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제 수심결(修心訣)은 고려 시대의 고승 보조국사 지눌(1158-1210)스님이 지은 저술이다. 보조스님은 고려불교를 바로 잡기 위해 정혜결사(定慧結社) 운동을 일으키고 평생을 일관하여 마음 닦는 수심(修心) 불교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스님의 많은 저술 가운데 '수심결'은 말 그대로 수심의 바른 길을 명쾌하게 제시하고 있는 역저이다. 그러므로 '수심결'은 일찍부터 국내 불교인들의 관심과 주목의 대상이 되어왔다.
뿐만 아니라 수심결은 명·청의 중국판 '대장경'과 일본의 '대정신수대장경'에 수록되었으며 한국에서도 가장 많이 잃히는 선서 가운데 하나이다.

1.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부처를 찾아라
어리석은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며 받는 고뇌는 불타는 집 속에 갇혀서 받는 고통보다도 더하다. 어찌 그대로 머물면서 고통을 받고만 있는가. 윤회(輪廻)의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부처를 찾는 길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다.
부처를 어디서 찾을 것인가. 부처는 다른 것이 아니라 곧 내 마음이다. 그러니 마음을 어찌 멀리서 찾으려고 하는가. 이 육신을 떠나서 따로 있지 않다.
우리의 육신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여 영원하지 못하므로 생겨났다가 죽어 없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참 마음(眞心)은 모양이 없는 허공과 같아서 끊어지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육체는 죽으면 흩어져서 다시 본래의 요소인 흙·물·불·바람으로 되돌아 가버리지만, 마음(一物)은 항상 신령하여 하늘과 땅, 온 세상에 가득하고 영원하다'고 하였다.
2. 자기의 마음이 참 부처이다
애달프다. 요즘 사람들은 어리석어 길을 잃어버린지 오래되어 자기의 마음이 참 부처인 줄을 알지 못하고, 자신의 밝은 성품이 참다운 진리(眞法)인 줄을 모른다.
진리를 구하려 하면서도 높은 성인들만이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여기고, 부처를 찾으면서도 자신의 마음을 살피지 않고 먼 곳에서만 구하려 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마음밖에 부처가 있고, 성품밖에 진리의 법이 있다'고 말하면서 이러한 뜻을 그릇되게 믿은 채로 불도(佛道)를 구한다면, 그러한 사람은 아무리 오랜 세월동안을 부처님 앞에서 몸을 불사르고 팔을 태워서 공양하고, 뼈를 부수어 골수를 내고 피로 먹을 삼아 경전을 쓰고 하루에 아침 한끼만 먹으며 눕지도 않고 항상 앉아 선정을 닦고, 뿐만 아니라 모든 대장경을 다 잃고, 온갖 고행을 닦는다 할지라도 그것은 모래를 삶아 밥을 짓는 것과 같아서 단지 고생만 할 뿐 아무 이익이 없는 어리석은 일이다.
오직 자기의 마음이 부처인 줄을 알면 갠지스강의 모래알처럼 많은 진리의 가르침과 한량없는 묘한 진리를 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얻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일체의 중생들은 모두 부처의 지혜와 덕을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중생들의 갖가지 허망된 생각까지도 모두 부처의 원만히 깨달은 묘한 마음(如來圓覺心)에서 나왔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나의 마음을 떠나서 부처를 이룰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과거의 모든 부처님들도 오직 마음을 밝힌(明心) 분들이며, 현재의 모든 성현들도 마찬가지로 마음을 닦은 분들이다. 그러므로 앞으로 수행할 사람들도 마땅히 이러한 진리를 의지해야 한다.
바라건대 모든 수행하는 사람들은 절대로 마음 밖에서 진리를 구하지 말라. 마음의 성품은 깨끗하여 번뇌망상에 물들지 않아 본래부터 스스로 원만히 성취된 것이니 오직 망녕된 생각만 버리면 곧 그래로가 부처인 것이다.

3. 불성이 주인공이다
부처의 근본 성품(佛性)이 현재 이 몸에 있는데 어째서 저는 지금 불성을 보지 못합니까? 다시 자세히 설명하셔서 저로 하여금 깨달을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그대의 몸에 있는데도 그대 스스로가 보지 못할 뿐이다. 그대가 하루 종일 배고프고 목마른 줄 알고, 춥고 더운 줄도 알고, 화를 내고 기뻐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결국 무엇이 있어서 그렇게 하겠는가?
육신은 흙(地)·물(水)·불(火)·바람(風) 등의 네 가지 구성요소가 모여서 된 것이나 그 바탕은 완고하여 감정이 없는 것이므로 어찌 사물을 보고 , 듣고, 알고, 깨달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능히 사물을 보고, 듣고, 알고, 깨달을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것은 틀림없이 그대의 불성인 것이다.
