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육바라밀
가난한 사람이 와서 구걸하거든 자신의 능력껏 나누어 주라. 동체자비(同體慈悲)한 마음으로 내 몸처럼 사랑하면 이것이 참된 보시이다.
나와 남이 둘이 아닌 한 몸뚱이다. 태어날 때도 빈손으로 왔다가 죽을 때도 빈손으로 가는 것이 우리 인생의 모습이다.
어떤 사람이 와서 해롭게 하더라도 마음을 거두고 단속하여 성내거나 원망하지 말아라. 한 생각 속의 성내는 마음(瞋心)이 온갖 장애의 문을 연다.
참는 일(忍行)이 없으면 보살의 모든 선한 행위(六度萬行)가 이루어질 수 없다.
본바탕의 천진(天眞)한 마음(本眞心)을 잘 지키는 것이 첫째가는 정진 바라밀이다.
20. 진언, 예배, 염불, 간경
진언
신비한 진언(眞言)을 외우는 것은, 현세에 지은 행위의 업은 비교적 다스리기가 쉬워 자신의 힘으로 고칠 수가 있지만, 전생에 지은 업보는 지워버리기 어려우므로 신비한 힘을 빌리기 위한 것이다.
예배
예배란 공경이며 굴복이다. 참된 성품(眞性)을 공경하고, 어리석음(無明)을 굴복시키는 일이다.
몸(身)과 말(口)과 생각(意), 즉 삼업이 함께 청정하면 그것이 곧 부처님이 나타나심이다.
염불
염불(念佛)에는 입으로 하는 송불(誦佛)과 마음으로 하는 염불(念佛)이 있다. 입으로만 부르고 마음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도를 닦는데 아무 이익이 없다.
'나무아미타불' 여섯 자 법문은 윤회의 고통을 벗어나는 지름길이다. 마음으로는 부처님의 세계를 생각하여 잊지 않고, 입으로는 부처님의 명호를 똑똑히 불러 헛갈리지 않아야 한다. 이와 같이 마음과 입이 서로 합치되는 것이 염불(念佛)이다.
간경
경전을 보는데 자기 마음속을 향하여 공부를 하지 않으면 비록 만 권의 대장경을 모두 보았다 할지라도 아무 이익이 없다.
21. 출가 수행자의 마음 자세
공부하여 아직 도를 이루기도 전에 남에게 자랑하려고 말재주만 부려서 상대방을 이기려고 한다면 변소를 예쁘게 단청하는 격이 되고 말 것이다.
이 말은 진리를 싫어하고 사도(邪道)가 판을 치는 말세에 어리석게 공부하는 이를 특별히 일깨우는 말이다. 공부란 본래 자기 성품을 닦는 것인데, 수행자가 남에게 보이기 위해 겉으로만 공부한다면 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출가하여 수행승이 되는 일이 어찌 작은 일이랴. 편하고 한가함을 구해서도 아니며, 따뜻한 밥을 먹으려고 한 것도 아니며, 명예와 재물을 구하려는 것도 아니다.
나고 죽는 생사를 면하려는 것이며, 번뇌를 끊으려는 것이며,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지혜를 이으려는 것이며, 중생 세계인 삼계를 뛰어넘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서이다.
가히 하늘을 찌를 대장부라 할 만하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세월의 무상한 불꽃이 온 세상을 태운다."고 하셨고, "중생들이 받는 고통의 불길이 사방에서 함께 타오른다."고 하셨고, "온갖 번뇌의 도둑이 항상 사람들을 죽이려고 엿보고 있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마땅히 스스로를 깨우치기를 자신의 머리털에 붙은 불을 끄듯이 해야 한다.
사람의 몸은 태어나서(生)·늙고(老)·병들고(病)·죽는(死) 변화의 과정이 있고, 모든 것들이 존재하는 세계는 생겨나서(成)·지속되면서 머물며(住)·변해가면서 허물어져(壞) 결국 사라져서 본래부터 실체가 없던 공(空)의 상태로 되돌아가 버린다.
인간의 마음도 생각이 일어났다(生), 잠시 머물고(住), 변해가고(異), 사라져버리는(滅) 것이다.
바로 이것이 무상한 고통의 불이 우리의 사방에서 함께 불타고 있음이다. 진리를 찾는 구도자들이여, 부디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말라.
덧없는 세상의 명예를 탐하는 것은 부질없이 몸만 괴롭히게 하는 것이고, 세상의 이익만을 구하는 것, 또한 활활 타오르는 업의 불길 속에 섶을 더 보태는 것과 같다.
이름과 재물만을 탐하는 출가 수행자는 시골에 사는 촌사람만 못하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도둑들이 내 옷을 꾸며 입고, 부처를 팔아 온갖 나쁜 짓을 일삼고 있는가"하고 통탄하셨다.
22. 수행자가 옷과 음식을 대하는 태도
아, 불자여, 그대의 한 그룻의 밥과 한 벌의 옷이 곧 농부의 피요, 직녀들의 땀이다. 도의 눈(道眼)이 밝지 못하고서야 어떻게 사용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말하기를 "털을 쓰고 뿔을 이고 있는 것이 무엇인 줄 아는가? 그것은 오늘날 신도들이 주는 것을 공부도 하지 않고 거저먹는 그런 무리들의 미래상이다."라고 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배가 고프지 않아도 먹고, 춥지 않아도 더 입으니 무슨 마음일까.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눈앞의 쾌락이 훗날 괴로움이 됨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수행자는 음식을 먹을 때 독약을 먹는 것같이 두려워하고, 신도에게 보시를 받을 때에는 화살을 받는 것과 같이 두려워하라"고 한 것이다. 두터운 대접과 달콤한 말을 수행자는 두려워해야 한다.
