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상16<진서장秦誓章>
마음 쓰는 법
1 하루는 형렬에게 서전書傳의 진서장秦誓章을 외워 주시며 “잘 기억하라.” 하시니 이러하니라.
2 여유일개신如有一介臣이 단단의무타기斷斷猗無他技나 기심其心이 휴휴언休休焉한대 기여유용其如有容이라 인지유기人之有技를 약기유지若己有之하며 인지언성人之彦聖을 기심호지其心好之하되 불시여자기구출不啻如自其口出하면 시능용지是能容之라 이보아자손여민以保我子孫黎民이니 역직유리재亦職有利哉인저
만일 한 신하가 오직 정성스럽고 한결같을 뿐 다른 재주는 없으나, 그 마음이 착하고 아름다워 포용함이 있는 듯하여, 남이 가진 재주를 자기가 가진 것처럼 아끼고 남의 훌륭함과 통달함을 마음으로 좋아하되 비단 말뿐이 아니라면, 이는 남을 포용하는 것이니라.나의 자손과 백성을 보전할 것이니 또한 이롭다 할 것이니라.
3 인지유기人之有技를 모질이오지冒疾而惡之하며 인지언성人之彦聖을 이위지而違之하여 비부달俾不達하면 시불능용是不能容이라 이불능보아자손여민以不能保我子孫黎民이니 역왈태재亦曰殆哉인저
남이 가진 재주를 시기하고 미워하여, 남의 훌륭함과 통달함을 드러내지 못하게 한다면, 이는 포용하지 못하는 것이니라. 나의 자손과 백성을 보전하지 못하리니 또한 위태롭다 할 것이니라.
4 상제님께서 이르시기를 “나라의 흥망(興亡)이 이 두 마음에 달려 있고
5 신하로서 충성하느냐 반역하느냐가 이 두 마음에 달렸느니라.” 하시고
6 또 말씀하시기를 “천하사의 성패가 또한 이 두 마음에 매여 있느니라.” 하시니라. (증산도 道典 8:63)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상제님께서 말씀하신 서전書傳을 열어 진서장秦誓章을 우선 살펴보아야 한다. 그러나 도전에서 이 말씀의 출전인 서전書傳의 진서장秦誓章에 대해 밝혀놓은 주석은 너무 심플하여 볼품이 없다. 주석이라 하기보다는 스쳐지나가는 하나의 풍경에 대한 설명 같다.
<진서장. 『서경(書經)』의 마지막 편장. 이 구절은 『대학』 전10장에도 인용돼 있다.>
왜 이렇게 진서장의 설명을 간단히 끝내 벼렸을까. 갑오와 황극을 하나로 엮을 만한 어떤 근거도 주어지지 않아 소홀이 다룬 것인가. 현대의 대학 입시생 모양 영수 외에 윤리 교과서 같은 것은 볼 시간이 없듯이 인사의 주인을 못 박는 말씀이 아니므로 가치를 두고 자세히 들여다 볼 시간이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저 그런 도덕적 말씀이므로 주석이 필요 없다고 생각한 도덕 불감증 때문인가.
요즘 천륜을 파괴하는, 신도들의 혈성을 물 쓰듯 로펌에 퍼다 바치는, 지극히 소모적인 사위님의 소송 전을 바라보면 도덕 불감증은 도전을 편찬하던 당시에도 팽배해 있었다는 것을 추측해 볼 수 있다. 범인이 십년 만에 잡혔음에도 불구하고 천만 다행스럽게 아직 세상에 널리 회자되지 않고 있는 홍씨 사건도 이런 도덕불감증이라는 병통 위에서 벌어진 일이리라. 어디 이뿐인가. 혁명초기 담론시절, 대마도님이 증언한 여하한 폭행사건 등은 신앙인들을 걷잡을 수 없는 충격에 빠뜨리고 있다. 그래서 옛날 공자께서는 학문이라는 것은 효제孝悌를 이룬 이후에 해야 하는 것이라고 주창하였는지 모른다.