그러므로 임제(臨濟)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육신을 구성하는 사대(四大)는 진리의 법을 설하지도 듣지도 못한다. 허공 또한 진리의 법을 설하지도 듣지도 못한다. 오직 그대의 눈앞에 뚜렷이 밝은 형상이 없는 한 물건(一物)만이 진리의 법을 설하고, 듣을 줄도 안다"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형상이 없는 한 물건(一物)'이란 바로 모든 부처의 바탕(法印)이며, 또한 그대의 본래 마음이다. 바로 이렇게 부처의 성품(佛性)이 현재 그대의 몸 안에 있는데, 어째서 그것을 밖에서 헛되이 찾으려 하느냐.
4. 그대가 바로 부처이다
어떤 스님이 귀종스님께 물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그대가 바로 부처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깨달은 후에 닦아서 밝은 마음을 보호하고 유지(保任)해야 합니까?"
"티끌 하나가 눈 속에 들어가니 실체가 없는 허공 속의 꽃(空花)이 어지럽게 날린다."
그 스님은 이 말을 듣고 알아차린 바가 있어 곧 깨달음을 얻었다. 만약 위에서와 같이 수행자를 깨달음의 문으로 이끌기 위해 선종의 조사스님들의 공안을 간절히 참구하여 믿음과 이해가 생겨 깨달음을 얻는 바가 있으면 바로 옛 성인들과 함께 손을 잡고 갈 것이다.
5. 깨달음과 수행
일반적으로 진리의 길에 들어가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만 요약해서 말합면, 진리를 듣고 단번에 깨달음을 얻는 돈오(頓悟)의 수행 방법과 점차로 닦아서 깨달음을 얻는 점수(漸修)의 수행방법, 두 가지에 지나지 않는다.
비록 진리를 듣고 단번에 깨달음을 얻고(頓悟) 동시 닦음도 완성되어 더 닦을 것이 없게 된 돈수(頓修)의 경우가 가장 높고 뛰어난 근기를 가진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지만 지난 전생부터 과거를 미루어 보면 이미 여러 생애 동안 깨달음을 의지해 닦아, 점차로 익혀 오다가 현생에 이르러 진리를 듣자마자 곧 깨달아 한 순간에 닦음까지 완성된 것이니 사실은 이것 역시 먼저 깨닫고 뒤에 닦는 돈오점수(頓悟漸修)의 방법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돈오(頓悟)와 점수(漸修)의 두 수행방법은 모든 성인이 지나온 길이다. 즉, 옛부터 모든 성인들이 먼저 깨닫고(頓悟) 뒤에 닦았으며(漸修) 이 닦음에 의하여 진리를 확실하게 알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신통력은 깨달음에 의해서 점차로 수행했을 때 나타나는 것이지, 깨달았을 때 바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경전에서 말씀하시기를 "논리적인 이치로는 돈오(頓悟)하면 깨달음과 동시에 모든 번뇌가 녹여지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한꺼번에 없어지지 않으므로 차례 차례로 소멸된다"고 하였다.
규봉(圭峰)스님도 먼저 깨닫고 뒤에 닦는 뜻(先悟後修)을 깊이 밝히어 말씀하시기를 "얼어붙은 연못이 모두 물인 것을 알지만 햇빛을 받아야 녹고, 보통 사람이 바로 부처인 것을 깨달았지만 진리의 힘(法力)을 빌려 익히고 닦아야 참 부처가 된다. 얼음이 녹아야 물이 흐르고, 물을 끌어대야 손을 씻는 물의 작용이 나타날 수 있듯이, 망령된 생각이 모두 없어지면 마음이 신령스럽게 통하여 반드시 신통과 광명의 작용을 나타낸다"고 하였다.
이와같이 신통력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점차로 수행을 닦음으로써 나타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6. 깨달은 후에도 계속 닦는 이유
스님께서는 돈오와 점수의 두 문이 모든 성인들이 거쳤던 수행방법이라 하였고, 깨달음이 돈오라면 왜 계속해서 점점 닦음이 필요하며, 닦음이 점수라면 그것으로 수행이 완성되었을텐데 왜 돈오를 또 말씀하십니까? 돈오와 점수의 뜻을 다시 설명하시어 남은 의심을 풀어 주십시오.

깨달음(頓悟)이란보통 사람이 어리석어 미혹했을 때 흙(地)·물(水)·불(火)·바람(風) 등의 사대(四大)를 진짜 자신의 몸뚱이라 착각하고, 그릇된 망상을 마음이라 착각하고, 자기의 성품이 진리의 부처(眞法身)인 줄을 모르고, 자기의 신령한 마음(靈知)이 진실한 참 부처인 줄을 모르고,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아 헤매다가 갑자기 큰 스승의 가르침으로 바른 길에 들어가 한 생각에 마음의 빛을 돌이켜 자기의 본래 성품을 보는 것을 말한다.
