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합은 가난과 불안도 이겨 낸다
세상이 시끄럽고, 가난이 염려되고, 불안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는 『논어』를 읽고 논어를 새롭게 해석한 다산의 『논어고금주』라는 책을 읽어보기 권합니다. 어떻게 해야 나라가 가난에서 벗어나고 혼란에서 벗어나 안정을 되찾아, 외국인들까지 좋은 나라이니 그곳에 가서 살아가겠노라고 찾아오는 그런 나라가 되는 길이 논어와 논어고금주에 자세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논어』 계씨(李氏) 편에
“내가 듣건대, 큰 나라나 작은 나라를 통치하는 사람은 인민의 숫자가 적음을 걱정하지 않고 빈자와 부자의 균등치 못함을 근심하며, 가난을 걱정하지 않고 편안하지 못함을 근심한다(丘也聞有國有家者 不患寡而患不均 不患貧而患不安)”라고 말하고 “대체로 분배가 균등하면 가난이 없고, 화합하면 국토의 좁음이 없으며, 나라가 편안하면 기울어질 일이 없다(蓋均無貧 和無寡 安無傾)”라는 원칙을 말하여 가난, 국토의 좁음은 국민의 화합으로, 나라의 위태로움은 백성의 편안함으로 극복이 가능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되어야 먼 곳의 사람들이 그 나라로 살려고 들어온다고 말해, 외교적으로 문제가 없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균(均)·화(和)·안(安)의 세 단계, 즉 균등해야 화합이 오고, 화합해야 나라가 편안해지는데 그렇게 되려면 재능이 뛰어난 인재를 적재적소에 등용하고, 능력이 부족하면 바로 자리에서 물러나야 원칙대로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한 인재들이 제대로 등용되어야 위태로운 나라는 붙잡아주고 넘어지는 나라를 부축하여 화합하고 편안한 나라가 세워진다고 했습니다.
여기에 다산은
“위(危)는 기울어지는 것이고 전(顚)은 넘어지는 것이며 기울어짐을 붙잡는 것을 지(持)라 하고 견고하게 붙잡는 것을 부(扶)라 한다”고 해석하여 위태롭거나 넘어지는 나라를 굳게 붙잡아 줄 때에 통치자나 지도자들의 능력이 인정받는다고 했습니다. 이에 의미 깊은 다산의 주장을 새겨들어야 합니다. 위태롭거나 넘어지는 나라의 불행은 외국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내부의 가난, 화합하지 못함, 편안하지 못함에서 오지, 외국으로부터나 외침에서 오지 않는다는 주장입니다.
다시 말하여 모든 국가의 어려움이란 국가 안의 문제에서 오지, 외부에서 오지 않는다는 주장인데, 오늘의 우리나라의 현상에서 쉽게 찾아낼 수 있습니다.
이른바 남남갈등이나 쉼 없는 극한적인 정쟁으로 나라가 두 쪽으로 갈려 있는데 어떻게 북한의 문제로만 미국이나 일본의 문제로만 넘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평창올림픽을 통해 북한은 나름대로 화해분위기를 조성해주는데, 모든 것을 친북행위로, 북한에 굴종하는 것으로 몰아붙여 정부의 입지를 약화시켜야만 자신의 당파에 이롭다는 그런 주장이 강해지는 한, 내부의 갈등을 조정하기가 참으로 어렵게 됩니다.
트집 잡지 않아야 할 일에 사사건건 트집만 잡는 그런 당파싸움이자 정쟁을 멈추고, 평화올림픽이 되도록 온 국민이 화합하여 제대로 치르면 나라에 안정이 오지 않겠느냐는 마음입니다. 고르게, 화합하고, 편안한 나라이기 위해 정쟁과 당파싸움을 멈추는 그런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해 봅니다.
목민심서와 더불어 시대와 더불어- 풀어쓰는 다산이야기
1,000회를 맞아
인간에 의해 역사는 만들어지고, 천재적인 사상가에 의해 어느 순간에 새로운 역사가 창조되기도 합니다. 1712년 프랑스에서는 장 자크 루소가 태어나고, 그가 50세이던 1762년 『사회계약론』을 출판합니다. 그해 조선에서는 다산 정약용이 태어나고, 그가 57세인 1818년에는 『목민심서』가 저술되는데, 독일에서는 그해 칼 마르크스가 태어납니다.
1789년은 다산이 28세로 문과에 급제하여 공직생활을 시작하는데, 사회계약론의 영향으로 프랑스에서는 프랑스혁명이 발발해 세계사에 큰 변혁이 일어났습니다. 1867년은 마르크스가 50세의 나이로 『자본론』 첫 권을 간행하여 세계 역사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사회계약론』과 『자본론』은 세계를 뒤흔든 저서였는데, 다만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저술된 책이라는 이유로 『목민심서』는 전혀 세계사를 움직이는 책이 되지 못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2004년 ‘다산으로 깨끗한 세상을’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다산연구소를 개설하여 다산의 사상과 철학, 즉 실학사상을 국민에게 알리고, 그의 목민심서 정신의 핵심인 ‘공렴(公廉)’의 실천으로 나라다운 나라가 되기를 염원해오고 있습니다. 금년은 목민심서가 저작된 200주년의 해이자, 다산이 18년의 오랜 귀양살이에서 풀려나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200주년이기도 합니다.
