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경석 성도님과 무라야마 지준과의 문답록은 살펴볼 중요한 내용이 들어 있읍니다. 어천 하실때 상황이 상당히 초라하엿다는 것을 느낄수 있읍니다. 호연할머니의 전언은 신도를 보면서 전한것이지만 차경석 성도의 전언은 갹관적인 상황묘사라고 볼수 있읍니다. 4편으로 나누어 연재합니다.
차경석 성도 선화 전
조선총독부 촉탁 무라야마 지쥰(村山智順)과의 문답기
포교 26년(1934) 시월(10) 십일(10) 반경(半傾)에 조선 총독부 관방(官房) 문서과(文書課) 촉탁(囑託) 촌산지순(村山智順)이 래(來)하야 교주(敎主)와 상견인사 후(相見人事后)
촌산 왈(村山曰)~~ 선생님(先生任)의 신체(身体)가 금춘(今春)보담도 더 강건(康健)하여 보이니 대단(大端)히 반갑씀니다.
교주 왈(敎主曰)~~ 교서촌산공 신체(敎書村山公身体)가 금춘(今春)에 볼 때 보담 더 조와 보임니다.
촌산 왈(村山曰)~ 선생님(先生任) 신체(身体)가 건강(康健)하심이 본래(本來)부터 그러하십닛가.
교주 왈(敎主曰)~~ 본대에도 보통인(普通人)보담은 강건(康健)하였지마는 이십팔 세(二十八歲)에 교조(敎祖)를 만난 후로 사십 세 이후(四十歲以后)로부터 몸이 더 비대(肥大)하여지고 오십 세(五十歲)까지난 감기(感氣)도 알아본 적이 업고 병(病)으로는 약(藥) 한 첩도 먹은 일이 업썻는대 만근 사오년간(挽近四五年間)에난 감기(感氣)같은 것을 혹(或) 알씀니다.
촌산 왈(村山曰)~~ 그러면 수양력(修養力)으로 그러케 비대(肥大)하고 감기(感氣)도 알치안이하게 됨니까.
교주 왈(敎主曰)~~ 연소 시(年少時)에 복냉증(腹冷症)이 유(有)하야 배가 촉풍(觸風)만 되면 간간(間間) 복통(腹痛)이 유(有)하엿는대 삼십세 후(三十歲后)로부터는 약(藥)먹은 일도 업시 복통(腹痛)이 자연(自然) 업서졌으니 아미도 수양력(修養力)인듯 합니다.
촌산 왈(村山曰)~ 그러면 태을주(太乙呪)로써 수양(修養)을 하셨음니까.
교주 왈(敎主曰)~~ 나도 최초에난 태을주(太乙呪)를 부독(不讀)하였따가 계축년(癸丑年:1913)부터 비로소 타인(他人)도 교(敎)하며 나도 송독(誦讀)하였음니다.
촌산 왈(村山曰)~~여러 가지 이치(理致)를 수양력(修養力)으로 인(因)히여 각득(覺得)하셨읍닛가.
교주 왈(敎主曰)~~ 교조(敎祖)가 화천(化天)하신 후(後)로 천지(天地)가 붕퇴(崩頹)한 것가타여 망지소조(罔知所措)요 막지소향(莫知所向)이라, 의논(議論)할 곳도 업고 물어볼 곳도 업섰다.
교조(敎祖)는 어느 때까지든지 이 세상(世上)에 존재(存在)하실줄노 알앗떠니 떠나시게 된 것이 무슨 이치(理致)인가를 생각(生覺)하느라고 밤이면 유단하(柳壇下)에 가서 밤새는 것을 모르고 생각(生覺)하여 비룡산(飛龍山)에 등(登)하여 고지통곡(叩地痛哭)하다가 우연(偶然)히 한 생각(生覺)이 생(生)하여 교조(敎祖)가 이 세상에 계시지 안이할 이치(理致)를 각득(覺得)하고 그 후로는 의심(疑心)을 파(罷)하였다.
촌산 왈(村山曰)~~ 하년(何年:언제)에 교조(敎祖)를 봉착(逢着:만나고)하고 하년(何年)에 교조(敎祖)가 천화(天化)하였음니가.
교주 왈(敎主曰)~~ 정미년(丁未年:1907)에 교조(敎祖)를 처음 봉착(逢着)하고 기유년(己酉年:1909) 정월(正月) 초삼일(初三日) 야반(夜半)에 차지(此地:이곳 대흥리)를 떠나신 후(后)에는 전주군(全州郡) 우림면(雨林面) 동곡리(銅谷里) 김 형렬 씨가(金亨烈氏家)에 거(居)하였난대 유월이십사일(六月二十四日)에 천화(天化)하실세 천화(天化)하시기 전(前)에 오라는 통기(通寄)가 유(有)하심으로 가게 되었다.
※ 혁명은 증산상제님의 갑옷을 입고 행하는 성사재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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