<子曰자왈: "弟子제자, 入則孝입즉효, 出則弟출즉제, 謹而信근이신, 汎愛衆而親仁범애중이친인, 行有餘力행유여력, 則以學文즉이학문."(論語논어)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젊은 사람은 집에 들어가면 부모님께 효성스럽고 밖으로 나가면 윗사람에게 공경스러우며, 언행이 근엄하고 믿음성이 있으며, 널리 여러 사람을 사랑하고 인을 가까이하되, 이렇게 하고도 남는 힘이 있으면 그 힘으로 글을 배우는 법이다.">
다산 정약용 선생도 글공부의 바탕에 대해서 이렇게 얘기하고 있다. 다음은 다산이 두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중 일부를 옮겨온 것이다.
<독서는 무엇보다 먼저 바탕을 세워야 한다. 바탕根基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 배움에 뜻을 두지 않고는 능해 책을 읽을 수가 없다. 배움에 뜻을 두었다면 반드시 먼저 바탕을 세워야 한다. 그렇다면 바탕이란 무엇을 말하겠느냐? 효제孝悌, 즉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로운 것일 뿐이다. 모름지기 먼저 힘껏 효제를 행하여 바탕을 세운다면 학문은 저절로 무젖어들게 마련이다. 학문이 내게 무젖어들고 나면 독서는 모름지기 별도의 단계를 강구하지 않아도 된다.(다산선생 지식경영법)>
하물며 상제님 대도에 임하는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가. 효제를 바탕으로 삼아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상제님 친필이 아니라고 결론 내렸다는 병풍서에도 이런 효제孝悌에 대한 말씀이 등장한다. 이것이 곧 정심이다.
<其略기략왈 戒爾學立身계이학입신하노니 莫若先孝悌막약선효제니라 怡怡奉親長이이봉친장하여 不敢生驕불감생교니라.(증산도 도전)
너에게 입신의 배움을 경계하노니 먼저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는 것만 같지 못하니라. 화평하고 기쁜 마음으로 부모와 어른들을 잘 받들어 감히 교만하고 함부로 하는 마음을 일으키니 말지어다.>
바탕이 잘못되었으니 일류대를 나온들 소용없는 일이다. 형제간에 싸움을 붙여 천륜을 파괴하는 모습은 효제의 바탕으로 세우지 않고 욕심에 의해 학문의 단계로 들어선 까닭이다. 법으로 천륜을 옭아매려는 꿈을 꾸는 판 안의 서나궁은 이미 종교성을 상실하였다. 사람이 인간성을 상실하면 인간이 아니듯 종교가 종교성을 상실하면 종교가 아닌 것이다. 이 단체에 상실된 종교성을 회복하여 대도의 진법을 열려한다면 오직 혁명만이 답이다.
각설하고 상제님께서는 분명 ‘서경書經의 진서장秦誓章’이라 하지 않고 ‘서전書傳의 진서장秦誓章’이라 하시며 이 말씀을 외워주신 것은 서전의 내용을 참고하라는 암묵적인 뜻이 내포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 말씀만 쏙 뽑아 쓰기만 할 것 같았으면 굳이 서전을 언급할 필요성이 없겠기 때문이다. 상제님께서 이 말씀을 외워주시면서 ‘서전書傳의 진서장’이라고 ‘서전書傳’을 언급하신 것은 주자의 제자 무이 채침이 밝혀놓은 진서장의 탄생 배경에 대해 인정해주신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서전書傳을 열면 첫 장에 채침이 쓴 서문을 만난다. 이른바 우리가 암송하고 있는 서전서문이다. 상제님께서 “나의 조정朝廷에 설 사람은 서전서문書傳序文을 많이 읽어야 하느니라”고 말씀하신 바 있는 명문 중의 명문이다. “차생어수천재지하且生於數千載之下하여 이욕강명어수천재지전而欲講明於數千載之前하니 역이난의亦已難矣라”는 구절은 ‘천지에 청수를 떠 놓고 읽을 만한 글’이라고 칭찬해 주신바 있다. 수천 년 뒤에 태어난 채침이 어려움을 무릅쓰고 수천 년 전의 일을 밝혀놓은 이 서전의 대미가 상제님께서 읽어주신 진서장이다. 채침이 밝혀놓은 진서장의 탄생배경을 보자.
