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조선은 불행히도 세종 사후 100년도 지나지 않아 전성기 때의 화려한 국가경영의 노하우와 과학기술의 소프트웨어를 대부분 상실했다. 뛰어났던 정치도 사라졌다. 정치뿐만 아니라 과학기술과 경제·국방·문화 등 모든 부문이 후퇴했다. 과학사학자 문중양 교수는 “15세기 당시로서는 세계 최고 수준의 역법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 [칠정산 내외편]은 세종 사후에 개선·증보되지 못했을뿐더러, 후대의 역산가(曆算家)들이 그 천체 운행의 계산법들을 제대로 계산하지도 못할 정도였다”고 지적했다. 이천과 장영실이 주도하여 제작됐던 각종 천문의기, 즉 혼천의와 간의 등은 세종 사후 관측 활동에 사용되지 않아 방치됐고 임진왜란을 거치면서는 다수가 유실됐다. 전란 후에는 남아 있는 기구마저 그 사용법을 아는 이가 없었다.
세종 사후 100년도 안 돼 쇠퇴한 조선
백성들의 생활도 크게 악화됐다. 세종은 공법(貢法)을 도입해 토지의 비옥도와 기후 변화에 기초해 세금에 등급을 매기는 ‘전분6등 연분9등제’에 의해 소규모 자작농들의 이익을 보호했고 이를 통해 국가 세수도 증대시켰다. 또한 ‘농사직설 프로젝트’를 통해 농업생산력이 크게 증대됐고, 합리적인 토지 개간법을 마련해 해안과 북방 지역의 간척지를 대폭 늘렸다. 그래서 세종 10년에 이르면 “전라도에 묵은 황무지가 많더니 이제 산림과 초목이 우거졌던 늪들이 죄다 개간돼 경작하기에 이르렀다”고 기록돼 있다.(세종 10년 윤4월 11일). 하지만 이처럼 번영했던 조선은 16세기 후반에 이르면 사정이 크게 달라진다. 소규모 자작농들의 이익이 침해되면서 농민들이 노비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아졌고, 국가재정도 크게 악화됐다. 공납 유지가 부실해졌고 자의적인 세금 수취로 서민들의 삶은 크게 위축됐다. 다수의 양인들은 군역 회피를 위해 또는 세금을 내지 못해 대지주의 노비로 전락하게 된다.
국가재정이 열악해지자 자연히 국방도 소홀해졌다. 16세기에 이웃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을 통일하고 신무기로 군사를 무장한 데 비해, 조선은 국방에 대한 무관심 속에 노비와 양반의 병역 면제로 인한 병력 부족, 군사 훈련 부족, 화기(火器) 도입 실패 등으로 국방력이 지속적으로 약화됐다. 1582년(선조 15년)에 이이가 제안했던 군제개혁안, 즉 서얼을 군역에 참여시키고 변방 군복무 노비를 면천시키는 것, 10만 군사 양성 등의 제안도 채택되지 않았다. 임진왜란 발발 4년 전인 1588년(선조 21년) 관찰사 조운흘이 제안한 진관체제 정비, 즉 20개의 무인도에 즉시 진관을 만들어 수군기지로 사용하자는 주장도 무시됐다. 세종시대만 해도 21만여 명(육군 현역 16만여 명, 해군 5만여 명)에 이르렀던 강군(强軍)이 무기력한 군대로 전락했다.
[선조실록]을 읽다 보면 반복적으로 드는 생각이 있다. 선조 초반부, 즉 임진왜란 직전이 지금의 사회 상황과 빼 닮았다는 점이다. 세곡(稅穀) 운반선 만드는 장인들이 돈을 빼돌려 허술한 배를 만들어서 파손되는 일이 반복되고, 나랏일을 게을리 하고 침묵하는 것을 능사로 여기는 풍토가 관리들 사이에 만연했다. 현직 관리가 승진을 청탁하기 위해 조정 재상까지 망라해 뇌물을 돌린 리스트를 보관하다 발각되기도 했다. 율곡 이이의 말처럼, 건국한 지 200여 년이 지나다 보니 인심이 쇠퇴하고 온갖 제도가 물러진 “중엽의 쇠퇴기” 상황이 당시 조선의 모습이었다. “뛰어난 의사는 그 환자가 수척한지 뚱뚱한지를 보기보다 그 맥을 짚어 병이 있는가를 살피며, 천하를 경영하는 자는 천하가 안정됐나 위태로운가를 보지 않고 그 기강이 잡혀 있는지를 먼저 보는데” 당시 조선은 기강이 곪아 터진 나라라는 게 이이의 진단이었다.