이 성품의 본바탕에는 본래부터 번뇌가 없고, 완전한 지혜의 성품이 본래부터 스스로 갖추어져 있어서 모든 부처님과 조금도 다르지 않음을 깨닫는 것을 돈오(頓悟)라 한다.
점수(漸修)란 비록 본래의 성품이 부처와 다름이 없음을 깨닫기는 했지만, 지난날 오랫동안 익혀 온 습성과 버릇은 갑자기 모두 없애기 어렵다. 그러므로 깨달음을 의지해 닦고 점차로 익혀서 깨달음의 결실이 이루어지고, 오랫동안 수행을 통해 성인의 자질을 길러서 마침내 성인이 되니 이를 점수라 한다.
비유하면 어린아이가 처음 태어났을 때 모든 감각기관이 갖추어져 있음은 어름과 조금도 다르지 않지만, 그 힘이 아직 충실하지 못하기 때문에 상당한 세월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어른과 같은 구실을 하는 것과 같다.
7. 마음을 찾는 방법
무슨 방법으로 한 색각에 문득 자신의 본성(自性)을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오직 그대의 마음이다. 다시 무슨 방법이 따로 있겠는가. 만약 방법을 써서 다시 알려고 한다면 그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자신의 눈을 보지 못하니 눈이 없다고 하면서 자신의 눈을 찾는 것과 같다.
이미 자기 눈인데 다시 볼 필요가 무엇인가. 눈을 볼 수는 없지만 확실히 내 얼굴에 붙어 있는 줄을 알아 잃지 않은 줄 알면 그것이 곧 눈을 보는 것이다. 다시 또 보려는 마음이 없는데 어떻게 보지 못한다는 생각이 있겠는가.
자기의 신령스런 앎(靈知)도 이와 같아서 이미 자신의 마음인데 어찌 다시 알려고 하는가. 만약 알려고 한다면 얻을 수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니, 다만 알 수 있는 대상이 아닌 줄을 알면 이것이 곧 성품을 보는 견성(見性)이다.
근기가 아주 높은 사람은 들으면 곧 쉽게 알겠지만 그렇지 못한 보통 이하의 사람은 의혹이 없지 않을 것이니, 다시 쉽게 방편을 말씀하여 어리석은 사람들로 알아듣고 깨달을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

진리의 도란 인간의 인식작용을 초월한 세계이므로 알고 모르는 데 있지 않다. 그대는 어리석은 생각을 가지고 깨달으려는 마음을 버리고 내 말을 들어라.
온갖 일과 모든 세계는 꿈과 같고 허깨비와 같다. 그러므로 망령된 생각도 본래 고요하고, 티끌 같은 객관의 대상도 또한 본래 실체가 없는 공한 상태이다.
모든 세계가 실체가 없는 공한 세계임을 아는 그곳에서는 신령스럽게 아는 영지(靈知)가 어둡지 않다. 그러므로 이러한 고요하고 신령스럽게 아는 영지의 마음이 바로 그대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이며, 삼세의 모든 부처님과 역대의 조사스님과 천하의 큰 스승들이 서로 비밀히 전한 진리(法印)이다.
만약 이 마음만 깨달으면 참으로 다른 과정이나 단계를 거치지 않고 바로 부처님의 경지에 올라, 모든 행동이 삼계를 초월하여 본래 마음으로 돌아가서 단번에 의심을 끊을 것이다. 그래서 인간과 천상의 스승이 되고 자비와 지혜가 하나 되어 자기 자신도 이롭고 남도 이롭게 하면 인간과 하늘의 한량없이 귀한 공양을 받게 되니 하루에 수만 냥의 황금을 사용할 수 있는 것과 같다.
그대가 만약 이와 같으면 참다운 대장부이며 평생에 할 일을 마친 것이다.
땅 위의 모든 냇물이 바다에 이르면 하나의
크고 한량없는 짠물이 되듯, 이 우주의
삼라만상( 森羅萬象 )도 허공에 이르면
차별이 없는 하나가 된다
(탄 허)
떨쳐 일어나야 할 때 일어나지 않고,
젊음만 믿고 힘쓰지 아니하고, 나태하며
마음이 약해 인형처럼 비굴하면 그는
언제나 어둠 속을 헤매리라.
(법구경)
도의 근본은 남의 슬픔을 아는 것이다.
남의 슬픔을 보고 슬퍼한다면 이것은 벌써
종교의 세계에 들어선 것이다.
(불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