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호 시대일보사(時代日報社) 사건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
동년 6월에 이상호가 경성으로부터 와서 말하되, 시대일보사(時代日報社)가 현재(現今) 자금이 부족하야 폐업의 지경에 빠졌으니 교중에서 금 2만원을 출자하야 이를 속간하면 피아간에 좋은 방침이 있다 이르므로
교중에서는 사회사업 기관의 실패됨을 애석(愛惜)하야 차후 계속할 사람이 있기까지 원조 부지(扶持)하도록 하리라는 공공심(公共心)으로 우(右) 금액을 출자하였더니
이 상호는 그 동생 성영(成英)을 편집국장으로 총독부에 문서로 보고(屆出)하야 허가를 얻은 바 이 상호(李祥昊), 이 종익(李鍾翊), 이 성영(李成英), 임 경호(林敬鎬)가 각자 당군(黨群)을 지어 누구는 사장(社長) 누구는 중임(重任)을 탐하야 신문사 기관의 전권을 점거코저 서로 간 쟁투함으로 실패에 이르다. 이 때에 마루야마(丸山) 국장은 내각 개조관계로 사직귀국하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
*동년 8월에 이르러 교중(敎中)에서는 상호(祥昊) 등의 야심을 탐지하고 중벌(重罰)의 과(科)에 붙였다. 상호(祥昊)는 본시 사회에서 내쫓긴 자(社會出脚者)로 교(敎)를 위하는 공공심(公共心)은 없고 자기를 살찌우려는 마음(肥己心)이 많은 사람이라.
경성 양해시(諒解時)에도 교주에 대한 체포령(逮捕令)과 각 방주(方主)의 체포장(逮捕狀)은 취소하도록 주선한 것이 없고 자신만 활동하기 편의(便宜)하도록 주선하였으며, 김 홍규 등 체포 수금(囚擒) 사건에도 하등의 주선력이 없이 한도 밖에 방치하였고,
교중 공금 4 만여 원 압수 사건에도 하등의 주선력이 없다가 필경 국고로 편입이 되었고, 또 경성(京城) 가회동(嘉會洞)과 창신동(昌信洞) 진정원(眞正院) 가옥 및 대지(垈地)를 저의 단독명의로 증명권(證明權)을 총독부에 제출 등록(屆出)하야 소유를 만들었으며, 또 망령되게 교주 법통 계승(繼統)을 몽상하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
*전후소행이 모두 자신의 이익만 도모하다가 이 기회(此際)를 틈타 경쟁(逐)해 반역자로 화하야 보천교 혁신인이라 자칭하고 교주를 성토하며 방주(方主)를 능욕하고 사회단체와 악수하야 교주 성토문과 및 혁신 이유의 선언서를 인쇄하야 전 조선(全鮮) 교도에게 발송 선포하야 인심을 난동(亂動)하고 사람으로 감히 행하지 못하는 바를 감행함으로
교중에서는 이 상호(李祥昊) 토죄문(討罪文)을 전 조선(全鮮) 교도에게 발부하고 간부 수인이 상경하야 이 상호를 정중히 질책한 즉 저들(彼等)은 유도 숙련인과 역사(力士)를 모집하였다가 간부 등을 난타하야 사경(死境)에 이르므로 인근 파출소에 급히 고발하니 경관이 웃어 가로대 종교가(宗敎家)에 투쟁함은 고래(古來)로부터 그러한 일이 많이 있다 하고 냉정히 물리쳤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
*진정원(眞正院)의 건물 대지(垈地) 및 비품 등 수 만원의 재산은 보천교(普天敎) 소유임에도 불구하고 무관계한 혁신파가 점거함으로 이를 돌려받기(取戾) 위하여 경성 지방법원 검사국에 형사고소를 제기하였더니
검사국에서는 죄상을 취조(取調)도 아니하고 마침내 기소중지의 처분을 하였다. 그 후에 이 상호(李祥昊)는 교중에서 횡령한 금전을 다 소비하고 지나(支那)지방으로 망명하다.
동시에 이 성영(李成英)은 보광사(普光社) 인쇄기 및 활자를 매각하야 지나(支那)로 동행해 가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
*동시에 간주(艮主) 이 종정(李鍾鼎)과 경성 진정원장 이 종익(李鍾翊)이 혁신에 동모(同謀)하였기로 이를 함께 면임(免任)하고 출교(黜敎)하다.
이 달호(李達濠)로 경성 진정원장에 임명하시다.
간방 포감(胞監) 한 효식(韓孝植)으로 간주(艮主) 계통(繼統)에 임명하시다.
이때에 임 경호(林敬鎬)는 이상호 혁신 반란을 먼저 통지해 주었으므로 해주(亥主) 겸 총령원장(總領院長)에 임명하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