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의 물리物理와 천天에 대한 재인식
다산은 물리物理와 천天에 대한 재인식을 통하여 도리道理와 물리物理를 분리하였다. 정약용은 자신의 학문적 포부를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다.
나는 나이 스무 살 때 우주 사이의 일을 모두 취해 일제히 처리하고 일제히 정돈하고 싶었는데, 서른 살 마흔 살이 되어서도 그러한 뜻이 쇠약해지지 않았다. 풍상風霜을 겪은 이래로 백성과 나라에 관계되는 일인 전제田制·관제官制·군제軍制·재부財賦와 같은 일에 대해서는 드디어 살펴 생각할 수 있었고[省念], 경전經傳의 전주箋注를 내는 사이에 오히려 혼잡한 것을 파헤쳐 올바른 이론으로 돌이키고자 하는 바람이 있었다.
정약용의 학문적 중심은 철두철미 유학이었다. 그가 자식들에게 공부 방법을 말하면서 경학經學→사학史學→실학實學(實用之學)의 순차를 제시했던 것은 이와 같은 그의 기본자세를 잘 보여준다. “효제孝悌에 근본을 두고 경사經史·예악禮樂·병농兵農·의약醫藥의 이치를 관통하게 한다”는 그의 교육 방침은 이러한 기본자세에서 도출되었다. 효제孝弟를 근본으로 삼고 예악으로 수식하며 정형政刑으로 보완하고 병농으로 우익을 삼는다는 것이 정약용의 학문 종지였다. 따라서 그의 저술 활동 역시 이와 같은 기본 관점 아래에서 수행되었다.
정약용이 가장 심혈을 기울인 분야는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경학이었다. 그 다음으로는 일반 인민들에게 혜택을 줄 수 있는 ‘경세택민지학經世澤民之學’에 주목하였고, 외적을 방어할 수 있는 ‘관방기용지제關防器用之制’에 대해서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정약용의 학문적 관심은 정통 주자학의 그것과 비교해 볼 때 어떤 차이점을 갖는 것일까?
아마도 그것은 이기론理氣論과 격물치지론格物致知論을 중심으로 이야기될 수 있을 터인데, 여기에서는 양자 사이의 ‘물리物理’ 개념의 차이에 초점을 맞추어 이 문제에 접근해 보기로 한다. 일찍이 정이程頤는 “격물格物은 외물外物인가, 아니면 성분중性分中의 물物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어느 쪽이든) 구애받을 필요가 없다. 대개 눈앞에 있는 것은 물物이 아닌 것이 없다. 물物 하나하나마다 모두 이理가 있으니, 불이 뜨겁고 물이 차가운 까닭으로부터 군신부자君臣父子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이理이다”라고 하였고, 주희朱熹는<대학장구大學章句>에서 격물의 의미를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여 그 지극한 곳에 이르지 않음이 없고자 하는 것[窮至事物之理, 欲其極處無不到也]”이라고 해석하면서 “物은 事와 같다”고 주석을 붙였다.
이처럼 주자학에서 이理는 물리物理와 도리道理를 관통하고 있었고, 따라서 격물의 대상 역시 양자를 포괄하는 것이었다. 대체로 주자학자들은 물物이라는 용어를 사事의 의미까지 포괄하여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그들의 논의 속에 등장하는 물리物理는 한편으로 자연물의 속성, 각종 기술의 원리, 나아가 자연계의 운행 원리라는 의미를 지니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사리事理와 같은 뜻으로 사용되었다. 요컨대 그들이 격물을 통해 달성하고자 하는 이치는 엄밀한 의미의 ‘물리物理’(사물의 이치, 만물의 이치)라기보다는 ‘사리事理’(사실의 이치, 일의 도리, 일의 이치)에 가까웠던 것이다.
이에 비해 정약용이 사용하는 물리物理의 개념은 대체로 자연물의 속성, 기술의 원리, 자연 법칙 등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가 “수화조습水火燥濕은 물리物理의 같은 바이기 때문에 이치를 논하는 자들은 수화조습은 모든 나라에서 두루 합치하지 않음이 없다고 말한다”라고 했을 때의 물리는 수水·화火·조燥·습濕으로 대변되는 자연법칙이었다.
또 “상고의 시대에 개물성무開物成務와 제기이용制器利用은 모름지기 물리物理에 밝고 수리數理에 통해서 사물의 곡직曲直·방면方面·형세形勢를 소상히 살펴 그것에 적합하게 이용했으며[審曲面勢], 백공百工을 불러 이 직책을 맡게 했다.”고 했을 때의 물리는 공장工匠들의 업무와 관계되는 자연물의 이치였다.
금강산金剛山을 대상으로 물리物理를 말한 것이나, 지리학을 ‘격물리格物理’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도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원천原泉이 구덩이에 가득 찬 다음에 전진하여 사해四海에 이른다”라는 맹자의 발언에 대해서 이것이 맹자가 물리에 통철通徹했음을 보여주는 말이라고 했던 것 역시 자연물의 원리로서의 물리를 말한 것이다.
정약용은 계신공구戒愼恐懼의 공부방법으로 궁격窮格과 체험體驗을 제시했는데, 그 내용은 “물리物理를 살펴 그 근본을 탐구하고, 도문학道問學으로 그 근원을 소급하여 곧바로 그 밑바닥까지 궁구하는데 여력을 남기지 않는” 것이었다. 이때 격물의 대상은 그야말로 천지만물이었다. “물리物理를 탐구할 때 일월성신日月星辰의 운행과 천지수화天地水火의 변화, 멀리 만리萬里의 바깥과 멀리 천고千古의 위에 이 마음을 보내 그로 하여금 궁지窮至하게 한다.”라고 하였듯이 물리 탐구의 대상은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무한하게 확대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정약용의 논의에서 주목되는 것은 천하의 물리를 모두 알아내기 어려우며, 이는 요순堯舜과 같은 성인이라도 능히 감당할 수 없는 일이라고 보았다는 점이다. 천하의 사물은 무한히 많기 때문에 수술數術에 정밀한 사람[巧歷]도 그 숫자를 모두 헤아릴 수는 없으며, 박식한 사람도 능히 그 이치에 통달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의 배후에는 인간사회의 원리와 자연계의 법칙을 구분해서 파악하는 관점이 깔려있다. 정약용은 중용中庸 ‘비은장費隱章’의 “그 지극함에 이르러서는 비록 성인聖人이라도 또한 알지 못하는 바가 있으며, …… 비록 성인聖人이라도 또한 능하지 못한 바가 있다.”는 구절에 대해 주희가 ‘孔子問禮問官之類’와 ‘孔子不得位, 堯舜病博施之類’로 주석한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다. 그가 보기에 인간사회의 제도와 예제, 정치운영과 관련된 일체의 내용에 대해 성인이 알지 못하거나 능하지 못하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고, 성인이 알지 못하는 것은 일월日月 운행의 소이연所以然, 성신星辰이 하늘 위에서 움직이는 원리, 대지가 허공에 떠 있으면서도 안정적인 이유 등과 같은 자연계의 이치와 관련된 내용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