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우리는 유대인들과 달라야합니다. 그들은 사람과 금권의 힘으로 세계경제와 정치의 막후에서 그들의 이익을 위해 로비와 압력을 행사하지만 천하만민이 모두 동의하는 당위성은 없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가진 능력과 +@ 천하만민이 동의하는 당위성을 갖고 해야 합니다.
허황된 이야기라고요?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그 사람은 상제님께서 던져주신 성사재인의 의미를 스스로 축소하는 소극적인 노예신앙인입니다. 개벽의 공포와 늘 시간에 쫒기는 사람들이 무슨 일인들 제대로 하겠습니까?
인생공부는 초복 중복의 과정을 거치며 끝낸 셈치고, 세상을 요리할 뱃심으로 개벽에 대한 공포는 발로 걷어차버리고 이제는 성사재인할수 있는 배포와 기국을 키우는일만 남았습니다. 그것이 말복의 기운이며 말복의 혁명도수입니다.
성사재인은 판안과 판밖의 난국을 해결하는 말복도수 혁명의 키포인트입니다. 각자가 주체적인 주인, 주인공이 되는것입니다.
도성덕립, 주문많이 읽고, 성금잘내고 도성덕립! 착각하지 마세요. 그렇게 해서 후천가면 그렇게 하지못해 후천못가고 죽은 원혼들의 원망은 오만년동안 어찌할겁니까?
나는 삼생의 인연이 있어 그랬고 너는 삼생의 인연이 없어 그럤다고 하면, 그 원혼이 네! 하고 물러갈까요!
인생도 그렇고 민족이나 한 국가의 대계도 대국적인 흐름과 과정이 있습니다. 그 흐름의 과정에는 반드시 주기적인 고난과 역경의 파동이 있습니다.
도운에도 초복,중복,말복 세살림의 과정이 있지 않습니까?
한 시기의 변화를 매듭지을때마다 우리들은 스스로 성숙해져야하는데
그 과정이 참으로 지난하고 험난한것입니다.
한 사람의 평생을 일관한 의지가 그 과정을 만들어 오고 지금의 우리들이 이 자리에 서있는것입니다. 그 한 사람이 태사부님이십니다. 지금 말복의 때를 만나 우리들은 의식의 혁명적인 환골탈태를 해야 합니다. 말복의 기운과 말복의 의미에 대해서는 그동안 향수님께서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로 절절하게 자세히 일러주셨다고 봅니다.
제가 많이 배우지를 못해 좀더 조리있게 말은 못하고 비유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31년동안 신앙하신 윤ㅊㄹ 성도님을 비롯한 증산도 성도님들께 질문을 드립니다. 우리는 한쪽을 선택해야합니다.
한쪽은 천하의 백성들,지금으로 말하면 50억인류가 있습니다.
한쪽은 상제님이 계십니다.태사부님,털보님도 있습니다.
우리는 동고동락해야 할 한쪽을 택해야 하며, 단 50억인류가 서있는곳을 택할땐 개벽때 죽을수도 있고 후천을 못갈수도 있습니다.
어느쪽을 택하시겠습니까?
저는 선천이나 후천이나 사람사는 세상의 근본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천에는 위정자들이 말로는 백성이 근본이라고 말은 했지만
인의의 도정을 펼친 몇몇의 성군을 빼고는 대다수의 위정자와 말단벼슬아치들까지 제도적으로 교묘한 사탕발림과 위압으로 자신의 권력과 사욕을 위해 백성들의 삶을 농락하고 유린한 것이 선천역사의 과정입니다.
그들의 핑계가 늘 그랬습니다. 위에서 내리신 왕명이다. 너는 왕명을 거역하느냐?