23. 참회
죄를 지었으면 당장에 참회하고, 잘못된 일이 있으면 부끄러워할 줄 아는 자세가 대장부의 기상이다. 그리고 허물을 고쳐 스스로 새롭게 되면 그 죄업도 마음을 따라 없어질 것이다.
참회란 먼저 지은 허물을 뉘우치고, 다시는 짓지 않겠다고 맹세하는 일이다. 부끄러워한다는 것은 안으로 자신을 꾸짖고 밖으로는 드러내는 일이다.
마음이 본래 비어 고요한 것이므로 죄업도 붙어 있을 곳이 없다.
수행자는 마땅히 마음을 단정히 하여 검소하고 진실한 것으로서 근본을 삼아야 한다. 표주박 한 개와 누더기 한 벌이면 어디를 가나 걸릴 것이 없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마음이 똑바른 줄(絃)과 같아야 한다"고 하셨으면, 또 "바른 마음이 곧 도량이다"라고 하셨다. 이 몸에 탐착함이 없으면 어디를 가나 거리낌이 없다.
보통 사람들은 눈 앞 현실의 경계에만 집착하고, 수행자는 마음만 붙잡으려고 한다. 그러나 마음과 현실의 경계, 두 가지를 모두 내버리는 것이 참된 법이다.
부모를 죽인 사람은 부처님 앞에 나아가 참회할 수 있지만, 깨달음을 통해 얻은 반야지혜를 비방한 사람은 참회할 길이 없다.
24. 임종할 때 관찰해야 할 문제
목숨이 다해 임종할 때에는 이렇게 생각하고 관찰해야 한다. 즉, 나를 구성하고 있는 물질적 요소와 정신 작용인 오온의 본래 모습이 실체가 없는 공한 것임을 관찰해서 우리의 육신은 흙·물·불·바람 등의 인연화합으로 잠시 이루어져 있으므로 '나'라는 실체가 없다(無我).
참 마음(眞心)도 모양이 없어, 어느 곳에서 온 것도 아니요, 가지도 않는다. 태어날 때에도 성품은 생긴 것이 아니요, 죽을 때에도 성품은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지극히 밝고 고요하여 마음과 밖의 경계가 둘이 아닌 하나인 것이다.
오직 이와 같이 관찰하여 단번에 깨달으면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와 인과의 법칙에 얽매이거나 이끌리지 않게 될 것이니, 이런 사람이 세상에서 뛰어난 자유인이다.
만약 부처님을 만났다 하더라도 따라갈 마음이 없고, 지옥을 보더라도 무서운 생각이 없어야 한다. 다만 무심(無心)하게 되며 온갖 세계의 모든 것들과 하나가 되어 같게 될 것이니 이 점이 중요한 대목이다.
그러므로 평상시에는 씨를 뿌리는 원인이 되고, 임종할 때에는 그 열매를 거두는 결과가 되니 수행자는 이 점을 주의해야 한다.
죽음이 무섭고 싫은, 늙음에 이르러서야 부처님을 찾아 나가네.
25. 임제종과 선종 오종
공부하는 사람은 먼저 불교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종파의 가풍(家風)부터 자세히 알아야 한다. 옛날에 마조스님이 한번 고함을 친 할(喝)에 백장스님은 귀가 멀고, 황벽스님은 혓바닥이 빠졌다. 이 멋진 할이야말로 곧 부처님께서 연꽃을 들어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당신의 소식을 전한 것이요, 달마대사가 서쪽에서 중국에 오신 뜻이다. 이것이 임제종의 근원이 된 것이다.
께달음을 얻은 조사들의 종파에 다섯 갈래가 있는데, 그것은 임제종(臨濟宗), 조동종(曹洞宗), 운문종(雲門宗), 위앙종( 仰宗), 법안종(法眼宗) 등이다.
26. 살불살조(殺佛殺祖)의 대장부
깨달음을 얻을 만한 대장부는 부처님이나 조사 보기를 원수같이 해야 한다. 만약 부처님께 매달려 구하는 것이 있다면 그는 부처님에게 얽매여 있는 것이다.
깨닫지 못하고 무언가를 구하고 있다면 모두 고통이므로 일없는 것만 같지 못한 것이다.
부처와 조사까지도 원수같이 보라는 것은 이 책의 첫머리의 '바람도 없는데 물결을 일으킨다'는 말을 맺음이고, 구하는 것이 있으면 모두 고통이라고 한 것은 '딴 것이 없다. 모두가 그대로 옳다'는 말을 맺은 것이고, 일없는 것만 같지 못하다는 것은 '한 생각을 일으키면 곧 어긋난다'는 말을 맺은 것이다.
신비로운 빛(神光)은 어둡지 않아 만고에 환하게 비춘다. 이문 안에 들어오면 얄팍한 지식과 분별로 알음알이(知解)를 내지 마라. 신비로운 빛(神光)이 어둡지 않다는 뜻은 이 책의 첫머리의 '한 물건이 밝고 신령하다'고 한 말의 맺음이고, 만고에 환하다 함은 '본래부터 나지도 죽지도 않는다'는 말의 맺음이고, 알음알이(知解)를 두지 말라는 뜻은 '이름에 얽매여서 알음알이(知解)를 내지 말라'는 것을 맺는 말이다.
이와 같이 들어 보여 종지를 밝혔다면
서쪽에서 온 달마대사가 한바탕 웃었겠네.
(그러나 마침내 어떻게 할 것인가
아, 애닮기만 하다.)
달은 밝고 강산은 고요한데
터지는 웃음소리 천지가 놀라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