고 다시 생일을 물으시니 경석이 “유월 초하루입니다.” 하고 대답하거늘 말씀하시기를 “내 생일은 삼월 스무엿새라. 나는 낙종(落種) 물을 맡으리니 그대는 이종(移種) 물을 맡으라. 추수(秋收)할 사람은 다시 있느니라.” 하시니라
태모님이 도통하시고 나서 제 1변 보천교가 개창되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신도가 불 일듯 했는데, 주로 전라남북도와 충청도가 중심이 됐다. 헌데 그때는 아무 것도 없을 때다. 그래 태모님이 차 경석 성도 집에 포정소를 여셨다. 허나 그건 개인 살림집이다.
남의 집에 찾아가면 집 주인 허가 없이는 내정에 못 들어가잖는가. 신도들이 태모님을 뵈려고 찾아오면, 내정에 계신 태모님은 뵙지도 못하고, 사랑방에서 차 경석 성도만 만나고 돌아간다. 차 경석 성도의 허가가 있어야 겨우 태모님을 뵐 수 있었다.
처음엔 그래도 뵙게 하더니, 점차 차 경석 성도 혼자서 신도들을 독대獨對하고 보내버린다. 사실 그들은 다 태모님 신도들인데, 정작 태모님은 어떤 신도가 왔다 가는지도 모르신다. 영적으로는 알런지 모르지만, 인간적으로는 코빼기도 못보시는 것이다.
꼭 만나야 쓸 사람이면 주렴을 치고 그 주렴 밖에서 만나게 했다. 참 거기서 수많은 신도들이 일어났건만, 차 경석 성도에게 신도들을 다 뺏겨서 상대도 할 수 없게 되었으니, 거기에 백 년을 있으면 뭘 하나. 해서 태모님이 옮겨가신 데가 김제 조종골이다. 가시면서 “내가 너희들 성姓 하나 보고 간다.”고 하셨다. 상제님이 강 씨니까 조종골 강 씨들을 쫓아가신다고 말이다.
그런데, 조종골로 들어가신 후 태모님이 옥살이를 하신 사실이 있다. 그게 어떻게 된 사건이냐? 이상호 이정립 형제는 원래 해남사람이다. 이상호가 보천교에 뛰어들었는데,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보천교 간부들이 목포경찰서에 잡혀 들어갔다. 헌데 사건 수습이 잘 안 되자, 이상호가 “교주 고 판례가 교단을 선포했다.”고 하며 태모님한테 잘못을 다 떠넘겨 버렸다.
태모님 얼굴도 못 보고 하는 소리다. 하니까 “그러면 고 판례를 잡아와라.” 해서 일경이 태모님을 체포하려고 조종골까지 쫓아왔다. 신도들이 잠깐 피하시라고 권유했지만 태모님은 “내게 당한 일을 피하면 되겠느냐? 이번에는 내가 순하게 받아야 뒷일이 없을 것이다.” 하시면서 순순히 따르신다. 허나 캐봤자 별게 없잖은가. 무슨 역적모의한 사실도 없고, 그저 태을주 읽어서 병 고친다 그렇게 해서 30여 일 만에 풀려나셨는데, 이 상호 때문에 태모님이 그렇게 옥고를 치르신 것이다.
그러고서 이 상호는 갑자甲子년(1924)에 보천교에 맞서서 보천교 혁신운동을 벌였다. 저희 선생인 차 경석에게 불만을 품고 보천교를 전복시키려고, 서울에서 깡패들을 데리고 내려와 일으킨 아주 유명한 사건이다. 그때 보천교 조직이 어떻게 됐냐 하면, 대표기구로서 서울에 참 진眞 자, 바를 정正 자, 집원院 자, 진정원을 설치했다. 당시 서울 진정원장이 이 상호다.
그때만 해도 재정 문제 같은 것이 허술하게 돼 있어서, 이 상호가 서울 진정원 건물이며 대지를 다 제 명의로 돌려놓았다. 그러고는 보천교 혁신운동에 실패하자, 이상호가 그걸 다 팔고서, 그 돈 가지고 이 정립하고 만주로 도망쳐 버렸다. 이상호가 본래 호색가다. 만주로 도망치면서 고등학고 여학생을 더불고 갔다.
