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참선하는 이가 점검해야 할 16가지 도리

참선하는 수행자는 항상 이렇게 돌이켜 보아야 한다. 네 가지 은혜(四恩)가 깊고 높은 것을 알고 있는가. 네 가지 요소(四大)로 구성된 육신이 점점 썩어가는 것을 알고 있는가. 사람의 목숨이 들이마시고 내뱉는 한 번의 숨에 달린 것을 알고 있는가. 일찍이 부처님이나 조사와 같은 훌륭한 스승을 만나고서도 그냥 지나쳐버리지 않았는가.
높고 거룩한 진리의 가르침을 듣고 기쁘고 다행한 생각을 잠시라도 잊어버린 경우가 있었는가. 공부하는 장소를 떠나지 않고 수도인 다운 절개를 지키고 있는가. 곁에 있는 사람과 잡담이나 하고 지내지 않는가. 부질없이 시비를 일으키고 있지나 않은가. 화두가 어떤 상황에서도 분명하여 어둡지나 않는가. 이야기할 때도 화두가 끊어지지 않고 끊임없이 되는가. 보고 듣고 알아차린 때에도 한 조각을 이루고 있는가. 제 공부를 돌아볼 때 부처와 조사를 붙잡을 만한가. 금생에 꼭 깨달음을 얻어 부처님의 은혜를 이을 수 있을까.
앉고 눕고 편할 때에 지옥의 고통을 생각하는가. 이 육신으로 윤회의 고통을 벗어날 자신이 있는가. 인간의 마음을 흔들어 움직이게 하는 온갖 현상이 나에게 닥쳐와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가.
이것이 참선하는 수행인의 일상 생활 속에서 때때로 점검해야 할 도리이다. 먼저 깨달음을 얻은 옛사람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몸을 금생에 못 건지면 다시 어느 세상에 태어나 건질 것인가"

네 가지 은혜란 부모와 나라와 스승과 시주(施主)의 은혜이고, 네 가지로 된 더러운 몸이란 아버지의 정액 한 방울과 어머니의 피 한 방울은 물(水)의 젖은 기운이요, 뼈와 살은 땅(地)의 단단한 기운이요, 정기(精氣)와 피의 한 덩어리가 썩지도 않고 녹아버리지도 않는 것은 불(火)의 더운 기운이요, 콧구멍이 먼저 뚫려 숨이 통하는 것은 바람(風)의 움직이는 기운이다.
아난다존자가 말하기를 "정욕(情欲)이 거칠고 흐려서 더럽고 비린 것이 한데 어울리어 뭉쳐진다"고 한 데서 더러운 몸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한 생각 할 때마다 육신이 썩어간다는 것은 세월이 잠시라도 쉬지 않아서 얼굴은 저절로 주름살이 잡히고 머리털은 어느 사이에 희어간다는 뜻이다.
옛말에 "지금은 이미 옛 모습이 아니네. 옛날이 어찌 지금과 같았겠는가"라고 한 바와 같이 과연 덧없이 무상(無常)한 이 몸이 아닌가. 세월이란 무상한 귀신은 모든 생명체를 죽이는 것으로서 즐거운 유희로 삼으므로 생각할수록 두려울 뿐이다.
내쉬는 날숨은 불의 기운을 몸밖으로 내뱉는 것이요, 들이마시는 들숨은 바람 기운을 들이마시는 것이다. 사람의 목숨은 오로지 들이마시고 내뱉는 숨에 달린 것이다.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움직이게 하는 여덟 가지 현상(八風)은 마음에 맞는 것과 마음에 거슬리는 것, 두 가지 환경이 있다.
지옥의 고통이란 인간의 60겁이 지옥의 하루가 되는데, 쇳물이 끓고 숯불이 튀고 뾰족한 칼산에서 끌려 다니는 고생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의 몸으로 다시 태어나기가 마치 바다한 가운데 떨어진 바늘을 찾기보다도 어렵기 때문에 내가 이것을 모르는 여러 사람을 불쌍히 여겨 경계의 말로 일깨우는 것이다.