국가기강의 문란은 민생도탄으로 이어졌다. 율곡이 지적한 기강 문란의 증상은 구체적으로 “위·아래 사람들이 서로 믿는 실상이 없는 것이 그 첫째요, 관리들이 일을 책임지려는 실상이 없는 것이 그 둘째요, 어전회의에서 성취하려는 어떤 것도 나오지 않는 것이 그 셋째요, 어진 인재를 거두어 쓰는 실상이 없는 것이 그 넷째요, 자연재해를 당해서도 대응하는 실상이 없는 것이 그 다섯째요, 여러 정책 중에 백성 구제의 실상이 없는 것이 그 여섯째요, 사람들의 마음속에 공공의 이익을 추구하는 실상이 없는 게 일곱째 증상이었다.”(이이의 [율곡전서]) 율곡의 이 뼈아픈 지적을 읽으면서 흡사 오늘날의 우리나라를 그대로 파헤치는 듯한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율곡은 거듭해서 ‘실상이 없는 것’ 즉 무실(無實)이 가장 문제라고 강조했다. 사람들은 “입으로는 매번 기강 세우는 것을 떠들면서도 마치 고질병에 걸린 사람이 쓴 약을 목구멍으로 넘기지 않는 것”처럼, 현상유지에 급급하고 근본적인 개혁을 감행하지 않아 결국 임진왜란을 당하고 만다.
나라 기강 세우는 일부터 다시 시작해야
나라가 불행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나라 기강 세우는 일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기강 하면 공직자 기강이나 특별 감찰을 떠올리는 게 요즘 세태지만 기강이란 말에는 훨씬 깊은 뜻이 들어 있다. 그물의 작은 코를 꿰어 오므렸다 폈다 하는 기다란 세로줄인 강(綱)과 그 세로줄의 윗부분을 빙 둘러 연결시킨 굵은 줄인 기(紀)가 비유하듯이, 기강은 국가를 지탱 시키는 근간이다. 기강 세우는 일은 어려워 보이지만 사실은 쉽다. 상 주고 벌 내리는 일 하나만 제대로 해도 막힌 혈맥이 뚫리듯 나랏일이 돌아가기 시작한다는 게 이이의 생각이었다. 신상필벌이 기강 세우기의 출발점으로, 엄격함 없는 조직통솔은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율곡에 따르면 “세종대왕의 정치가 참으로 볼 만했는데, 그 때에는 잘한 사람을 포상하고 잘못한 자를 벌주는 기강이 분명한” 시대였다. 세종시대만큼 상벌이 분명한 때도 없었다. 그것이 “뛰어난 행정능력 소유자들과 무예 탁월자들이 모두 제 자리에 나아가 일하고 싶어 했으며, 국왕이 비록 정무를 보지 않으셨으나 별로 적체된 일이 없는 상황”(세종실록)을 만들었다. 최근 계속되는 참사에도 책임지는 공직자 한 명 없고, 온갖 거짓 뉴스가 판치는 지금 “그물의 벼리줄을 잡아당기니 그물눈이 저절로 펴졌던” 세종시대의 정치를 기대할 수는 없겠지만 인재들의 대규모 이탈과 전쟁으로 이어졌던 선조의 길만은 기필코 피해야 하지 않을까.
※ 세종이 힘(권력)을 얻는 3단계
① 경청 단계 : 귀를 기울여 다른 사람들의 말을 잘 들음. 다른 사람 말을 공감적으로 경청해서 그를 ‘친구’로 만 들곤 했다.(신체 메타포: 귀)
② 소통 단계 : 다른 사람의 말을 듣다가 좋은 아이디어가 나오면 맞장구 치며 적극 공명(共鳴)해서 자신을 ‘동지’ 로 생각하게 만들었다.(신체 메타포: 입)
③ 위임 단계 : 세종은 “경을 믿고 맡긴다”면서 힘을 실어 주곤 했다. 그가 가치롭게 여기는 것을 잘하도록 손을 펼쳐 (꿈을 펼치도록) 도와주어 ‘인재’로 성장하게 했다.(신체 메타포: 손)
- 박현모 여주대 세종리더십연구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