거기 가서 1년인가 농사를 짓는데, 그래봤자 무슨 소용 있나? 다시 조선으로 나와 김 형렬 성도 밑으로 들어가서, 김 형렬 성도로부터 상제님 모시고 행한 천지공사 내용 등 여러 가지 이야기도 듣고, 다름 사람을 이용하여 빼낸 자료를 모아 가지고 ‘증산천사 공사기’라는 책을 펴냈다. 후에 그 책을 근간으로 재료 좀 더 보태고, 자신에게 유리하게 조작하여 ‘대순전경’을 만든 것이다. 그러고는 용화동에 판을 차리고 동화교東華敎라는 이름을 내걸었다.
헌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태모님을 모셔다놔야 일이 되게 생겼다. 태모님이 상제님 도장의 원 뿌리이니, 이용가치가 있겠단 말이다. 그래서 조종골에 계신 태모님께 사람을 보내고, 이 상호도 가고 이 정립도 가서 자꾸 청을 했다.
고 민환 성도가 태모님 수제자 축에 드는 사람인데, 그 성도까지 “용화동 교인들이 저토록 애원하니 해원도 해주실 겸 용화동으로 잠시 거처를 옮기시어 뒷일을 결정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감히 어디라고 해 붙이기야 하겠습니까?” 하면서 자꾸 권하는 바람에, 태모님이 허락하시고 용화동으로 들어가셨다.
헌데 막상 용화동에 들어가 보니, 심한 얘기로 그들이 잡아먹으려고 한다. 해서 거기 있다가는 죽게 생겼다. 도저히 못 배긴다. 워낙 심하게 대하니까, 고 민환 성도가 태모님은 내던져주고, 밤중에 몰래 단신으로 도망쳐 버렸다. 얼마나 위협을 느꼈으면 그랬겠는가.
태모님은 순 독재로, 이 상호를 대하실 때도 이름도 부르지 않고 “도둑놈! 도적놈!” 이라 하시고, 성도들 앞에서도 “상호야! 너, 이놈! 이 못된 놈!” 하면서 애들 다루듯 하신다. 그러니 이상호가 생각할 때 위신 문제도 있고, 참 편칠 않단 말이다. 태모님은 본래 그런 양반이시다. 누구에게도 그랬다. 태모님을 모시는 전 대윤이라는 여자가 있었다.
태모님보다 나이도 많이 먹은 사람인데, 태모님이 막 반말을 하면서 “이년, 저년” 하고 구박을 하시니까, 이 상호 마누라가 전 대윤의 아들에게 쫓아가서 “고 판례가 당신 어머니를 그렇게 하대하고 혹사시키고 있다. 왜 어머니를 거기다 두고 그 고생을 시키느냐? 어서 데려가거라.” 하고 고자질을 했다.
전 대윤은 아들이 데려간 후 조금 살다 죽어버렸다. 태모님이 그 여자의 운명을 미리 아시고, 그 명을 이어주느라고 잠시 그렇게 대하신 것이다. 그렇게 해야 명이 이어지기 때문에 말이다. 헌데 일반 사람들이 그걸 알 턱이 있나.
태모님이 이상호 형제에게 용화동에서 당하신 고통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다. “네가 금구로 가면 네 몸이 부서진다.”(6:34:8), “내가 없으면 그 크나큰 세 살림을 어찌 홀로 맡아서 처리하리요.”(10:6:10)라고 하신 상제님 말씀이 다 그 말씀이다. ‘대순전경’에는 그걸 다 고쳐 써버렸지만.
태모님이 이 상호한테 그렇게 두 번을 당하셨다. 목포사건 때에 이 상호 때문에 철창신세를 졌고, 또 용화동에서 그들에게 말할 수 없는 핍박을 받아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어 나오셨고. 그러고 오성산에 오셔서 불과 한 50밖에 안된 태모님이, 도집이라고 해서 몇 칸 되지도 않는 집을 기어다니며 사시다 돌아가셨다.
이 상호 때문에 그렇게 생죽음을 당하신 것이다.
내가 이 상호한테 당해보니까, 그 진상을 알 것 같다. 그 형제들에게 당한 것을 말로 표현하려면, 내 입만 더러워지고 얼굴 간지럽고 해서 그쯤 해두고 마는데, 사실이 그랬다. 너무너무 불의무도不義無道한 자들이다. 그걸 묶어서 얘기하자면 “욕설상심막설의欲說傷心莫說宜”다. 즉, 말을 하고자 하나 마음이 상하므로 말을 않는 게 낫다는 말이다
※ 혁명은 증산상제님의 갑옷을 입고 행하는 성사재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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