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체에서 나오는 악의 문제에 대한 고찰 -정약용의 욕망 구분과 욕망 간의 관계 문제를 중심으로
허민 서울대학교 철학과 학부과정
영체에서 나오는 악의 문제
송의 신유학자들은 인간의 순선한 본성이 형이상학적이고 윤리법칙적 인 리理라고 보았다. 특히 대표적인 송의 신유학자인 주희는 사람과 사물이 똑같은 리를 가진다고 주장하고 사람과 동물 사이의 윤리적인 능력 차이를 태어날 적에 품부 받은 기의 차이에서 찾는다.
반면 정약용은 주희와는 달리 인간의 본성은 인간과 여타의 사물들을 구분시켜주는 성질이라고 본다. 사물들은 그 본성에서부터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약용이 생각하는 인간만의 본성이란 선한 것을 좋아하고 악한 것을 싫어하는 기호 혹은 욕망뿐이다. 즉 정약용과 주희 모두 성선설이 라는 입장을 공유하지만 주희가 본성을 만물이 공유하는 보편자로 설정 하는데 비해, 정약용은 본성을 종차를 드러내는 것으로 설정한다. 나아가 주희는 본성을 마음의 본체로 보지만 정약용은 인간의 본 성을 ‘심心 ’ ‘신神’ ‘영靈’ ‘영체’ ‘영지靈知’ ‘혼魂’ ‘대체大體’ 등으로 표현되는 마음의 여러 요소 중 하나라고 본다. 정약용이 마음 혹은 영체 의 요소로 거론하는 것은 저작별로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세 가지이다 . 심경밀험에선 1. 선을 좋아하고 악을 싫어하는 본성 2.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는 권형權衡 3. 선하기는 어렵고 악하기는 쉬운 행사行 事가 거론된다.
말년 저술인 '매씨서평梅氏書平'에선 1. 선을 좋아하는 본성 2. 선을 행할 수도 악을 행할 수도 있는 재才 3. 선하기는 어렵고 악하기는 쉬운 세勢가 거론된다.
이처럼 정약용이 본성을 마음의 여러 요소 중 하나로 보는 것에는 마음의 나머지 요소들이 윤리적 실천에 있어 중요하다는 견해가 담겨있다. 권형과 재란 자유로운 판단·선택의 능력과 선택한 것을 실천하는 능력으로 권형과 재에 대한 정약용의 주장에는 선악이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기의 청탁이 아니라 윤리적 주체의 자유로운 선택과 행위에 의해 결정된다는 관점이 반영되어 있다. 한편 행사와 세는 명예와 이익 에 대한 유혹 등 악을 저지르게 만드는 조건들로 성인조차 피해갈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영체의 세 번째 요소 역시 윤리적 주체의 어려운 환경을 강조하여 올바른 선택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측면을 가진다.
우리의 영체에 관해 그 기호를 논하면 선을 즐거워하고 악을 부끄러워하지
만 그 권형을 논하면 선을 행할 수도 악을 행할 수도 있어 위태롭고 불안
하니 어찌 영체인 마음이 절대적으로 선하여 악이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불씨는 본연을 숭상하면서 육체에 의한 새로운 훈습을 깊이 탓하였다 그
마음은 새로운 훈습이 없다면 전혀 악을 저지를 이치가 없다고 여겼다 그
런데 사람의 죄악은 대개 식색食色과 안일의 욕구에서 유래한 것으로 진
정 형기形氣가 시킨 것이나 혹 커다란 악은 자기 마음에서 일어나되 식색
이나 안일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경우도 있다 이와 같다면 어찌 형기를 탓
할 수 있겠는가 …… 그 마음이 형기의 유익함을 구하고자 한 것도 아니
며 교만하고 오만스러운 병도 형기로부터 나온 것도 아니다 …… 기분 때
문에 남을 죽인 자들은 어떤 경우는 음식 색 그리고 안일함과는 전혀 관
계가 없었다 가령 ‘이놈’ ‘저놈’이라고 말하는 경우 갑자기 화가 나서 바로
남을 죽이는 경우가 매우 많았다 이와 같은 경우는 육체形軀와 전혀 관
계가 없으니 어찌 매번 육체를 탓할 수 있겠는가 …… 귀신에서도 선신과
악귀가 있다 …… 귀신은 본래 육체가 없으나 이처럼 선악이 있는 것이다
이른바 ‘본연의 체’라 하여 또한 어떻게 악할 수 있는 이치가 없다 할 수 있 겠는가
그런데 순선한 본성이 본체로서의 마음의 요소 중 하나일 뿐이라는 주장은 본체가 그것의 다른 요소들인 권형과 행사에 따라 악해질 수 있다는 주장으로도 연결된다. 그래서 정약용은 심경밀험에서 불교 등 의 관점을 비판하면서 본체 마음에도 악할 수 있는 이치가 있다고 말하면서 마음에는 권형 등의 다른 요소도 있음을 강조한다. 이때 정약용 이 본체에도 악한 이치가 있음을 뒷받침하기 위해 거론하는 것이 바로 영체에서 나오는 악이다.
