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기 – 영국 버밍엄대학교
어른이 되기 한참 전에 사람들은 벌써 세상에 많이 익숙해진다. 다양하고 수많은 ‘물질’로 가득 찬 세상. 일상은 끊임없는 물질과의 접촉이고, 경험은 상식이 된다. 단단한 나무의자와 푹신한 소파, 투명한 유리구슬과 속이 안 뵈는 돌맹이, 전류가 흐르고 빛을 내면서 따뜻하기까지 한 전구 등등. 학교에서 물질은 세 가지 상태(기체, 액체, 고체)라는 것을 건성으로 흘려들어도, 물분자를 이용해 세수하고 얼음을 얼리고 밥을 짓는데 어려울 게 없다. 인간사로 복잡한 세상이지만, 물질속에서 일찌감치 세상을 깨친다.
그런데 쉽게 잊고 지내는 게 있다. 우리는 아주 ‘특별한’ 환경 속에서 살아간다는 점이다. 나는 지금 쾌적한 온도와 기압, 적당한 조명 아래서 글을 쓰고 있다. 아주 약한 지구 자기장과 자연에서 방출되는 미미한 방사선이 언제나 내 몸을 통과하고 있다. 사람이 살아가기에 알맞은 지구라는 환경이 우리 상식의 바탕이다. 하지만, 우주 어딘가, 지구와는 너무도 다른곳에선 어떨까? 훨씬 뜨겁거나 차갑고,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밝거나 텅 빈 어딘가에서, 물질에 대한 내 상식은 여전히 옳을까?
기술과 문명이 발달하면서 일상이라 부를 환경의 폭이 넓어졌다. 영하 수십 도까지 온도를 낮추는 냉동고나, 대기압의 백만 분의 일에 불과한 진공 층으로 둘러싸인 보온병 등이 가까운 예다. 제철소를 방문하면 용광로에서 천 수백 도에 이르는 샛노란 쇳물이 흘러내리는 장관을 볼 수도 있다. 무엇보다 우리에겐 일상 너머 지식도 있다. 땅 속 깊숙이 지구 중심에 가까이 가면 온도가 5400도에 이르러 태양 표면처럼 뜨겁다. 이렇게 온도가 높으면 지구 중심의 내핵을 이루는 철이 녹아버려야 할 텐데, 압력이 대기압의 300만 배가 넘어 고체상태로 존재한다. 높은 온도에서 철 원자들이 서로 떨어져 나가려는 걸 압력으로 꽉 잡아주기 때문이다.
우주로 나가면 비할 바 없는 극한의 환경이다. 좀 뜨겁다는 별 표면 온도는 수만 도, 중심부로 가면 1,000만 도가 넘어간다. 지구에서 제일 추운 남극에선 겨울 온도가 영하 100도 가까이 떨어지지만, 바깥 우주에선 그보다 170도가 더내려간다. 온도뿐만이 아니다. 우리가 숨 쉬는 공간은 공기 분자들로 번잡하다. 분자들이 겨우 수십 나노미터 움직일때마다 다른 분자들과 부딪힌다. 그래도 보온병 진공에서는 남들 방해 없이 수십 센티미터 움직일 수 있다. 하지만 우주공간에서는 또 다른 분자 하나를 만나기 위해 100억 킬로미터를 고독하게 여행해야 한다. 그나마 태양계에서 그렇고, 은하계 사이에선 그 거리가 100만 배 더 길어진다.
우린 참 많은 걸 안다. 그런데 아직 처음 질문을 다 살핀 게 아니다. 이렇게 다시 물을 수 있다. 우리가 아는 자연과 보이는 우주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전부일까? 인류의 과학 지식은(아직 모르는) 우주 어디서든, 또 언제든, 물질세계를 이해하는 데 옳다고 할 수 있을까?
욕심꾸러기 인간들은 결국(우리가 아는 한) 우주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극한 온도를 지구 위에 만들어냈다. 현재 우주에서 제일 뜨거운 건 이제 막 태어난 중성자별의 중심으로 약 1조 도에 이른다고 추정한다. 그런데 스위스와 프랑스접경에 있는 LHC(Large Hadron Collider; 대형 강입자 충돌기)란 실험장치에선 무려 5조5천억 도라는 온도를 만들어낸다. 물론, 현재가 아닌 먼 과거, 우주 생성 초기에는 모든 게 이보다 훨씬 더 뜨거웠다. 그래도 어쨌든, 아주 잠깐씩이나마, 인간은 알려진 현재의 우주를 넘어서는 셈이다.
