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 즉위 600돌… 다시 돌아본 세종의 리더십
권력은 소유가 아니라 소통에서 나온다
세종은 상 주고 벌 내리는 일을 분명히 하면서 어진 이에게 맡기고 재능 있는 자를 부렸고, 나랏일에 있어서는 반드시 옛것을 스승 삼아 밝은 제도로 정비했다.
율곡이 말하기를 “세종은 인재와 말(지식)을 잘 연결시킨 소통의 군주”…신하의 좋은 아이디어는 맞장구 쳐주고 성과 나올 때까지 지원해줘... 세종 즉위 600돌이다. 세종은 어떻게 통치하고 소통했기에 15세기 당시에 정치·과학·민생·국방 분야에서 당대 최고 수준의 성취를 이뤄낼 수 있었을까? 조선을 부국강병하게 만든 세종 리더십의 요체를 살펴보는 것은 지금의 혼란스러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조선왕조 제4대 왕(재위 1418~1450) 세종 시대는 정치와 과학기술이 한껏 꽃을 피운 부국강병의 전성기였다. 세종은 어떻게 정치·과학· 민생· 국방 분야에서 탁월한 성취를 이뤄냈을까?
‘강거목장(綱擧目張)’ - 대체적인 줄거리를 들면 세부적인 조목(條目)은 저절로 밝혀진다는 뜻으로, 하(下)는 상(上)을, 소(小)는 대(大)를 따름을 이르는 말.
1450년 2월 세종이 훙(薨, 왕의 사망)했을 때 신하들이 내린 세종정치에 대한 최종 평가다. “상 주고 벌 내리는 일을 분명히 하면서 어진 이에게 맡기고 재능 있는 자를 부렸고, 나랏일에 있어서는 반드시 옛것을 스승 삼아 밝은 제도로 정비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물의 벼리(綱)를 들면 그물눈(目)이 저절로 펼쳐졌습니다.”[信賞必罰 任賢使能 事必師古 制度明備 綱擧目張(세종 32년 2월 22일)] 기록이다. 세종의 국가경영은 그물의 벼리를 드니 그물눈이 저절로 펴진 것에 비유되고 있다. 핵심(key link) 부분을 잘 파악해서 당겼더니, 다른 부분이 모두 해결됐다는 의미다.
그물의 벼리와 그물눈의 비유는 사서삼경의 하나인 [서경(書經)]에서 유래해 많은 지식인에게 애용됐다. 예컨대 조선 후기의 실학자 최한기(1803∼1877)는 “사람 쓰는 도리를 모르면 학문에 명달(明達)하다는 게 모두 허명인 것이고, 치민안민(治民安民)을 도모한다는 것도 한갓 말장난에 불과할 뿐”이라면서 ‘강거목장’론을 설파했다. 그에 따르면 용인(用人)을 잘하고 못하는 데도 각각 두 종류가 있는데, 조정에서 “단지 그 사람을 잘 쓰는 것은 열등한 것이고, 사람 잘 쓰는 인재를 데려다 놓는 것이 진실로 우수한 것”이며, “어리석은 자를 쓰는 것은 그 잘못이 얕은 것이고, 어리석은 자를 선발하는 자리에 앉히는 것은 그 잘못이 깊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각 직책마다 사람을 잘 아는 인재를 배치하면 그것이 마치 벼리를 들면 그물눈이 펴지듯 원근이 다 통제될 것”이라는 게 그의 통찰이다.
기획력과 관리능력 갖춘 인재에게 업무 위임
▎집현전 학사들이 집필한 훈민정음 해례본. 과거의 사례를 집대성해 그것으로부터 성공한 조건과 실패한 원인을 분석하려는 세종의 노력은 집현전의 뒷받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벼리 장악 능력을 높일 수 있을까? 세종이 “여러 가지 일을 종합해서 잡다한 일을 처리하고, 한 가지 원칙으로 만 가지 일을 처리(以類行雜 以一萬行)”할 수 있었던 비법은 무엇일까? 앞서 세종 사망 시 최종분석인 경거 목장을 들여다보면 ‘인재의 소통’과 ‘말(지식)의 소통’ 두 가지로 집약된다.