<左傳좌전에 杞子鄭기자정으로 使告于秦曰사고우진왈 鄭人정인이 使我掌其北門之管사아장기북문지관하니 若潛師以來약잠사이래면 國可得也국가득야라하야늘 穆公목공이 訪諸蹇叔방제건숙한대 蹇叔曰건숙왈 不可불가라 公辭焉공사언하고 使孟明사맹명 西乞서걸 白乙백을로 伐鄭벌정이러니 晉襄公진양공이 帥師수사하여 敗秦師于殽패진사우효하고 囚其三帥수기삼수하니라 穆公목공이 悔過회과하여 誓告群臣서고군신이어늘 史錄爲篇사록위편하니 今文古文皆有금문고문개유하니라.>
<좌전左傳에 기자杞子가 정鄭나라에서 사람을 시켜 진秦나라에 알리기를 “정나라 사람이 나로 하여금 북문의 열쇠를 관장하게 하니, 만약 군대를 은밀히 출동하여 오면 정나라를 얻을 수 있다.”하였다. 이것을 건숙蹇叔에게 물으니, 건숙蹇叔은 불가하다 하였으나 목공穆公은 사절하고 맹명孟明 서걸西乞 백을白乙로 하여금 정나라를 치게 하였는데, 진晉나라 양공襄公이 군대를 거느려 진군秦軍을 효殽땅에서 패퇴시키고 세 장수를 가두었다. 이에 목공穆公은 자신의 과오를 뉘우쳐 여러 신하들에게 맹세하여 고하였는데, 사관이 이것을 기록하여 편을 만들었으니, 금문과 고문에 모두 있다.>
춘추시대 진秦나라 목공穆公이 기자杞子의 말에 속아 정나라를 치러 출정했다가 진晉나라 양공襄公의 군대에 패하고 난 후 신하들 앞에서 자신의 과오를 뉘우쳐 맹세한 일을 기록한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실수 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실수를 인정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뒤집어씌우는 것이 나쁜 것이다.
보는 바와 같이 진서장의 주인공은 진秦나라 목공穆公이다. <천장강대임어사인야天將降大任於斯人也>라는 맹자의 한절을 읽을 때는 맹자라는 인물이 필요하지 않지만 서전의 진서장을 읽을 때는 진秦나라 목공穆公을 빼놓고는 얘기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상제님께서 서경書經의 진서장秦誓章이라 하지 않고 서전書傳의 진서장秦誓章이라 하시며 이 글을 외워주신 것이리라.
목공穆公은 춘추시대 진秦나라의 14대 군주로 본명은 임호任好이다. 진秦나라의 진흥의 터전을 마련한 영명한 군주로 공자 칩·백리해·건숙·서걸술(西乞術)·건병(蹇丙, 건숙의 아들)·공손지·요여 등 내로라하는 현신, 책사들의 보필을 받아 서융(西戎, 서방 이족(異族)에 대한 통칭) 지역의 많은 부락들을 정벌해 진나라의 영토와 영민(領民)을 대폭 증가시킴으로써 진秦을 무시 못 할 서방 강국으로 융성시켰다. 이 때문에 진목공秦穆公을 춘추오패에 포함시키는 이도 있는데, 오패(五覇)로까지 간주하지는 못하더라도 서융의 패자(覇者)였던 점은 확실하다. [네이버 지식백과] 진목공秦穆公 (열국지사전, 2001. 6. 15. 솔출판사)
<파이낸셜 뉴스>의 <곽인찬 칼럼>을 읽다가 진목공秦穆公에 대한 구절을 만났다. 그는 진 목공을 이렇게 얘기 한다.
