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 남은 여생을 보내다
해방 후 유자명은 대만과 홍콩을 거쳐 한국으로 돌아오려 했지
만 한국전쟁이 일어나 다시 중국 대륙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 뒤
1985년에 죽을 때까지 중국 호남성 호남농학원 교수로 일하면서
농업을 연구하는 학자로 이름을 날렸다. 유자명은 "농업이 발달
하지 못하면 밥도 배불리 먹을 수 없는데 어떻게 건설할 수 있겠
니?"라며 농업의 중요성을 끊임없이 강조했다.
마오쩌둥이 중국을 공산화하면서 중국의 아나키스트들은 시
련을 겪었는데, 유자명도 마찬가지였다. 유자명은 문화대혁명
당시 자아비판을 하면서 마르크스주의와 아나키즘의 차이를 다
음과 같이 적었다.
" (1)마르크스주의자는 완전히 국가를 소멸할 것을 자기의 목적으로
하고, 사회주의 혁명이 계급을 소멸한 뒤에 국가가 없어진 사회주의
가 건설된 뒤에만 이런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고 하는데, 무정부주의
자는 24시간 안에 국가를 완전히 소멸한다고 하면서 어떻게 소멸시
킬지 조건을 알지 못한다. (2)마르크스주의자는 반드시 무산 계급이
정권을 탈취한 뒤에 낡은 국가기관을 완전히 파괴하고 새로운 무장
한 사람들고 조직한 코뮌식의 국가 제도로써 그것을 바꿔야 된다고
했는데, 무정부주의자는국가 기관을 파괴한다고 주장하면서 무산
계급이 무엇으로써 그것을 대신하고, 무산 계급이 어떻게 혁명 정권
을 운용해야 될 것인가를 완전히 알지 못했으며, 무정부주의자는 심
지어 혁명 무산 계급이 국가 정권을 운용하게 될 것까지 부인하고 그
의 혁명전쟁까지도 부인하는 것이다. (3)마르크스주의자는 현대의
국가를 이용함으로써 수단으로 하고 무산 계급의 혁명을 주장하는
데, 무정부주의자는 이것을 부인하는 것이다.
자아비판을 강요받으면서 쓴 글이기 때문에 유자명은 아나키
즘의 단점을 부각하고 있는데, 이 글에서도 아나키즘과 마르크
스주의자의 주요한 차이점은 국가이다. 이 글을 거꾸로 읽으면
유자명이 얘기하고 싶은 아나키즘의 성격이 드러난다. 아나키스
트들은 즉각 국가를 없앤 뒤에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의 공동체
를 구성하게 하지만 마르크스주의자는 혁명을 완수한다는 명목
으로 억압적인 국가 기구를 유지한다. 그래서 혁명은 민중의 혁
명이아니라 혁명가의 지도를 따른 혁명으로 변질된다.
유자명은 시련을 겪으면서도 농학자로서 자신의 신념을 계속
지키며 살았다. 그리고 자신이 배운 농학과 관련된 기술을 평범
한 농민의 언어로 농민들에게 전달하는 데 온 힘을 쏟다 숨을 거
두었다.
참고
1. 바진(1904~2005)
중국의 유명한 소설가로 1984년에 중국작가협회 주석
을 지냈다. 유자명, 정화암, 유림 등 한국의 아나키스
트들과 친했고 그들을 여러 차례 도와주었다. 특히 유
자명과의 우정이 남달라 그를 <머리칼의 이야기>라는
소설의 주인공으로 삼기도 했다.
2. 문화대혁명
마오쩌둥의 주도로 1966년부터 1976년까지 중국에
서 진행된 대격변, 대규모 군중운동, 자본주의의 유산
을 타파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권력 기반 약화를 우려한 마오쩌둥이 공산당 내부의
반대파들을 제거하기 위해 벌인 권력 투쟁이었다. 마
오쩌둥을 따르는 젊은 '홍위병'들이 대학과 공공시설
을 장악하고 반대파들의 처벌을 요구했고 실제로 많
은 당 간부들이 자살하거나 투옥되고 모진 고문을 당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