이게 전부가 아니다. 아니, 실은 벌써 100여 년 전부터 인간은 다른 쪽에서 우주를 넘어섰다. 그 어떤 가벼운 움직임이라도 얼어붙는 궁극의 추위, ‘절대영도(absolute zero; 영하 273.15도)’에 가까이 가는 걸음에서 인간은 일찌감치 우주를 따돌렸다. 현재의 우주 어디에도 없을 뿐 아니라, 과거의 우주에도 없었을 극한의 추위가 여기 지구 위에서, 수백여 곳의 실험실에서 매일같이 만들어지고 있다.
이제 막 원자론이 받아들여지고, 원소 주기율표가 만들어지고, 상대론과 양자역학이 싹트던 무렵이다. 당시 여러 위대한 과학자들이 답을 찾던 문제가 있다. ‘모든 원소는 온도를 낮추면 기체에서 액체가 되고, 또 고체가 될까?’ 할 일은 너무나 단순했다. 그저 온도를 낮추고 또 낮추는 일이다. 믿기지 않겠지만, 저 심심한 질문에 답을 구하는 지난한 과정에서 우리는 상식 밖 새로운 물질 상태를 여럿 발견하고, 물질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을 수차례 근본적으로 바꿨을 뿐 아니라, 심지어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살리게 된다.
질문 자체는 꽤 오래됐지만, 본격적으로 답을 구하는 과정은 19세기 영국의 과학자 패러데이(M. Faraday)에서 시작한다. 그는 상온에서 압력을 가해 염소와 암모니아 등 여러 기체를 액체로 만드는 데 성공한다. 다만 산소, 질소, 수소 등은 압력을 가해도 좀처럼 액체로 만들 수 없었다. 가벼운 원소일수록 쉽게 움직여 서로에게서 벗어나려 하기 때문이다. 패러데이는 이들을 영구기체(permanent gas)라 불렀다. 하지만 바로 뒤이은 과학자들은 기체를 압축했다가 풀어주고를 반복하여 온도를 낮추는 기술을 개발한다. 실은 패러데이 실험 방법을 따라 하던 중 생긴 실수에서 찾아낸 방법이다. 덕분에 20세기를 코앞에 두고선 산소(영하 183도), 질소(영하 196도), 수소(영하 253도, 1898년)를 차례로 모두 액체로 만들고, 심지어 고체(가장 가벼운 수소 경우 영하 259도, 1899년)로 만드는 데도 성공한다.
눈치 빠른 이는 이쯤에서 의문이 생긴다. 헬륨은? 사실 헬륨은 절대영도를 향한 본격적인 경주가 한창인 무렵에야 발견된 원소다. 게다가 처음엔 태양의 빛띠를 분석하던 중 발견하고 (1868년), 지구에서 암석 안에 포획된 형태로 찾아낸 게 1895년에 이르러서다. 이름도 태양을 뜻하는 그리스어 헬리오스(Helios)에서 따 왔다. 마지막 남은 원소 헬륨을 액화한 건 네덜란드의 온네스(H. K. Onnes)였다. 1908년, 조용한 마을 라이덴에 있는 공장 같은 실험실, 시끄러운 기계 사이로 액체 헬륨이 한 방울 한 방울 모였다. 영하 268.9도, 절대영도에서 겨우 4.2도 높은 온도였다.
헬륨은 수소보다 무거운데 액체로 만들기가 더 어려운 건 의아한 일이다. 일단 둘 다 다른 원소들에 비교해 워낙 가벼워서 양자역학적 불확정성(uncertainty) 효과가 크다. 절대영도에서도 없어지지 않는 에너지가 존재한다. 한편 헬륨 원자 사이에 서로 끌어당기는 힘은 수소 원자 사이보다 매우 약하다. 이때 끄는 힘이란 전자기적 이유로 생기는 반 데르 발스(van der Waals; 온네스의 선생이다) 힘을 말한다. 수소의 경우 전자가 하나고 헬륨은 두 개인데, 후자의 경우가 더 안정하여 전기적으로 영향을 덜 받고, 그만큼 반 데르 발스 힘이 약하다. 다시 말해 헬륨 원자들은 움직이려는 성향이 강한데다 서로 끌어당기는 힘마저 약해서 액체로 만들기가 어려운 거다. 덕분에 헬륨은 주기율표상에서 고체가 되지 않는 유일한 원소다(낮은 온도에서 높은 압력을 가하면 고체로 만들 수 있긴 하다).