<춘추오패 중의 하나인 진秦나라 목공穆公은 인재라면 버선발로 뛰어나가 맞이했다. 당시 서쪽 변방에 있던 진나라는 야만국 취급을 받았다. 국력을 키워 중원을 장악하려면 외부 인재 영입이 절실한 형편이었다. 목공은 백리해百里奚라는 슬기로운 노인을 초빙하기 위해 짐짓 초楚나라에 “아무 짝에 쓸모없는 노인 하나가 도망갔는데 돌려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백리해는 소국인 우虞나라 출신이지만 나라가 망한 뒤 초나라에 도망가 있었다. 그러자 초나라는 검은 숫양의 가죽 다섯 장을 요구했다. 목공은 즉시 다섯 장을 내주고 백리해百里奚를 얻었다. 이때부터 진나라에는 국적 불문, 능력 우선 전통이 섰다. 목공의 후예인 진시황의 천하 통일(기원전 221년)은 거슬러 올라가면 목공의 인재 아웃소싱 전략에 뿌리를 두고 있다. 군웅이 할거하던 춘추전국시대는 기원전 770년부터 진의 통일까지 500년 넘게 이어졌다. 적국은 외국이나 마찬가지였다. 약육강식의 정글에서 제후들은 늘 인재에 목말라 했다. 사마천은 ‘사기史記’에서 말한다. “나라의 안일은 군주가 어떤 명령을 내리느냐에 달려 있고, 나라의 존망은 인재의 등용에 달려 있다.>
진晋의 양공襄公에게 잡혀간 세 장수는 어떻게 되었을까? 진晋의 양공襄公의 어머니는 진목공秦穆公의 딸이었다. 진의 양공의 어머니는 아들인 양공에게 세 장수의 구명을 탄원했다. “저 세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됩니다. 목공께서 싸움을 패전으로 이끈 이 세 사람에 대한 원한이 골수에 배어 있을 것이오. 그러니 저 세 사람을 진秦나라로 돌려보내어 목공께서 마음대로 하시게끔 해드리도록 하십시오.”양공도 그러리라 생각하고 세 장수를 돌려보냈다. 그런데 진 목공은 성 밖까지 나와 세 사람을 맞이했다. “내가 정나라을 쳐서는 안 된다는 두 명신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이리 된 것이오.”그는 싸움에 패하고 돌아온 장수에게 책임을 묻는 대신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종정님이 진秦의 목공穆公이었다면 진晋의 양공襄公에게 잡혀간 세 장수가 다시 돌아왔을 때 어떻게 하였을까? 의문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상제님께서 김형렬 성도에게 이 진서장의 말씀을 잘 기억하라고 하신 뜻은 무엇일까?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상제님을 신앙하는 단체는 춘추전국시대를 방불케 한다. 주나라가 쇠퇴해지면서 춘추전국시대로 들어선 것을 역사가들은 발전적 해체 과정이라 말한다. 그렇듯 우리 신앙단체의 난립은 발전적 난법해원의 과정인 것이다. 그러나 진나라에 의해 중국천하가 통일 되었듯이 이 단체가 중심이 되어 제각기 자기가 상제님 진리의 주인이라 뽐내던 모든 도정을 하나로 통일하여야 한다. 진나라 통일의 기반이 400여 년 전 목공이 인재영입의 전통을 세움으로써 확립되었듯이 상제님께서는 진서장秦誓章을 통해 이 단체의 창업주 태사부님에게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포교대운의 기반을 확립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다. 태사부님은 진목공秦穆公이 버선발로 인재를 맞이한 것보다 신도를 더 소중히 여기셨음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이것이 도정 통일의 기반인 것이다. 그러나 갑오 말에 의해 신도들이 팽 당하고 있는 것은 종정님께서 신도의 소중함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는 탓이다. 그래서 도정통일의 기반을 넓혀갈 새로운 기운이 필요한 것이다.