즉 1. 사람들은 명예욕·질투심·시기심·교만 함에서 타인을 모욕하고 악을 저지른다. 이런 유형의 악들은 몸으로부터 나오지出 않고 영체에서 나왔다 . 2. 귀신은 기로 이루어져 있지 않 다 하지만 귀신에도 선신과 악귀가 있다. 그러므로 악귀의 악은 영체에서 나온 악이다. 그렇다면 영체에서 나온 악은 권형과 행사 중 마음의 어떤 요소를 강조하는 장치일까 영체에서 나온 악에 관한 논의가 권형을 강조하는 것 이라고 해석한 사람으로는 백민정이 있다.
백민정은 정약용이 영체에서 나온 악을 통해 모든 악의 기원을 선천적으로 부여받은 육체에 돌리고 본체로서의 마음은 순선하다고 보는 견해를 비판하고 윤리적인 문제에 있어 선악을 선택·반성하는 주체의 의지를 강조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백민정이 지적하고 있듯이 “만약 선천적으로 부여받은 육체 만이 전적으로 악의 기원이라면 선과 악이란 것은 윤리학적 문제가 아니라 잘해야 생물학의 문제 정도로 전락하게 될 것” 이기 때문이다. 한편 금장태 역시 그 논의가 궁극적으로는 “선·악이 인간 신체적 기질에 귀속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지향하는 의지의 결단에 따르는 것임을 확인하고 있 는 것이라고 본다.
글쓴이는 영체에서 나온 악에 관한 논의가 권형의 강조와 연결된다는 해석 그 자체에 반대하진 않는다. 하지만 글쓴이는 영체에서 나온 악에 대한 논의에는 권형의 강조라고 그것을 단순히 정리했을 때엔 잘 포착되지 않은 인간의 욕망에 관한 흥미로운 주장이 함축되어 있다고 본다. 영체에서 나온 악에 관한 논의가 주체의 선택 능력에만 초점을 맞춘 것이라면 악을 저지르게 만든 사욕의 원천까지 정약용이 밝힐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용구에서 정약용은 몸의 유익함을 구했 다는 점에서 대부분의 악은 진정 형기가 시켰음使을 인정하면서도 형기와 무관한 악이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형기와 무관한 악이 있다는 주장에서 강조되어야 할 점은 악을 낳은 욕망이 몸의 유익함과 무관 하다는 것이어야 하겠다.
지금 사람들이 순수하게 허령한 것은 의리의 성이요 형기에서 말미암은
것은 기질氣質의 성이라고 여겨 온갖 죄악들은 모두 식색과 안일에서 나
오는 것이기에 모든 악은 형기로 돌리고 허령불매한 본체는 모든 미를 구
비하고 조금도 악이 없다고 인식하고 있는데 절대로 그렇지 않다 허령한
것이 악을 하지 못한다면 저 무형의 귀신에 또한 어떻게 명신과 악귀가 있
을 수 있겠는가 식색과 안일의 욕심이 모두 형기에서 나오지만 무릇 교
만하고 높은 체 하는 죄는 허령한 쪽에서 나오니 허령한 것은 악을 행할
리가 없다고 말할 수 없다 사람들 중에 도학이나 문장을 가지고 스스로
높은 체하는 사람이 있을 경우 그를 칭찬하면 좋아하고 비난하면 성낸다.
이것이 형기와 어떤 관 계가 있는가. 실제로 정약용은 '맹자요의'에서 식색과 안일의 욕심은 형기에서 나온 것이지만 교만한 사람의 욕심은 형기와는 다른 허령한 영체에서 나온다고 주장한다. 이는 정약용이 사람의 욕심이 형기와 영체 몸과 마음이라는 상이한 근원에서 발생한다고 봤음을 의미한다 . 그런데 정약용은 앞서 '매씨서평' 등에서 보았듯 행사 혹은 세의 요소들로 식욕· 색욕 등의 욕망들도 거론하고 있었다. 따라서 영체에서 나온 악에 대한 정약용의 주장은 단지 권형에 대한 강조 뿐만이 아니라 행사 혹은 세의 이유를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