16. 깨달음을 얻은 뒤에 해야 할 일
수행을 하지 않고 말로만 불법을 배우는 사람들은 말할 때에는 깨우침을 얻은 듯 하다가도 실제의 경계나 상황에 직면하면 그만 미혹하여 앞이 캄캄하여진다. 이른바 '말과 행동이 서로 다르다'
만약 생사를 끊으려면 한 생각(念子)을 '탁' 깨뜨려서 마음속의 어두운 칠통을 깨뜨려야 비로소 나고 죽는 생사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진리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한 생각(一念子)을 깨친 뒤에는 반드시 깨우침이 높은 스승을 찾아가 올바른 깨우침을 얻었는가를 점검하여 바른 안목을 결택해야 한다.
먼저 깨달음을 얻은 옛 사람이 말하기를 "자신의 눈이 바른 것만 귀하게 여기 뿐이지, 자신의 행실은 보려고 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바라건대 공부하는 수행자는 자기 본래 마음을 확실히 믿고, 스스로 열등하게 생각하여 굽히지도(自屈) 말고, 교만하여 스스로 높이지도(自高) 말아야 한다.
이 마음은 평등하여 본래 보통 사람과 성인이 따로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미혹한 보통 사람이 있고, 깨달은 성인이 있다.
스승의 가르침을 듣고 문득 참 나(眞我)가 부처와 조금도 다름이 없음을 깨닫는 것을 '단번에 깨달음(頓)'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스스로 못났다고 굽히지 말 것이니 육조스님께서 말씀하신 "본래 한 물건도 없다.(本來無一物)"고 한 말이 그것이다.
깨달음을 얻은 뒤에 지난날부터 익혀온 버릇을 점차로 끊어가면 마침내 보통 사람이 변하여 성인이 되는 것은 '오래 닦음(漸)'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스스로 잘났다고 높이지도 말 것이며 신수스님께서 말씀하신 "부지런히 털고 닦으라(時時勤拂拭)"고 한 말이 이것이다.
스스로 못났다고 굽히는 것은 교학을 배우는 사람의 병이고, 스스로 잘났다고 높이는 것은 참선하는 사람의 병이다.
교학을 배우는 이들은 참선의 비밀한 수행법을 통해 깨달음의 문으로 들어가는 것을 믿지 않고, 방편(方便)으로 가르친 데에 깊이 빠져서 진리를 마음으로 관찰하고 행동하지(觀行) 않고 남의 보배만 셈하게 되므로 스스로 못났고 자신 없어하는 퇴굴심(退屈心)만 갖는다.
참선하는 선학자는 교학의 수행방법인 점점 닦아 감(漸修)과 아울러 못된 버릇을 끊어서 마침내 깨달음의 좋은 길(正路)에 이르는 방법을 믿지 않고, 지난날 익힌 못된 버릇이나 행동을 하면서도 부끄러워할 줄 모르며, 공부해서 얻은 결과가 초보적인 경지밖에 안되는데도 진리의 세계에 대해 자만한 생각이 많기 때문에 무턱대고 교만하게 지껄인다.
그러므로 옳게 배워 마음을 닦은 사람은 스스로 못났다고 굽히지도 않고 스스로 잘났다고 높이지도 않는다.
마음을 모르고 도를 닦는 것은 어리석은 무명(無明)만 더욱 깊어질 뿐이다.
확실하게 깨닫지 못했다면 어찌 참되게 닦을 수 있겠는가. 깨달음(悟)과 닦음(修)은 마치 기름과 불이 서로 의지하여 빛을 내는 것과 같고, 눈과 발이 서로 돕는 것과 같다.
17. 번뇌를 여윈 경지가 깨달음의 경지
수행하는데 가장 중요한 핵심은 보통 사람이 가지고 있는 번뇌 망상을 없내는 것이다. 특별히 성인의 알음알이가 있을수 없다.
모름지기 생각을 비우고 스스로 마음을 비추어 보아서 한 생각 인연따라 일어나는 것(一念緣起)이 사실은 진리의 세계에서 보면 마음이란 실체가 없어 공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일어남이 없음을 믿어야 한다.
