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당 계열이 장악했던 남로당과 민전은 남한의 우익계열 및 미 군정청으로부터 상당한 견제를 받아왔다. 그들이 자행한 폭력과 테러는 많은 사상자를 불러왔고 급기야 제주 4•3사태로 이어지면서 죄 없는 무수한 양민들까지 죽어갔다.
강성적인 당파가 민심을 분열 시키고 더 이상 존속하기 힘들게 되자 온건세력이 나타나게 된다. 여운형의 조선인민당(인민당)은 해방 후에 결성된 최초의 본격적인 온건좌익정당이다. 물론 그 이전에 기독교 계열의 사회민주당과 원세훈이 발기한 고려민주당(고려사회민주당)이 사회주의정당을 표방하고 인민당 보다 조금 빨리 등장했으나 단명으로 끝났다.
▲ 대한민국 정당의 역사
여운형의 인민당은 원래 박헌영에게 떠밀려 급조한 정당이다.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이 미군정청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유명무실해지자 그 대응책으로 창설된 것이다. 더욱 특이한 상황은 인민당의 창당이 미군정청에서도 권했기 때문이다.
미군사령관 하지 중장이 여운형에게 ‘조선인민공화국’이라는 호칭에서 ‘공화국’이라는 단어를 빼고 정당이라는 단어를 넣으라고 요구해서 ‘조선인민당’이 된 것이다. 여운형은 이런 상황에서 일제 때 그가 조직한 건국동맹을 모태로 하고 고려국민동맹과 인민동지회, 일오회一五會 등 3개 군소정치단체를 흡수, 1945년 11월 12일 서울 종로구 경운동 천도교 대강당에서 인민당 창당대회를 가졌다. 그는 당수를 맡고, 서기장에는 이만규를 임명했다.
인민당이 채택한 대중정당으로의 선언문 요약
인민당은 창당대회에서 채택한 선언문에서 “ 기본이념을 등한시하고 현실적인 요청에만 얽매어 있는 것이 역사의 진전을 지연시키는 행위라면, 기본이념에만 급급하여 그 현실적 과제를 무시하는 것도 역사의 발전을 지연시키는 동일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라고 한민당과 조공을 함께 비판했다. 이 선언은 이어 “한국민주당이 자산계급을 대표한 계급 당이요, 조선공산당이 무산계급을 위한 계급당임에 비하여 우리 당은 반동분자만을 제외하고 노동자 농민 근로자 인텔리 소시민 양심적 자본가와 지주까지를 포함한 전 인민을 대표하는 대중정당이다”하고 선언하였다.
인민당은 선언에서 ‘개방적인 대중적 정당’을 지향한다고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당내의 공산주의적 요소 때문에 끊임없는 노선갈등을 겪었다. 그것은 바로 당지도부에 포진한 볼셰비키들이 여운형의 온건노선과는 배치되는 방향으로 당을 이끌어 가려고 했기 때문이다. 당내 급진좌파들은 김오성(선전부장) 이석구(조직부장) 이걸소(총무국장)등 박헌영을 추종하는 쟁쟁한 공산주의이론가들이다.
박헌영을 추종하는 이들은 프롤레타리아를 중심으로 한 지도아래 부르주아민주주의 혁명론을 전개했고, 이를 위해서는 토지문제와 산업의 재편성이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김구가 주장한 독립정부 수립방안
▲ 우파 민족주의자 백범 김구 선생과 이승만 전 대통령
반탁운동과 찬탁운동의 갈등 속에서 갈라진 두 갈래의 통일전선운동이 한창이던 1946년 1월 우익세력인 김구는 비상정치회의 경성계획과 여운형이 이끈 4당대표자회담이 경합을 하게 된다.
김구는 1월 4일 그의 임정을 확대개편하고 인공의 좌익세력을 영입해 과도정부 구성을 목표로 한 비상정치회의를 구성하자고 제안했다. 김구는 비상정치회의에서 합의를 도출해 과도정부를 구성하고 과도정부가 국민대표회의(국회)를 소집, 헌법을 제정해 이 헌법에 따라 정식정부를 수립함으로써 신탁통치를 배격하려는 복안이었다.
이 방법은 임정요인들이 환국 이후에 처음으로 내 놓은 독립정부 수립방안이었다. 그러나 이 안은 좌익세력에 의해 거부되었다.
인민당의 분열과 3당 통합 여파로 인한 양분
1946년 2월 인민당이 민전에 가입함으로써 당의 노선이 좌경화하자 당내 우파의 동요가 일어났고 이로부터 우파의 탈당이 시작되었다. 이와 때를 맞추어 스탈린의 지시인 좌익 3당 통합문제는 인민당의 분열을 더욱 촉진 시켰다.
스탈린은 “조선에서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을 수행하기 위해 전위당적인 성격을 지닌 조공을 다른 좌익정당과 합쳐 단일의 대중정당으로 그 성격을 바꾸고자 했다.” 그러나 국내의 인민당의 기류는 3당 합당에 ‘무조건’합당을 주장하는 극좌파 조공과 ‘조건부’를 주장하는 온건파 간부들이 대립하는 형국이었다.
결국 이러한 여파는 8월 16일 인민당 중앙확대위원회에서 표결에 붙여지면서 47대 31로 극좌파가 승리하게 된다. 이 표결의 결과는 47인파인 무조건 합당파와 조건부 31인파로 양분되는 현상만을 가속화 시킨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결론적으로 47인파는 박헌영을 필두로 하는 조공의 합당파와 손을 잡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