서양의 학자나 사상가에 비교하여, 부족함이 없는 조선의 실학자가 크게 빛을 보지 못하는 안타까움, 여기에서 느낀 바 있어 목민심서의 선구적인 사상으로 온 국민이 무장하여 그런 생각과 사상을 실행하고 실천해야 한다는 마음 때문에 모든 어려움을 감수하면서 우리의 일을 계속해 왔습니다. 이제 목민심서의 선구적인 생각과 사상을 되짚어 보면서 그의 가치가 극대화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목민심서는 한 지역을 통치하는 지방관을 목민관이라 호칭하고, “목민관은 백성들의 이익을 위해서만 존재한다(牧爲民有也)”라고 못 박고, 통치자들의 부귀호강을 위해서 백성들이 있다는 잘못된 생각을 뜯어고치는 일부터 시작한 책입니다.
프랑스 혁명이 시작되던 해에 문과에 급제한 다산은 ‘공렴원효성(公廉願效誠)’이라는 시를 지어 공(公)과 염(廉)으로 정성을 다해 백성을 위하는 정치를 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런 뜻에서 목민심서는 말합니다. 임지에 부임한 목민관의 공무 시작은 관내의 유지들을 모아놓고 그들이 당하는 고통과 아픔을 숨김없이 말하라고 권하고, 그들이 말한 내용이 민생을 괴롭힌 적폐라면 과감하게 청산하는 일부터 시작하라고 합니다.(莅事).
둘째, 목민관의 상관이자 감독관인 암행어사나 관찰사가 부정이나 비리를 저지르면 지체 없이 상부에 보고하여 잘못을 바로잡는 내부고발자의 역할을 하라고 주장합니다.(禮際) 내부고발자 보호법의 완비를 통해 법적으로 보장받도록 하라는 내용까지 포함하고 있습니다.
셋째, 상관의 명령이 공법에 위반되고 민생에 해를 끼치는 경우라면 그런 명령에는 절대로 따르지 말라는 주장도 폈습니다.(禮際)
넷째, 통치자나 목민관이 백성들을 괴롭히는 경우에도 백성들이 관(官)의 잘못에 항의하지 않기 때문에 좋은 정치가 행해지지 않는다고 하면서, 잘못된 관에 항의할 수 있는 국민저항권은 반드시 허용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200년 전의 다산 주장을 오늘 실천하고 실행한다면 얼마나 좋은 세상이 되겠습니까.
이렇게 공렴한 세상이 오고, 목민심서의 정신이 지금이라도 실천되기 위해서 1000회를 맞는 다산의 이야기는 멈출 수가 없습니다. 위의 몇 가지만 제대로 현실에서 구현된다고 해도 나라다운 나라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생각입니다.
200년 동안 제대로 실천 못한 다산의 꿈은 차근차근 실행에 옮겨, 백성들이 참다운 나라의 주인 되는 그런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공렴한 국민들이 지도자들까지 공렴하도록 항의하고, 감시하면서 새로운 나라를 만드는 일은 지금이 적기입니다. 이런 때를 놓치지 말고 온 국민이 힘을 모아 함께 추진해 가야 합니다. 지방자치 선거부터 올바르게 하는 일부터 시작합시다.
박석무
중국 광동성에서 만난 인물들
광동(廣東, 광둥)성에 간 까닭은 그곳이 따뜻해서였다. 송재소 교수의 중국인문기행을 겨울에 하면서, 장강을 따라 서진하던 코스는 남쪽으로 선회했다. 광동성은 영상 20도 정도로 따뜻했다. 중국 남쪽의 관문인 광동성은 성도가 광저우[廣州]이고, 홍콩·마카오가 인접해 있다.
이번 기행지에서 등장한 인물이 임칙서(林則徐, 린쩌쉬, 1785~1850) 홍수전(洪秀全, 홍쉬취안, 1814~1864) 강유위(康有爲, 캉유웨이, 1858~1927), 양계초(梁啓超, 량치차오, 1873~1929) 손문(孫文, 쑨원, 1866~1925) 등이었다. 중국 근대 변혁기의 주요 인물들이었다.