또한 왕명을 받드는 나를 거역하느냐? 그렇게 그들은 아래로 백성의 삶은 전혀 안중에도 없는 몰염치로, 위로만 위로만 왕명의 핑계를 들어 사리사욕을 채웠던것입니다. 그런 악독한 세상이라 다산 정약용선생과 같은 목민관이 오히려 쫒겨다니며(유배) 살지 않았습니까!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양심이 있으면, 삶의 기본의식이 아래로 향해야지, 위로만 가면 안됩니다. 國亡於忠의 교훈을 되새겨야 합니다.
왜 증산도에는 불교의 지장보살같은 사람이 나오면 안됩니까!
죽음의 공포(개벽의 공포)에 허둥댔던 젊은 시절의 경허가 깨친 생사의 의미를
우리는 외면해도 됩니까?
저는 윤ㅊㄹ 교수신도회장님 본인의 봉청수, 2500번빠진태을주백만독 성금이야기를 보면서 과연 증산도의 수준이, 50억인류의 틈바구니에서 증산도라는 저들만의 폐쇄된 옷을 입고 단지 살기위해 몸부림치는 모습, 이것인가? 이것이 증산도의 암담한 현실임을 처절하게 느낍니다.
신입신도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볼때 그런 신앙수기는 아직 껄이 벗겨지지않은 신입신도가 해야 할 신앙수기입니다.
이 모든것이 털보님의 교육이라는 미명하에 하늘을 기망하고 스스로 성숙하고자 하는 신도들의 의지를 원천적으로 차단시키며 만들어낸 일방적이고 편중된 교육의 작품으로 초입신도에서부터 31년 신앙경력의 신도까지 붕어빵 찍어내듯 영혼없는 신앙관(개벽의 공포)에 세뇌된 결과입니다. 암담하고 암담할뿐입니다.
저는 털보님의 교육이 소크라테스가 받아마신 독배의 잔이라고 생각합니다.
너 자신을 알라! 고 한 소크라테스는 외부에서 들어오는 주입적,관습적인 지혜를 거부하고 언제나 이성에 기초한 보편적인 지혜를 사랑하고 갈구한 사람입니다.
털보의 개벽에만 초점이 맞추어진 생사관교육은 지혜와는 거리가 먼, 광기의 선동에 지나지않습니다. 그러나 순수한 신도들은 그 독배를 기꺼이 마셨습니다.
이제 독배의 독에 서서히 죽어가는 개구리가 되지 말고, 그 치명적인 독을 내 자신의 지혜와 성숙으로 다져지고 내적으로 단련시킨 영약으로 바꾸어야합니다. 그 몫은 오로지 신도 개개인이 내가 나의 주인임을 자각하여 스스로 환골탈태해야 합니다.
증산도가 신앙의 패러다임이 혁명되지 않으면 신앙 개개인적으로 선천의 구태와 악습을 벗어나지못하는것이며 지금의 털보께서 받은 사명은 그것을 이루어낼수가 없습니다.
“털보가 저렇게 함으로써 혁명가님이 출현하게 되어있는 것이다. 혁명가님이 욕심을 갖고 그런다고 하지만 정작 욕심을 갖고 있는 것은 자기 역량과 기국을 알지 못하고 실정을 일삼고 있는 역사가 털보인 것이다.” -아사달-
혁명가는 욕심이, 사욕이 없는 분입니다. 밀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판안의 성도님들이 지장보살과 같은 지고한 뜻을 품고 신앙의식의 패러다임을 전환할때 누가 욕심이 있고 없는지를 여실히 판단하게 될것입니다. 생즉사 사즉사
(저는 털보님을 전면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털보님의 사명대로 함께 지내온 지난 시절을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그 역시 나 자신에 의해, 나 자신에게 충실했던 시간이었기 때문에 아름답고 소중한 시간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또한 증산도 간부중에 대다수가 개벽몰이와 실적에 급급하여 그것 자체가 사욕에 눈 먼 개인신앙인이 되어 있으나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고, 그 와중에도 가뭄에 콩나듯 묵묵히 자신의 인격을 키워나가는 분들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