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월(七月) 회일경(晦日傾:그믐경)에 동곡리(銅谷里)를 가서 김 형렬(金亨烈)과 같이 금산사(金山寺)에 구경가기를 청(請)하였다.
갈때의 생각(生覺)에난 금산사(金山寺)를 가서보고 종용(從容)한 방이 있으면 공부(工夫)를 하여 보리라 하였더니 마참 조용(從容)한 방(房)이 잇끼로
김 형렬(金亨烈)에게 상의(相議)하니 형렬(亨烈)이 왈(曰) 불가(不可)하다. 증산(甑山)은 신(神)의게 끌이어 단이다가 신(神)한테 죽었으니 공연(空然)히 생각(生覺)지 말나고 금지(禁止)하난지라.
나는 수중(手中)에 금전(金錢)이 무(無)함으로 다시 하산(下山)하여 양도(糧道)를 변통(變通)하여 팔월(八月) 일일(一日)에 형렬(亨烈)을 다리고 금산사(金山寺)에 다시 들어갓따가 십사일(十四日)에 귀가(歸家)하야 주야(晝夜)로 사(思)하다가 구월(九月)에야 파혹(罷惑:의혹을 그만둠)하였다.
최초(최초)에난 교조(敎祖)의 사(死)하심을 사(死)하지 안한 것으로 의심(疑心)하였따가 지시(至是)히야 사(思)한즉 교조(敎祖)의 사(死)함이 무의(無疑)하니 내두사(來頭事)를 엇떠케 조처(措處)하여야 되겠따는 생각이 났음니다.
촌산 왈(村山曰)~ 증산(甑山) 교조(敎祖)께서 봉착(逢着:만난)하신 삼년(三年)만에 교통(敎統)을 전(傳)하시고 천화(天化)하셨따니 그 시(時)에 교통(敎統) 전(傳)하였음으로 교주(敎主)가 되였은즉 그시(其時) 제자 중(弟子中)에 수제자(首弟子)가 된 때문에 교통(敎統)을 전(傳)하였음니가. 또한 교통(敎統)을 전(傳)할만한 자격이 유(有)함으로 전(傳)하게 되었음니가.
교조(敎祖) 왈(曰) ~교조(敎祖)께서 나를 만나기 전(前)에난 농립(農笠)만 쓰고 단이시다가 나를 만난 후로부터는 나도 만날 사람을 만났으니 의관(衣冠)을 하겠다 하시고 의관(衣冠)을 하신 일도 이섯고
또 이 지방(地方)을 떠나실 때에 내가 대(代)로 바든 증거(證據)가 유(有)하니 기유년(己酉年:1909) 정월(正月) 초삼일(初三日) 고사치성(告祀致誠)을 올닐 때에 우양(牛羊) 제물(祭物)을 만히 준비(準備)하고 벽상(壁上)에 설위(設位)하고 배례(배례)를 가로치고 제법(祭法)을 가르치신 후(後)에 나로 하여금 대제(代祭)하라 하시고 차지(此地)를 이(離)하시다.
기후(其後) 천화시(天化時)에야 면회(面會)하였고 또 나는 친히 듯지 못하였지만는 타인(他人)이 듯고 전(傳)하는 말에 의(依)하면 동곡(銅谷)에서 화천(化天)하시기 전(前)에 중인(衆人)의게 말삼하시되
천지신명(天地神明) 공판(公判)에 내가 정읍(井邑) 차 경석(車京石)을 잘 정리(定)하야 실수(失手)가 업다. 사람 잘 알아 썻다고 하시드라 한다.
촌산 왈(村山曰)~ 그 시 벽상에 설위한 것은 신도(神道)에 일홈을 썻던가요, 기억(記憶)하겠음니가.
교주 왈(敎主曰)~~ 백노지 일매(一枚) 전폭(全幅)에 인형(人形)을 그리고 글을 썻는대 하서(何書)인지 알지 못하겠고 기하(其下)로는 이십사절후(二十四節候)를 쓰난데 나와 김 광찬(金光贊) 이인으로 하여금 체번(替番)하야 복서(複書)로 쓸 세 필(筆)를 땅에 놓치 말고 일인(一人)이 동지(冬至)를 쓰고 나면 또 일인(一人)이 동지(冬至)를 첩서(疊書)하라 하시난데
쓰다가보니 지면(紙面)에 하단(下端)이 부족(不足)할뜻 함으로 자양(字樣)이 차차(次次) 세소(細小)하야 최 말단(最末端)에난 세서(細書)로 마치게 되었다.
그 시(其時)에 교조(敎祖)게서 집뜬 목과(木果)나무 단장(短杖)이 유(有)한데 상대하세(上大下細)한지라. 그 단장(短杖)을 글씨썬데 노으니 대소장단(大小長短)이 일호(一毫)도 차이(差異)가 업시 꼭 같어섯다.
※ 혁명은 증산상제님의 갑옷을 입고 행하는 성사재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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