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전후의 대중가요와 예술(가요, 악단, 영화)
유행가라는 명칭이 대중가요로 바뀌어 불리기 시작한 것은 1945년 해방과 함께 였습니다. 해방과 더불어 널리 인구에 회자된 말이 인민대중, 민중, 소시민, 서민대중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반영하여 대중가요란 말이 자연스레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대중가요는 일본 가요의 절대적 영향에서 미국의 재즈와 팝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는데 그 결과 대중음악의 리듬 패턴이 다양해졌습니다. 그 좋은 예가 맘보일 겁니다. 맘보는 그 강렬한 리듬 때문에 민요 가락에도 수용되어 도라지 맘보, 아리랑 맘보, 심지어 3박자 맘보까지 등장했던 것입니다.
일제시기 대중가요는 가락이야 어떻든 가사에서만은 그래도 피압박민족의 설움을 직, 간접적으로 표현하여 대중의 심금에 와 닿았으며, 가사를 통해 은연중에 저항정신까지 발산하기도 했습니다. 일제시기 대중가요에 주로 등장하는 가사들은 고향, 방황, 나그네, 타국 같은 것들입니다. 대중가요는 시대상황과 사람들의 정서를 대변하는 특징을 갖고 있었습니다.
해방과 함께 대중가요는 민족의 일체감, 해방의 환희, 미래에 대한 희망 등을 담은 밝고 명랑한 노래가 중심으로 자리잡기 시작했습니다. 해방가요 1호로 알려진 [4대문을 열어라](강용환 곡, 고려성 작사)도 그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4대문을 열어라. 안경을 쳐라
삼천리 곳곳마다 물결치는 이 기쁨
민족의 꽃은 다시 피었네
영광된 내 조국 영원무궁하리라(1절)
[4대문을 열어라]는 미군의 진주를 환영하기 위해 만든 노래로 알려져 있는데, 그 가사가 상당히 희망적입니다. 이밖에도 [럭키 서울], [고향만리], [서울야곡], [신라의 달밤] 같은 노래들이 뒤를 이었습니다.
당시 가장 유행한 가요로는 이인권이 부른 [귀국선](1945년, 손로원 작사, 이재호 작곡), 현인이 부른 [비 내리는 고모령](1946년, 호동아작사, 박시춘 작곡), 남인수가 부른 [가거라 38선](이부풍작사, 박시춘 작곡)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해방 직후 일본인들이 철수하면서 빈약했던 시설들조차 대부분 가져가거나 폐기해 한동안 레코드 취입은 어렸습니다. 그래서 대부부의 연예인들이 악극단에 소속되어 직접 무대에서 대중을 상대로 춤추며 노래 부르고 희극 등을 보여주었습니다.
당시 이름을 날리던 악극단으로는 김해송악극단, 희망악극단, 무궁화악극단, 조선악극단, 반도악극단, 백조가극단, 태평양가극단, CMC악단, KPK악단, 백민악극단, 빅토리가극단, 악극사, 악극단'5향', 새별악극단, 고복수악극단, 가극단신세계, 손목인악단, 박시춘과 부귀악단, 청춘부대, 국도악극단 등이 있었습니다.
가수와 악극단멤버들로는 손목인, 남인수, 김정구, 장세정, 이난영, 박시춘, 김해송, 김부해, 양석천, 김민자, 주애선, 신카나리아, 윤소남, 진방남, 고운봉, 현인, 백설희, 고복수, 백년설, 황문평, 황금심 등이 있었습니다. 악극은 노래와 춤과 코미디가 하나로 어우러진 종합예술이었지만, 당시로서는 이것이 유일한 장르였습니다.
분단의 상흔은 대중문화에도 어김없이 나타났습니다. 가수 채규엽, 김선초, 작곡가 이면상 등이 49년에 월북하였고, 작곡가 조명암은 48년에 월북했습니다. 또한 김해송은 전쟁중에 납북되었습니다. 이 가운데 이면상은 북한의 3대 가극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피바다]를 작곡했으며, 1953년 조선작곡가연맹위원장, 57년 평양음악대학 학장, 61년 음악가동맹위원장, 62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과 노동당 중앙위원 등을 역임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조명암도 1982년까지 문예총 부위원장을 맡았다고 하는데, 채규엽, 김선초, 김해송 등의 활동은 거의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영화계도 다른 문화부문처럼 좌익과 우익으로 나누어졌습니다. 우익 측에서는 [조선영화건설본부]를 만들었습니다. 여기에는 윤백남 본부장과 안석영, 방한준, 양세웅, 이병일, 김학성 등의 감독, 시나리오 작가, 촬영, 편집 분야의 스태프진이 참여했습니다. 이 단체는 1945년 미군 정청으로부터 뉴스영화의 제작 촬영에 대한 독점권을 부여받았습니다.
한편 좌익 측에서는 [조선영화동맹]을 조직하고 시사, 뉴스, 영화를 제작했습니다. 이때 만들어진 [해방뉴-쓰]는 1보에서 10보까지 제작 되었는데, 1보에서 5보까지는 일제시기 중국을 무대로 활약한 조선 의용군들의 활동을 기록한 영화로서 조선문화단체 총연맹의 문화공작단에 의해 전국 각지에서 상영됐습니다. 이 영화를 만든 김정혁, 박기채, 이명우 등은 전쟁을 전후하여 모두 월북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부터 48년 8월 15일까지 해방정국 3년 동안에 만들어진 영화들 가운데는 독립운동관계물, 계몽물이 많은 비중을 차지했습니다. 그런데 뚜렷한 정치적 입장을 가진 영화는 조선영화동맹과 미군정청이 제작한 두 가지가 있습니다. 물론 이것들은 대부분 기록영화였고, 극영화는 거의 제작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안종화, 이규환, 윤봉춘 등 열다섯명의 감독이 모여 만든 [조선영화구락부]는 극 영화를 제작하면서도 독립운동에 관련된 영화를 주로 만들었습니다. [윤봉길의사], [삼일 혁명기], [유관순] 등이 그런 작품들입니다.
해방정국에서 흥행에 성공한 영화로는 [자유만세](최인규 감독), [똘똘이의 모험](이규환 감독), [검사와 여선생](윤대용 감독), [푸른 언덕](김정환 감독, 최초의 뮤지컬 영화) 등이 있습니다. 특히 독립운동가의 생애를 그린 [자유만세]는 해방 후 만들어진 본격적인 극영화로서 '광복영화의 꽃'으로 한국 영화의 첫걸음이 되었습니다. [자유만세]는 고려영화사의 첫 작품으로 제작자 최완규는 최인규 감독의 친형입니다. 이 영화의 제작비는 당시 돈 20만원이 들었다고 하며 전창근이 각본과 주연을 맡고, 황희려, 유계선, 전택이 등이 출연했습니다.
이밖에도 당시 만들어진 영화로는 [불멸의 밀사](김영순 감독), [민족의 성벽](전창근 감독), [민족의 새벽](이규환 감독) 등이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영화계에서 활약한 배우로는 전창근, 전택이, 김승호, 한은진, 유계선, 주선태, 황정순, 조미령, 주증녀, 최지애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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