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수부님의 세 살림에 대하여
明洗
1911년 신해년, 고수부님이 상제님 성탄치성을 계기로 도통을 받고 깨어나시며 옆에 있던 차경석 성도에게 같은 경진생으로 동갑장사하자 하시며 “낙종물은 내가 맡으리니 그대는 이종물을 맡으라. 추수할 사람은 다시 있느니라.”고 하신 말씀은 교운이 전개되는 대국적인 틀을 제시해 주신 것입니다.
고수부님이 구릿골로 가시어 약장 기물 일체를 접수하시고 상제님 공사에 수종들었던 성도들을 불러모아 처음으로 교단을 개창하시게 되는데 차경석 성도가 모든 교권을 자신에게로 집중시키는 행태를 보이자 성도들이 분개하여 이탈하게 되고 따로 교단을 만드는 경우도 있게 된 것은 두 분의 낙종물 사명과 이종물 사명이 현실화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고수부님이 김제 조종리 강씨 집성촌으로 가시어 새롭게 살림을 펼치시게 된 것이 둘째 살림이라고 볼 수 있는데 여기서 만백성의 부모로서 상제님의 9년 천지공사와 짝이 되는 10년 신정공사의 집행을 1926년 병인년부터 시작하시게 됩니다.
공사에 수종든 수석 성도인 고민환 성도에 대한 시기 질투가 심해지더니 결국 강씨들의 배신과 음모로 인해, 고수부님은 정읍 왕심리에 자리를 마련하시어 그쪽으로 옮겨 가시게 되는데 그 곳에서 2년여 머무르시며 계속 신정을 베푸시다가 이상호가 고수부님을 모시겠다고 간청을 해서 만들어진 동화교와의 통합교단이 셋째 살림이라는 견해가 지금까지 중복 도수 도문에서 해석한 방식입니다.
이에 대해, 통합교단 2년 후에 고수부님이 결국 오성산 도장으로 옮겨 가시어 그 쪽을 인정하는 말씀을 하셨다는 것을 근거로 용화동의 통합 교단을 과도기로 여기고 오성산 도장에서 2년가량 계시며 보신 공사가 단순한 은거가 아니라 실질적인 셋째 살림으로 봐야 한다는 견해가 있는 것으로 압니다.
용화동을 정통 살림으로 인정하면 오성산은 세 살림을 마치신 후 은거하신 것으로 이해되고 오성산을 정통으로 인정하면 용화동은 과도기 통합 교단으로 이해됩니다. 용화동이든 오성산이든 어느 쪽을 정통으로 인정하더라도 정읍 왕심리에서의 2년 동안의 공사는 과도기로 남게 되는 문제도 있습니다.
그런데, 고수부님의 신정 공사가 10년이며 그 기간이 1926년부터 선화하신 1935년까지임을 고려할 때, 왕심리에서부터 용화동을 거쳐 오성산까지 총 6년 기간 중, 한 장소에서의 2년 기간만 셋째 살림으로 인정하고 나머지 두 군데의 4년 기간을 과도기로 잡는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과도기 기간 동안 보신 공사에 대해 어떻게 볼 것이냐는 문제가 대두되는 것입니다.
과도기 기간 동안은 공사를 보시지 않았다라든가 공사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차이가 많다든가 아니면 머무신 기간이 상대적으로 매우 짧다든가 하면 과도기로 볼 수도 있지만 왕심리, 용화동, 오성산은 각기 비슷한 기간 동안 계시면서 공사 또한 어느 쪽도 무시할 수 없을 만큼의 중요 공사를 보신 점을 감안한다면 어느 한 장소만 셋째 살림으로 볼 것이 아니라 세 군데 모두를 셋째 살림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렇게 볼 때, 고수부님의 전체 공생애 기간이 유루없이 평가절하되지 않고 의미 부여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셋째 살림 자체가 어느 한 군데서 단일한 살림의 모습으로 끝나지 않고 세 군데의 장소 변천을 거치며 이루어진 것은 추수 사명의 역사가 세 살림으로 전개될 것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셋째 살림의 첫 장소는 순흥 안씨 집성촌인 정읍 왕심리인데 추수 사명이 도안 세 살림으로 짜여져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둘째 장소인 용화동은 추수 사명자의 중심 인물이 용화동에서 활동을 전개할 수 있도록 현실적인 매개자인 이상호 이정립 형제와 직접 통합교단의 모습을 연출하신 것이며, 마지막으로 추수 사명의 마무리에 관한 공사를 오성산에서 별도로 집행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고수부님이 용화동으로 가시게 된 이유는 추수 사명의 첫 포문을 열게 될 초복 지도자에게 간접적이나마 현실적인 맥 기운을 전해주시기 위해 힘든 고초를 감수하시며 통합 교단 요청에 응해 주신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일단 겉으로 보기에도 그렇고 본인들도 그 점을 활용하고자 한 것이지만, 이상호 이정립 형제에게 기운을 붙여주신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고수부님이 용화동을 떠나실 때, 두 형제에게 건곤사당을 말씀하시며 “일후에 사람이 나면 용봉기를 꽂아놓고 맞이하라.”고 하신 것은 결국 그들 형제와 만나게 될 초복 지도자의 위상을 간접적으로 밝혀주신 것입니다. 두 형제에게 의통이 전수되고 고수부님이 통합 교단까지 응해주신 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착각처럼 교운을 매듭짓는 추수 사명자여서가 아니라 실제의 추수 사명자에게 기운이 전달되도록 하는 교량 역할을 하게 하는 방법으로, 그들이 주인공이 되고 싶은 욕망을 채워주시면서 일이 진행되었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해방 후 자신이 직접 개척한 단체를 두 형제에게 송두리째 강탈당하게 되는 초복 지도자가 인고의 세월을 견뎌내고 74년에 재기두하여 두 아들과 새롭게 개척하게 되는 증산도의 교리 체계에서는, 용화동 통합 교단이 당연히 고수부님의 세번 째 살림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용화동을 떠나 선화하실 때까지 머무르신 오성산 시절은 은거의 시간으로 표현되며, 용화동으로 들어가시기 전에 계셨던 정읍 왕심리 시절도 별 의미없는 과도기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성산에서의 신정 공사라든가 “조강맥식일지라도 임옥 자손들과 제반사를 결탁하리라.”는 말씀이나 그 공사 기간 등을 헤아려볼 때, 오성산이 용화동보다 더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살림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오성산에서 보신 공사는 추수 사명 지도자가 3명으로 나온다는 것을 감추어서 막판에야 알 수 있도록 하신 것과 교운의 마지막에 윷 판 통일도수로 대업이 이루어지도록 하시면서도 오성산의 공사 자체가 주목받지 못하게 조처해 놓으신 것입니다. 결국 용화동으로 드러나는 맥에서는 이상호 이정립 형제가 그들을 주인공으로 크게 착각하게 만든 ‘두 사람’ 론이 중복 지도자에게 크게 쓰여 종통을 초중복 지도자 두 사람에게 한정시키는 교리체계의 틀을 벗어날 수 없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고수부님의 크나 큰 세 살림은 24년 공생애 기간 전부이며, 그 중 셋째 살림은 10년 신정 공사의 후반 6년 동안 장소를 세 군데로 옮겨 다니시며 추수 사명 세 살림의 모습을 그대로 투영시켜 보여 주시면서도, 때가 되기 전에는 그 전모가 드러나지 않도록 감추어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