위의 도전에 인용된 말씀에 대한 채침의 주석이 눈에 띈다. 채침은 소씨의 말이라고 인용하면서 이렇게 얘기 했다.
<至哉지재 穆公之論此二人也목공지론차이인야 前一人似房玄齡전일인사방현령 後一人似李林甫 후일인사이림보 後之人主監此足矣후지인주감차족의
지극하다 목공이 두 사람을 논함이여, 앞의 한 사람은 방현령과 같고, 뒤의 한 사람은 이림보와 같으니, 후세의 군주가 이것을 거울로 삼으면 충분할 것이다.>
종정님이 사위를 택한 것은 뒤의 일인인 이림보 같은 인물을 택하신 것이다. 그러니 도정이 기울어지지 않을 수 없다. 인터넷을 검색하면 어렵지 않게 이림보라는 인물에 대한 설명을 볼 수 있다. <조정에 있는 19년 동안 권력을 장악해 멋대로 정책을 시행했다>는 대목이 우리 도정을 좌지우지하며 천륜파괴를 식은 죽 먹듯이 하는 사위님의 전횡과 닮았다. 이런 분위기에 누가 상제님 도를 전하는 포교를 하려 들겠는가?
<이림보李林甫 : 당나라 종실(宗室). 현종 때의 재상. 어릴 때 이름은 가노(哥奴)고, 호는 월당(月堂)이다. 이사회(李思誨)의 아들이다. 음률을 잘 했다. 국자사업(國子司業)을 거쳐 어사중승(御史中丞)에 올랐고, 형부와 이부의 시랑(侍郞)을 역임했다. 예부상서와 동중서문하삼품(同中書門下三品)을 지냈다. 사람 됨됨이가 겉과 속이 달라 친한 듯이 보이지만 갖은 음모와 중상모략을 일삼아 ‘구밀복검(口蜜腹劍)’이라 불렸다. 교활하고 권술(權術)에 능했다. 환관이나 비빈들과 친해 황제의 동정을 일일이 살피고 주대(奏對)에 응해 유능하다는 평을 들었다. 조정에 있는 19년 동안 권력을 장악해 멋대로 정책을 시행해 사람들이 눈을 흘기며 꺼렸다. 만년에는 성기(聲妓)에 빠져 희시(姬侍)가 방마다 가득했다. 죽은 뒤 태위(太尉)와 양주대도독(揚州大都督)에 추증되었다.(중국역대인명사전, 2010. 1. 20., 이회문화사)>
방현령房玄齡 : 치조우[齊州] 린쯔[臨淄: 山東省] 출생. 대대로 북조(北朝)를 섬기고, 18세에 수(隋)나라의 진사(進士)가 되었다. 당나라가 일어나자 태종(太宗: 이세민)의 세력에 가담, 측근으로 활약하였다. 태종이 즉위하자 중서령(中書令)이 되고, 이어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가 되었다. 정치에 밝고, 공평한 태도로 일관하였기 때문에 두여회(杜如晦)와 더불어 현상(賢相)이라는 칭송을 받았으며, 정관지치(貞觀之治)는 그들에게 힘입은 바가 컸다. 태종의 신임이 지극하여 고구려 공격 때에는 장안(長安)에 남아 성을 지키기도 하였다. 태종의 소릉(昭陵)에 배장(陪葬)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방현령 [房玄齡] (두산백과)
이제 혁명을 통해 도정에 방현령 같은 인물이 쏟아져 들어오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정치에 밝고, 공평한 태도로 일관하였기 때문에 두여회(杜如晦)와 더불어 현상(賢相)이라는 칭송을 받았으며, 정관지치(貞觀之治)는 그들에게 힘입은 바가 컸다>는 내용이 눈에 띈다.
※ 혁명은 증산상제님의 갑옷을 입고 행하는 성사재인이다
※ 밀알가입은 hmwiwon@gmail.com (개인신상은 철저히 보호됩니다)
※ 군자금계좌 : 국민은행 474901-04-153920 성사재인(김갑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