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이상호 형제의 차경석 교주 외유를 빙자한 교단 실권 탈취계획
<증산교사(甑山敎史)>
*경석은 또 이듬 신유년(道紀 51, 1921)에 큰 전염병이 유행하리라고 예언하고 김장을 명년 가을까지 먹을 수 있도록 많이 준비할 것과 명년 봄, 여름 채소를 절대 먹지 말 것과 그 전염병의 요약(要約)인 목과(木果)를 많이 사서 저장할 것을 명령하였으므로 각처에서 목과 값이 크게 올라 한 개에 수십 원이 되었으나 이듬해에 그 예언이 맞지 않고 각처에 저장하여 두었던 목과는 쓸데없이 버리게 되었으므로 비난이 크게 일어나고 교단을 탈퇴하는 신도가 많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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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에 북방주 김 영두(金英斗)는 신유년(道紀 51, 1921) 4월에 북도 재무 김 홍규(金洪奎)가 평양에서 체포된 틈을 타서(임시정부 독립운동 자금 10만원 압수사건 당시 「동아일보」 보도: 당시 경부선 건설비가 20만원) 교금 11만 6천원을 도적하여 서울로 올라가서 태을교(太乙敎)라는 간판을 걸고 경석과 60방주가 독립운동을 음모한다고 일본경찰에 고발하였다. 대저 영두는 신 현철(申鉉喆)의 계책을 들어서 경석과 60방주를 모조리 일본경찰에 체포케 한 뒤에 신도들을 수습하여 통교권(統敎權)을 탈취하려는 계획이다.(김 홍규, 채 선묵 두 사람은 거년(去年) 겨울 평양에서, 이 상호는 8월에 경기도 일본경찰부에 체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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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경석의 외유계획)신유년(道紀 51, 1921) 섣달에 정 학주 사건으로 이 성영(成英)이 임실에 가서 경석을 상월리로 불러 고덕리로 옮기게 하고 경석에게 고하여 가로대 『우리가 이제 수백만의 신도를 집결하여 이 세력을 배경으로 하여 국외로 나가시면 만주와 노령에 흩어져 있는 수백만 교포들을 뭉쳐서 단일세력을 이룰 수 있으리니 안팎아 의각(猗角)의 세(勢)를 이루어 위기를 해소케 할 뿐 아니라 국제적으로 활동할 무대를 만들 수 있으리이다』
<증산교사(甑山敎史)>
*인하여 성영(成英)이 먼저 국외에 나가서 교포들의 상황을 조사하고 경석의 안신(安身)할 곳을 물색하여 온 뒤에 경석이 출발할 것과 국내에는 이 상호(李祥昊)를 부교주로 임명하여 교단을 통솔케 할 것을 의논하고 또 이 계획은 어떠한 고급간부에게라도 누설하지 말것을 약속하고 성영(成英)은 이듬 임술년(道紀 52, 1922) 이른 봄에 발정(發程)하기로 하였다.
<증산교사(甑山敎史)>
*계해년(道紀 53, 1923) 정월 보름께까지 북경에 머물면서 상황을 조사하고 다시 봉천에 돌아와서 상황을 조사한 뒤에 3월 그믐께 귀국한 뒤에 안신처로 남경을 물색하였음을 보고하고 즉시 발정할것을 요청하니 경석은 각도 진정원(眞正院)을 신축하는 것을 이유로 하여 가을에 발정하기로 연타(延拖)하였다.
<증산교사(甑山敎史)>
*여름에 경석이 정리총장(正理總長) 노 좌대(盧左大)에게 외유계획을 말하고 가부를 물으니 좌대 가로대 『상호형제의 세력이 온 교단의 3할을 차지하였는데 만일 상호를 부교주로 임명하여 온 교단을 통솔하게 하고 선생은 성영을 데리고 외유하시면 그 형제가 안팎에서 호응하여 전권용사하리니 선생의 지위가 위태할지라 반드시 부교주를 다른 사람으로 임명한 뒤에 외유함이 가하리이다』라고 역설하였다.
경석은 좌대의 말을 옳게 여겨 부교주의 적재(適材)를 널리 물색하나 얻지 못하므로 필경에는 외유계획을 포기해 버렸다.
◎보천교 기관지 보광의 폐간은 이 성영 스스로 증산교사에서 차교주에 불만한 자신이 했다고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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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축년(道紀 52, 1922)(계해(1923) 또는 을축(1925)인듯) 정월에 경석은 경성진정원의 특권을 해제하고 각도에 진정원(眞正院)과 각군에 정교부(正敎部)를 설치하기로 하였었다.
이에 진정원장 이 상호는 사임하고 이 종익(李鍾翊)을 경성 진정원장에 임명하였다. 5월에 경성 진정원(眞正院)에 보광사(普光社)를 설치하고 이 성영(李成英)을 사장으로 임명하여 인쇄소를 설치하고 기관잡지 보광(普光)을 발행할 새 박 영호(朴英浩)를 주필로 임명하였다.
보광은 제 4호까지 발행하였으나 경석의 간섭이 너무 심하므로 성영이 크게 불만하여 마침내 폐간하여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