광동성 출신의 인물들, 변혁의 주역으로
기행 3일째 찾았던 아편전쟁박물관의 주인공은 임칙서였다. 그는 복건성 출신이지만, 광동성에서 역사의 한 장면을 장식했다. 그는 강직하고 청렴한 관원이었다. 그는 아편 엄금을 주장했다. “아편으로 인해 수십 년 뒤에는 중원에서 적을 막는 병사가 없을 것이며, 군비에 쓸 은(銀)도 사라질 것이다”
임칙서는 흠차대신으로 임명되어 광저우에 갔다. 그는 중국 아편 상인에게 단호하게 조처했지만, 외국의 아편 상인에게는 신중했다. 영국 여왕에게 아편의 폐해를 들어 도의로써 호소했고, 상인에게 아편을 넘겨 줄 것을 요청했다. 궁지에 몰린 아편 상인은 일단 아편을 내놓았다. 임칙서는 아편 2만 상자(237만근)를 후먼[虎門]에서 20일간 불태웠다. 그 역사적 장소에 건립된 박물관의 그림과 동상이 말하는 것처럼, 임칙서는 정정당당했고, 또한 승리한 듯 보였다.
박물관 안의 한 면에는 영국 의회에서 글래드스톤(William Ewart Gladstone, 1809~1898)이 연설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그가 당시 아편 거래를 위한 전쟁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그는 도의의 편이었다. 그러나 영국은 전쟁을 일으켜 중국을 굴복시켰다. 청 왕조는 중국을 지키지도 임칙서를 지켜주지도 못했다. 도의의 세상이 아니었다.
청 왕조의 중국이 기울고 있을 때, 홍수전이란 인물이 등장했다. 몇 차례 과거에 낙방한 그는 스스로 예수의 동생임을 자처하고 배상제회(拜上帝會)를 결성했다. 그의 군대는 순식간에 남경을 함락하고 중국을 뒤흔들었다.
이른바 ‘태평천국의 난’이었다. 홍수전은 광저우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태어났다. 기행 첫날 방문한 홍수전 옛집과 기념관에서 소개하듯이, 후대 역사인물들은 태평천국의 난을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홍수전은 새로운 시대를 열기에는 국량이 작았다. 리더십의 한계와 내부 분란으로 무너졌다.
이제 중국은 어디로 갈 것인가? 강유위와 양계초가 길을 제시했다. 모두 광동성 남쪽 출신이었다. 기행 5일째 찾아간 광저우의 구씨서실(邱氏書室) 안에는 강유위가 쓴 ‘만목초당(萬木草堂)’이란 편액이 걸려 있었다.
일찍이 서양 문물에 관심을 가진 강유위가 이곳에서 강학을 하며 양계초와 같은 제자를 양성했다. 이곳 표지판에는 만목초당을 ‘무술변법책원지(戊戌變法策源地)’라고 소개했다. 무술변법의 계책이 시작된 곳이란 뜻이다.
강과 양의 변법자강운동은, 청일전쟁의 패배로 한계를 드러낸 중체서용운동을 대신했다. 그러나 개혁에 돌입한 지 103일만에 막을 내리고 말았다. 이른바 ‘100일 유신(무술변법)’이다(1898). 입헌군주제 개혁은 그나마도 시행되기 힘들었지만 한계가 있었다.
이제 혁명을 통한 공화제 수립이 중국의 목표가 되었다. 민족, 민주, 민생의 세 가지를 주장한 손문이 지도자로 부상했다. 그 또한 광저우에서 가까운 향산(香山: 현재의 中山) 출신이었다. 광저우에는 손문을 기념하기 위한 중산기념당이 있다. 건물 전면에는 ‘천하위공(天下爲公)’이란 편액이 걸려 있었다. 광저우의 발전상은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지만, 손문이 말한 혁명이 모두 완성되었는지는 모르겠다.
나라 안팎의 지도자들, 도의가 있었으면
광동성의 인물들이 중국의 길을 찾아 분투할 때 ‘나쁜 놈’으로 거명되는 인물이 있었다. 바로 원세개(袁世凱, 위안스카이, 1859~1916)였다. 하남성 출신인 그는 변법개혁운동을 지지하는 듯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배반했다. 손문의 혁명과정에서도 황제가 되려는 권력욕에 중국의 나아갈 길을 방해했다. 그가 임오군란, 갑신정변 무렵에 조선에 와서 자행한 방자하고 무도하며 시대착오인 행위를 더 말해 무 하겠는가.
중국 근대에 광동성에서 출현한 인물들을 보면, 시대적·지리적 환경이 인간의 성장에 미치는 영향이 막대함을 새삼 알 수 있었다. 또한 인간은 홀로 모든 것을 완성할 수는 없고, 함께 만들고 이어 달리며 그 자질과 능력이 향상된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한 가지 더. 역사 속 옛사람을 만나면서 개인의 품성과 자질을 생각해본다. 큰 역사적 흐름 속에 일개인의 선과 악이 얼마나 영향을 미치랴. 하물며 선악이란 것도 일도양단하기 어려운 것인데.
그럼에도 사람이란 도의와 양식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다. 아무리 국가의 일이 시스템에 의해 움직인다고 하지만, 구체적으로 임무를 수행하는 인물에 따라 많은 차이가 생긴다. 동서고금이 다르지 않다. 나라 안팎의 뉴스를 장식하는 정치 지도자들이 하나둘 떠오르니 마음이 편치 않다.
김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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