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가 와도 꿈쩍 않을 호방한 기세를
보이면서도 정작 떨어지는 나뭇잎 하나에는
어쩔 줄 몰라했던 경허. 삶의 바닥을 치며
성과 속이 하나됨을 온 몸으로 확인시켜주고,
큰 새로 유유히 날아간 인간 경허의 참모습에 관한 글.
치열한 구도(求道) 끝에 얻은 깨달음
1846년, 전주에서 태어나 ‘동욱(東旭)’으로 불렸던 경허는 9살 어린 나이에 과천 청계사(淸溪寺)에서 머리를 깎았다. 형인 태허(泰虛) 또한 마곡사에서 수행하던 터라 자연스럽게 출가(出家)한 경허는 ‘계허(桂虛)’ 스님 밑에서 5년을 보냈고, 14살에는 계룡산 동학사(東鶴寺)로 가 당시 조선 제일의 강사(講師)로 명성을 떨치던 ‘만화(萬化)’ 스님으로부터 불교 경전은 물론 유가와 노장사상까지 두루 배웠다.
유달리 총명했던 경허는 23살 젊은 나이에 스승인 만화의 뒤를 이어 강당에서 경론을 강의하는 강백(講伯- 강당에서 경론을 강의하는 승려)으로 추대됐다.
1879년, 불가에 처음 입문한 자신을 친자식처럼 돌봐주던 옛 스승, ‘계허’를 만나러 길을 나선 경허는 폭풍우가 몰아치던 밤. 콜레라에 걸려 줄초상을 당한 천안의 한 마을에서 마을 사람들이 죽어나간 시체들을 보면서 죽음의 그림자와 마주치자 극심한 공포를 느꼈다.
괴질 콜레라(虎列刺)에 의해 마을마다 시체가 즐비하고 자신도 어쩌면 죽을 수 있다는 두려움에 매우 놀라 경허는 한밤중에 동네를 도망치듯 빠져나와
“생과 사는 뜬구름 같은 것, 생과 사는 둘이 아니다”라고 가르치던 불교의 지식으로서 생사의 갈림길에서는 모든 것이 종이 위에 쓰여진 글일 뿐임을 깨달은 경허는
그 길로 동학사로 되돌아와 입으로만 경전을 떠벌였던 자신이 부끄럽다며 11년 동안이나 자신이 강주였던 강원을 폐쇄하고 깨달음을 위해 ‘여사미거 마사도래(驢事未去 馬事到來)’라는 공안(公案)을 들고 용맹정진 참선에 들어간다.
3개월간의 면벽(面壁) 끝에 ‘소가 되더라도 콧구멍 없는 소가 되어야 한다’.
즉 생(生)과 사(死)를 초월한 존재, 모든 편견과 경계를 넘어선 본연의 모습을 추구해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 뒤 천장암(天藏庵)으로 옮겨 깨달음 뒤의 공부를 계속하던 경허는 1884년 만공(滿空), 혜월(慧月), 수월(水月) 등 삼대 제자를 지도해 서산대사 이후 끊어졌던 선맥(禪脈)을 다시 이었고, 1886년에는 충청남도 일대의 개심사(開心寺)와 부석사(浮石寺)를 왕래하며 후학 지도와 교화 활동을 하면서 크게 선풍(禪風)을 떨쳤다.
또 범어사에 영남 최초의 선원을 개설하는 등 전국 곳곳에 선원을 만들고, 매년 여름과 겨울, 두 차례 승려가 일정 기간 한 곳에 머무르면서 수행하는 ‘안거(安居)’의 전통을 회복시키는 등 조선 시대를 지나면서 지리멸렬하던 한국의 선불교를 중흥시켰다.
그러나 한국 선불교의 중흥조로 평가받는 경허는 관점과 시각에 따라 상반된 평가를 받기도 한다.
경허의 기행… 그것은 깨달음이었다
사실 경허의 삶은 파격의 연속이었다.
제자와 길을 가다가 느닷없이 아낙에게 입맞춤을 하고 술을 마시는 등 기행을 일삼은 것이다.
이를 두고 세상에서는 경허를 파계승이라 불렀지만 이러한 행동은 좋지 않은 일을 할 때, 거기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가를 보는 수행의 한 방편으로 스스로 선문의 이단자로 외면당하는 가시밭길을 택한 경허는 평생 파격을 통해 명분과 사상의 틀에 안주하기를 거부했고, 선(禪)의 생활화, 일상화를 모색했다.
실제로 경허는 말년에 평안북도와 함경남도로 자취를 감춘 뒤 머리를 기르고 서당을 열어 후학을 가르치다가 1912년, 소박한 촌로(村老)로 세상을 하직했다.
하지만 경허의 문하에서 배출된 고승들은 1954년 이후 불교 정화 운동을 주도하며 조선 불교의 봉건적 잔재를 떨쳐내고 현대 한국 불교를 새롭게 써내려갔으니 구한말 풍운의 조선 땅에 홀연히 나타나 투철한 깨달음으로 꺼져 가는 선(禪)의 등불을 밝힌 경허 스님.
그는 진흙밭에 구르면서도 진흙에 물들지 않는 한 떨기 연꽃이었다.
경허 스님은 20대에 동학사(東鶴寺)에서 대강사로 이름을 떨친 대강백이었다. 스님은 경(經)은 물론이고 〈장자〉(莊子) 곧 〈남화경〉(南華經)까지 숙독(熟讀)해 내ㆍ외전을 두루 섭렵하고 있었다.
동학사에 대강백이 머문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동학사 강원은 사방에서 구름같이 몰려드는 학인들로 초만원을 이뤘다.1879년 여름, 강사 8년으로 30대에 접어든 경허 스님이 옛 은사 계허(桂虛) 스님을 뵈려고 경기 안양 근교 청계사(淸溪寺)로 향했다.
길을 가던 중 천안 근처에서 였다. 경허 스님은 갑작스런 뇌성 벽력과 함께 억수같이 퍼붓는 소낙비를 만나 어느 초가 처마 밑에 있어야 했다. 얼마 후 집 주인이 나타났다.
“송장 치우기에 진력이 났는데 누가 또 와 있담. 죽더라도 내 집에선 나가 죽으시오, 어서!”
혀를 차며 다짜고짜 스님의 등을 밀어내 그 집 멀리로 내 쫓았다. 경허 스님은 하는 수 없이 다른 집으로 가 비를 피하려 했지만 이집도 마찬가지로 밖으로 내 모는 게 아닌가.
“괴질로 사람이 다 죽어가는 판인데 뭐 하러 여기 왔소? 여기까지 왔으니 스님도 살아가긴 어렵겠구려, 제발 이 집만은 떠나 주시오.”
집집마다 호열자(콜레라)에 걸려 쓰러진 주검들이 즐비했다. 당시 콜레라는 전국적으로 불치의 전염병이었다. 세찬 비바람 속에 그 촌락을 벗어난 경허 스님은 심한 현기증으로 몸을 가누기조차 어려웠다.‘나 또한 전염병에 걸리면 죽지 않을 수 없다...
...글을 올리는데 자꾸만 잘리네요...글자크기조절도 안먹히고...할수없이 2편으로 올립니다. 뭐이가 잘못된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