첫째, 임현사능(任賢使能) 이후 신상필벌(信賞必罰)의 인재 쓰기다. 세종은 임현사능, 즉 기획할 수 있는 안목과 관리 능력을 가진 어진 인재에게 위임하고, 맡겨진 일을 성공적으로 완수해내는 유능한 인재를 부리는 데 뛰어났다. 가령 국방 분야의 경우 정흠지·김종서 등 어진(賢) 인재에게는 평안도와 함길도(함경도) 국방의 지휘권과 인사권을 통째로 위임했다. 이에 비해 최윤덕· 김윤수· 장영실 등 유능한(能) 인재에게는 구체적인 임무를 배당해 일을 성취시키게 했다.
그런데 어진 인재와 유능한 인재를 구분하는 것만으로는 하고자 하는 일이 성취되지 않는다. 그들을 움직이게 하려면 상 주고 벌 내리는 데 엄정해야 한다. 전자(역할 구분)가 인재들로 하여금 신명 나게 일하도록 하는 필요조건이라면, 후자(신상필벌)는 충분조건이다. 세종은 ‘최윤덕 정승 임명’이나 ‘신숙주 숙직사건’ 등에서 보듯이 일 잘한 인재들을 칭찬하고 후한 상을 주곤 했지만, 잘못한 관리를 처벌하는 데도 엄격했다.
지방 발령을 꺼려 병들었다고 거짓말한 조극관을 전라도에 유배 보낸 일(세종 29년 9월 9일)이나, 왕의 총애를 받던 승지 이순지가 인사 청탁을 받아들이자 그를 엄히 꾸짖고 파직시킨 일(세종 29년 4월 21일) 등이 그 예다. 세종이 가장 미워한 자는 거짓말하는 관리였다. 군사훈련을 겸한 사냥인 강무(講武)를 시행하는 도중에 “왕이 아프다”라고 거짓말한 관리를 망언죄(妄言罪)로 판결해 의금부에 가두고 90대를 때리게 했다(세종 7년 3월 20일). 거짓말이나 허위보고야말로 조직운영에서 가장 중요한 신뢰를 해치는 빌미가 된다는 게 세종의 생각이었다.
둘째, 사필사고(事必師古)를 거쳐 제도를 밝게 정비하는(制度明備) 지식경영이다. 세종은 위 인용문에서 보듯이, 어떤 일을 할 때 반드시 “옛 사람들이 성공하고 실패한 것을 거울 삼고, 오늘날의 이롭고 해로운 점을 참작하게(鑑古人之成敗 酌今日之利害)”했다.(세종 17년 8월 10일). 그 당시 사람들이 논의하는 거의 모든 문제가 과거에 이미 논의됐으며, 추구하는 해결책까지 역사 속에 다 제시돼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세종실록]에는 ‘계고(稽古)’ 즉 “옛일을 상고(詳考)하라”는 말이 빈번히 나온다. (세종 즉위년 9월 25일, 2년 11월 5일, 2년 9월 29일 등)
‘최고의 성공사례’만 뽑아 검토하는 지식경영
세종은 제안된 정책의 시행조건이나 진법(陣法)의 유형, 그리고 인재 쓰기 등 다양한 분야에서 최고의 성공사례(best practice)를 뽑아 검토하게 했다. 과거 사례를 집대성해 그것으로부터 성공한 조건과 실패한 원인을 분석하려는 세종의 노력은 집현전의 뒷받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실록에 숱하게 등장하는 “집현전에 명하여 옛 사례를 아뢰게 하라”는 지시가 그것이다. 세종이 지시를 내리면 싱크탱크인 집현전의 학사들은 장서각이라는 도서관 자료를 활용해 신속하게 보고서를 올리곤 했는데, “증빙과 원용을 거친”(세종 32년 2월 17일) 그 보고서는 거의 대부분 채택됐다. 그렇게 채택된 정책과 법안은 오례의(五禮儀), 즉 국가의 다섯 가지 의례인 길례(吉禮)·흉례(凶禮)·군례(軍禮)·빈례(賓禮)·가례(嘉禮)의 기초가 됐고, 나중에 [경국대전]에 반영되어 조선왕조를 지탱시키는 기틀로 작용했다. “옛것을 스승 삼아 밝은 제도로 정비했다”는 세종 사후 평가는 바로 이 점을 지적한 것이다.