헬륨을 액화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온네스는 절대온도 1도 아래로 온도를 낮출 수 있게 된다. 우주 평균 2.73도보다 낮은 온도다. 현재까지 알려진 우주에서 가장 추운 곳은 지구에서 5000광년 떨어진 부메랑 성운(Boomerang Nebula)으로 절대온도 1도 정도라고 추정한다. 온네스 덕에 인류는 우주를 넘었다.
일단 저온 세계로 들어서면 기묘한 현상들이 발견된다. 금속의 전기 저항이 갑자기 사라지는(초전도 현상; superconductivity)이 생기고, 액체 헬륨은 중력을 거슬러 벽을 타고 오르는(초유체 현상; superfluidity)이 나타난다. 양자물질(quantum matter)의 시작이다. 미시적 세계에서만 모습을 드러내던 불확정성 원리의 양자역학이 맨눈으로 볼 수 있는 거시세계로 들어왔다.
저온기술과 초전도 현상은 기초 과학과 미래 기술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예를 들어 대형 강입자충돌기 LHC에서 빛의 속도에 가까운 입자들이 27킬로미터에 이르는 실험기의 둘레를 오차 없이 움직이게 하려면, 자기장을 이용해 끊임없이 정교하게 방향을 바꿔줘야 한다. 바로 초전도체를 사용하면 세고 아주 균일한 자기장을 만들 수 있다. LHC에는 15미터 길이에 개당 무게35톤에 이르는 초전도자석 1200여 개와 무려 100톤의 헬륨이 초유체 상태로 사용된다. 또 다른 예로, 에너지 문제해결의 열쇠가 될 수도 있는 프랑스 남부 ITER 국제 핵융합 시설의 경우, 1만 톤에 이르는 초전도 자석과 25톤의 액체 헬륨을 사용한다.
병원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MRI(Magnetic Resonance Imaging; 자기공명 영상) 장치의 핵심 부품도 초전도자석이다. 높은 분별력을 위해 역시 균일한 자기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MRI가 가능한 이유는 몸 안의 원자핵이나 전자 같은 입자들이 아주 작은 자석과도 같기 때문인데, 이를 발견한 제만(P. Zeeman)은 온네스에게 물리를 배우고 같은 대학에서 연구했다. 온네스와 동료들은 자신들의 순수한 지적 호기심과 정직한 땀이 불과 반백 년이 지나 사람들을 살리게 될 거란 걸 꿈에서도 몰랐을 테다.
낮은 온도를 확보하는 건 양자정보기술(quantum information technology)에도 중요하다. 열 때문에 생기는 원자들의 번잡한 움직임을 제거해야 미약한 양자 효과를 돋보이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온네스가 세상을 떠난 지 백 년이 다 돼가는 지금, 그의 후예인 네덜란드 과학자들은 맨 앞에서 양자기술을 이끌고 있다.
우리는 이제 물질을 절대온도 0.000001도까지 낮출 수 있다. 온네스보다 백만 배 앞으로 나아간 셈이고, 그만큼 우주를 넘어선 셈이다. 모든 게 앞서 단순한 질문 하나에서 시작되었다. 뻔해 보이는 물질의 세 가지 상태 속에 뻔하지 않은 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었다.
모두 비슷한 시기였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와 사고의 한계를 고민했고, 괴델은 수학이라는 체계가 내적으로 모순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다는 발칙한 주장을 증명했다. 하이젠베르크는 물리적 상태에 대한 완벽한 지식을 얻는 게 불가능하다는 불확정성 원리를 찾아내어 결정론적 우주관을 영원히 파기해 버렸다. 이들은 인간이 넘을 수 없는 지식의 울타리를 치는 듯싶지만, 다른 한편으론 끝이 언제 어디인지 알 수 없는 열린 결말을 펼쳐 보인다. 우리는 얼마만큼 왔고, 어디까지 탐구할 수 있을까?
더 낮은 온도, 더 높은 압력, 더 강한 자기장. 만족을 모르는 과학자들은 언제나 더 극한의 물리적 환경을 찾아 나선다. 그곳에서 우리가 모르는 새로운 물질, 새로운 성질, 어쩌면 새로운 물리법칙을 발견하게 될지 모른다. 탐험가는 원하는 무언가를 손에 넣기 위해서만 길을 떠나는 게 아니다. 그들은 지루하게 지평을 넓혀가는 일의 가치를 믿는다. 물리학자도 그렇게 극지로 향한다
※ 혁명은 증산상제님의 갑옷을 입고 행하는 성사재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