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아나키즘
한국 사회에서 아나키즘 운동은 1919년 3.1운동의 좌절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3.1운동의 실패로 독립 운동 세력들은
강대국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독립을 꾀하고 사회를 변화시키
는 전술로서 사회주의에 대한 관심을 높였다. 그리고 일본으로
유학을 간 유학생들은 아나키즘에 주목했다. 1921년 11월 29일
일본에서 박열과 김약수, 원종련 등이 결성한 '흑도회黑濤會'는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를 사회 운영의 원리로 받아들였고, 직접
행동을 통한 사회 변화를 추구했다. 그러나 흑도회는 박열로 대
표되는 아나키즘 계열과 김찬, 김약수로 대표되는 볼셰비키 계
열로 나뉘어 대립을 거듭하다 박열이 흑우회(黑友會)를, 김약수가
북성회(北星會)를 조직하면서 해체되었다.
중국에서 활동하던 실천가들도 아나키즘을 자신의 사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신채호이다. 역사학
자로도 유명한 신채호는 초기에는 민족주의자의 면모가 강했으
나 3.1운동을 거치면서 아나키즘으로 기울었다. 그는 1921년
에 <천고天鼓>라는 잡지를 창간해 일본 제국주의의 야만성을 폭
로하고 항일 무장투쟁과 독립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또 같은 해
에 '흑색청년동맹'의 베이징 지부를 만드는 등 아나키스트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벌이며 반강권 논리를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재중국조선무정부공산주의자연맹'을 결성해 국가의
폐지와 코뮌의 원리를 주장했으며, 권력을 장악하려는 정치 운
동을 배제하고 직접 행동을 벌이겠다는 생각을 분명하게 밝히
기도 했다.
한국 내에서도 노동자와 농민의 이익을 대표하던 '조선노동공
제회'에서 고순흠, 나경석 같은 아나나키스트들이 적극적으로 활
동했다. 조선노동공제회는 한국 최초의 노동자 잡지인 <공제>와
<노동공제회보>를 발간해 당시의 농민과 노동자들에게 사회주의
와 아나키즘 같은 사상을 소개했다. 또 협동조합을 조직해서 대
안적인 경제를 구성하기도 했다. 1927년에는 '관서흑우회'가 결
성되어 "현재의 국가 제도를 폐지하고 코뮌을 기초로 한 자유 연
합적 사회 제도를 건설할 것, 현재의 사유재산 제도를 폐지하고
지방 분산적 산업 조직으로 개혁할 것, 현재의 계급적, 민족적
차별을 철폐하고 전 인류의 자유, 평등, 우애의 사회를 건설할
것"을 주장했다.
1930년에는 이희영, 유자명, 유기석, 정화암 등의 한국인 아나
키스트들이 중국 상하이에서 '남화한인청년연맹'을 결성했다.
"우리는 절대적으로 자유 평등한 이상적 신사회를 건설한다"라
는 강령을 내건 남화한인청년연맹은 공공연하게 "사회 혁명을
수행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라는 규약을 밝혔다.
한국의 아나키스트들은 일제 식민지라는 어두운 현실에서 벗
어나기 위해 1920년대 초반까지 독자 조직을 결성하거나 독자
노선을 고집하기보다는 다른 세력(특히 사회주의자들)과의 연대
를 모색했다. 그러나 1920년대 후반 좌우익 합작 세력인 '신간
회'가 결성되고 사회주의 진영과 대립한 '아나 -볼' 논쟁을 거
치면서 아나키스트들은 다른 운동 세력과 결별하게 되었다.
한국에서 아나키즘 운동이 활성화된 데는 여러 이유가 있지
만, 가장 큰 이유는 다른 동양 사회처럼 한국에도 서로 보살피는
전통이 깊이 뿌리 내려 있었기 때문이다. 계와 향약, 두레, 품앗
이처럼 마을 단위로 서로 돕고 보살피는 전통이 한국인의 전통
적인 가치관을 형성하고 있었다.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라는 '홍
익인간'의 이념 역시 아나키즘과 닿아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도 아나키즘은 탄압을 받았고 해방 이후에는
남과 북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다. 외국에서 항일 운동을 벌
이던 아나키스트들이 귀국해 독립노농당을 만들고 정치 활동을
펼치기도 했지만 자본주의를 따르는 남한의 군사 독재 정권과
공산주의를 표방한 북한 모두 아나키스트들을 거부했다.
참고
1. 박열(1902~1974)
3.1운동 후 일본으로 건너가 아나키즘을 배웠고 김
약수 등과 함께 흑도회 결성을 주도했다. 1923년에는
불령사(不逞社)를 만들어 본격적인 테러 활동을 모색하
다. 천황 암살 사건에 연루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다.
1945년 해방으로 풀려난 뒤 한국전쟁 때 납북되었다.
2. 신간회
1927년 1월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의 힘을
모아 일제에 대항하기 위해 결성한 단체. 3.1운동 이
후 일제가 문화 정치를 실시하며 민족주의 세력의 분
열을 꾀하자 민족주의 세력은 비타협적인 독립운동을
펼치기 위해 사회주의 세력과 손을 잡았다. 그리고 사
회주의 세력은 코민테른의 지도 아래 민족 해방 이후
에 계급 해방을 추구한다는 2단계 혁명론에 따라 신간
회 결성에 참여했다. 하지만 아나키스트들은 신간회
의 활동에 비판적이었다. 아나키스트들은 민족 국가
건설을 목표로 삼고 계급 불평등을 인정하는 민족주
의자들이나 중앙 집중화된 계급 국가를 건설하려는
사회주의자들과 손을 잡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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