흥미롭게도 세종 사후 130여 년 뒤 율곡 이이는 ‘인재와 말(지식)을 잘 연결시킨’ 소통의 군주라고 세종을 평가했다. “현인과 재능 있는 이를 쓸 때 그 신분을 따지지 않았고(인재의 소통), 임용하고 말을 채택함에 오롯이 하여 참소와 이간질이 들어갈 수 없게 한(말의 소통)” 임금이라는 것이다([율곡전서] 2권 ‘소차’). 이 대목에서 필자는 세종의 소통 능력이야말로 우리나라 리더들이 꼭 배워야 할 리더십 덕목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이 힘 또는 권력을 갖기 위해 리더십에 관심을 기울이곤 한다. 그런데 소통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힘(권력)에 대해서 종래의 정치학자들과 다르게 바라본다. 정치학에서는 ‘라스웰식 접근법’에 따라 누가 권력을 언제, 어떻게 장악하느냐(Who gets What, When, How)에 초점을 맞춘다. 권력의 소유가 관심의 대상이다.
하지만 소통력이 뛰어난 사람은 높은 자리에 있거나 돈 많은 사람들, 즉 권력 소유자를 ‘힘 있는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 진정으로 힘 있는 사람이란 구성원들과 소통 잘하는 사람이라고 믿는다. 그들은 힘의 원천이 소유한 무엇에 있지 않고, 나눔에 있다고 생각한다. 세종은 소유가 아닌 소통에서 힘이 나온다는 것을 일찌감치 깨닫고 실천한 사람이다. 그는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얼마나 잘 나누느냐에 따라 힘의 크기가 달라진다는 비밀을 알고 있는 리더였다. 그가 힘을 얻는 방법, 즉 힘 있는 사람이 되는 길은 크게 세 가지였다.
귀와 입과 손을 잘 사용한 세종의 대화법
첫째, 그는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들었다. 스승의 말씀, 아버지와 형제들의 이야기, 그리고 백성들의 목소리까지 귀담아 들었다. 태종 때 구휼 곡식을 얻지 못한 거지가 왕이나 세자가 아닌, 한낱 왕자에 불과한 세종(충녕)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다는 기록은 충녕만은 자기의 억울한 사정에 귀 기울일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세종은 특히 말하는 사람의 입장에 서서 온전히 듣는 공감적 경청을 하곤 했는데,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세종의 ‘친구’가 됐을 것으로 판단한다.
둘째, 세종은 다른 사람의 말을 듣다가 좋은 아이디어가 나오면 맞장구 치며 지지해줬다. 박연이 조선의 아악을 혁신해야 한다고 제안했을 때, 김종서가 국경을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끌어올려야 한다고 말했을 때 세종은 적극 공명해주었다. 인재들이 무언가 가치 있는 것을 찾아내서 하고 싶어할 때면 세종은 늘 “경의 말이 아름답다”라고 하여 입을 열어서 호응하곤 했다. 이러한 호응과 공명을 받은 사람들은 왕을 자신의 ‘동지’로 여겨 모든 것을 긴밀하게 의논하곤 했다.
셋째, 세종은 일을 위임하고 신뢰를 실어주는 데에 뛰어났다. 황보인에게 북변(北邊)에 축성을 쌓게 할 때, 이예에게 일본 외교를 맡길 때가 그랬다. 그들을 헐뜯거나 의심하는 말이 나오면 “그럴 리가 없다”면서 성과를 거둘 때까지 손을 내밀어 도와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