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은 이것이 곧 인간의 천성天性이라고 본다. 그런데 이렇게 ‘권
형’에서 자의성을 탈색 시켜서 ‘영지’의 자각 기 능을 강화한 것은 의무론
에서의 지각 개념에 가까워진 것이며, 도덕이 앎(지각)의 문제가 아니라
는 처음의 구상에서 후퇴하여, 지적 측면과의 관련성을 승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도심의 위상에 관련하여 덕의 내재성 문제는 의무론에로의 접근을
더욱 촉발 시킨다. 정약용은 덕이 마음에 내재해 있는 것이 아니라 인륜
을 실천할 때 이루어 진다고 주장 하지만, 만약 순수한 동기나 의향 없
이 다른 이기적인 의도를 숨긴 채 겉으로만 덕을 행할 경우에도 과연
덕을 지니게 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만약 이점을 용인한다면 결과 주
의와 같게 될 것이다. 결과주의는 순수한 동기 없이도 행위가 예禮에 부
합하기만 하면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정약용이 이와 같은 결과주의를
수용할 리는 만무하다. 그렇다면 이른바 ‘덕의 역설’이 시사하는 것처
럼 덕스런 행위를 통해 덕을 얻어야 한다면 그런 행위를 할 수 있기 위
한 덕이 이미 내부에 있어야 할 것이다. 정약용은 이여홍과의 논쟁에서
“인의예지의 명칭은 밖에서 이루어지고 인이 될 수 있고, 의가 될 수 있
고, 예가 될 수 있고, 지가 될 수 있는 이치는 안에 갖추어져 있다”고
말하게 되는데, 이는 도심이 도덕적 행위를 촉발하는 선한 동기로서의
덕임을 인정한 것으로서 주희나 그 밖의 성리학적 의무론과 사실상 같
은 장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희에 있어서 마음에 있는 것은 덕
의 이치일 뿐이고 이를 실천할 때 비로소 덕이 체득되는 것이지만. 덕
의 이치 또한 덕이라 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덕은 “내가 스스로 가
진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효의 이치는 내 마음에
선천적으로 부여된 것이고 이 도리를 의무감에 따라 실천할 때 비로소
효의 덕을 얻게 된다. 그러나 효의 덕을 체득한 상태란 효의 이치를
체험을 통해 분명하게 자각하여 언제든 실천할 수 있게 된 상태일 뿐이
기 때문에 결국 “효의 이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효의 덕을 가지
고 있다”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한 것이다. 이 때문에 주희는 인의예지를
기본적으로 본성의 원리라고 설명하지만. 그것을 사덕이나 명덕으로 지
칭함을 용인했던 것이다.
정약용이 말년에 주희의 인심도심에 관한 기본적 통찰과 이론적 골
격을 수용하게 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이와 같은 덕의 원리 때문이라
할 수 있다 . 비록 정약용은 덕을 행할 수 있는 이치란 ‘영지의 기호’ 일
뿐 도심을 촉발하는 원리가 따로 내재해 있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지
만 덕에 대한 선호와 그것의 자각은 그 자체 도덕적 원리로서의 덕으로
간주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와 같은 덕이 없다면 어떻게 ‘권형’ 만으로
덕을 실천할 수 있겠는가? 덕을 실천할 수 있는 근거를 ‘덕에 대한 선호’
로 설명하든, ‘덕의 이치’로 설명하든 똑같이 윤리적 행위를 촉발시키는
선한 동기(도심)로서의 덕을 가리킬 뿐이다. 정약용은 “인심과 도심은 바
로 [순자]성악설의 종지”라는 황종희黃宗羲(1610~1695)의 비판에도 불
구하고 오히려 주희를 칭송한다. 황종희는 주희의 견해가 순자의 경
험주의로부터 유래된 것으로 보고, 인심도심을 지각으로 설명한 것을
비판한 것이지만 정약용은 주희가 말하는 도심이 도덕적 원리의 자각
에 근거해 있고 또한 ‘본성의 명령性命’ 으로서의 의무감이 선한 행위의
동기라는 점에서는 ‘영지의 기호’와 다르지 않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물론 주희의 인심도심설을 칭송했다는 점만으로 정약용이 의무론적
입장으로 완전히 돌아섰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는 끝까지 덕 개념을 자
신의 윤리학의 핵심에 놓고 있으며, 리의 지각 대신에 영지의 호오와 자
각으로써 도심을 설명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도심을 도덕적 행위의 동
기로 인정한다는 점에서 더 넓게는 도덕의 인식적 정당화를 근본적으
로 회피할 수 없었다는 점에서 성리학과 완전히 다른 입각점에서 윤리
학을 세우려했던 그의 구상은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완수 되었다고 말하
기 힘들 것 같다. 오히려 그의 윤리학은 인심과 도심의 대립 속에서 도심
을 선택해야 할 필연성을 요청했던 주희-이황-이익으로 이어지는 실천
이성에의 요구라는 윤리학적 계보 위에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