살생하고, 도둑질하고, 음행하고, 거짓말하는 것이, 모두 한 마음(一心)에서 일어나는 것임을 자세히 살펴보면, 마음의 본바탕은 더 보탤 것도 덜어낼 것도 없이 그 일어나는 곳이 비어 있어서 다시 무엇을 끊을 것이 없다.
모든 것이 실체가 없는 환상(幻)인 것인 줄을 알면 번뇌로부터 곧 벗어난 것이므로 더 방편을 쓸 것이 없다. 환상을 여의면 곧 깨달은 것이므로 더 이상 닦아 갈 것도 없다.
마음은 요술쟁이요, 몸은 환상의 성(城)이고, 세계는 환상의 옷이고, 이름과 형상(名相)은 환상의 밥이다. 그뿐 아니라, 마음을 내고 생각을 일으키는 것이나, 거짓을 말하고 참을 말하는 어느 것 하나 환상이 아닌 것이 없다.
환상은 실체가 없는 허공의 꽃과 같으므로 환상이 없어지면 그 자리가 곧 한 생각도 일어남이 없는 부동지(不動地)이다.
꿈속에서 병이 나서 의사를 찾던 사람이 잠을 깨면 근심, 걱정이 사라지둣이 모든 것이 환상인 줄을 아는 사람도 또한 그렇다.
보살이 중생을 건져 해탈을 얻어 열반에 들게 했다 할지라도, 사실은 해탈을 얻은 중생이 없는 것이다.
보살은 오로지 중생에 대한 생각뿐이다. 생각의 바탕이 빈 것(空)임을 알아내는 것이 곧 중생을 건지는 것이다. 생각이 이미 비어 마음이 고요하면 사실 구제할 중생이 따로 없다. 이상은 믿음과 깨달음을 말한 것이다.
이치(理)는 단번에 깨달을 수 있다 하더라도, 버릇은 단번에 없앨 수 없다.
18. 마음의 계율(心戒)
음란하면서 참선을 하는 것은 모래를 쪄서 밥을 지으려는 것과 같고, 살생하면서 참선하는 것은 자신의 귀를 막고 소리를 지르는 것과 같고, 도둑질하면서 참선하는 것은 밑 빠진 그릇에 물이 가득 차기를 바라는 것과 같고, 거짓말을 하면서 참선하는 것은 똥으로 향을 만들려는 것과 같다. 이런 것들은 비록 많은 지혜가 있더라도 모두 악마의 길을 이룰 뿐이다.
덕이 없는 사람은 부처님의 계율을 의지하지 않고, 몸(身)·입(口)·생각(意) 등 삼업(三業)을 지키지 않는다.
게으르고, 나태하고, 남을 깔보고, 시비를 걸어 따지는 일을 일삼는다.
굳게 다짐한 마음의 계율(心戒)을 한번 깨뜨리면 온갖 허물이 함께 생겨난다.
만약 계율을 지키지 않으면 다음 생에 비루먹은 여우의 몸도 받지 못한다는데, 하물며 청정한 깨달음의 열매를 바랄 수 있겠는가.
계율을 존중하기를 부처님을 모시듯이 한다면 부처님이 항상 곁에 함께 하시는 것과 같다. 모름지기 풀 한 포기의 생명을 아꼈던 초계(草繫)의 일화와 거위의 생명을 구하려고 대신 자신의 피를 흘렸던 아주의 일화를 본보기로 삼아야 하겠다.
생사의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먼저 탐욕을 끊고, 애욕을 없애야 한다.
애정은 윤회의 근본이 되고, 정욕은 몸을 받는 인연이 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음탕한 마음을 끊지 못하면 번뇌의 티끌 속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하셨고, "애정이 한 번 얽히게 되면 사람을 끌어다가 죄악의 문에 처넣는다"고 하였다. 애욕에 목마름은 애정이 너무 간절한 상태를 말한다.
자유롭고 걸림이 없는 맑은 지혜는 모두 선정에서 나온다.
어떤 경계나 상황을 당하여서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을 생겨나지 않음(不生)이라 하고, 생겨나지 않는 것을 생각이 없음(無念)이라 하고, 생각이 없는 상태를 해탈이라고 한다.
계율, 선정, 지혜는 하나를 들면 셋이 함께 갖추어져 있는 것이어서 홀로 성립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