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편「중국」덩샤오핑11 - 경제 청맹과니 마오쩌둥과 유소기•등소평의 실용주의 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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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더 (왼쪽 지팡이 짚은 이) , 주은래(왼쪽 셋째), 등소평(넷째), 펑전(다섯째), 양상쿤(뒷줄 선글라스 낀 이)
등소평이 1966년 12월 ‘자본주의 길’을 걷는다는 죄명으로 첫 번째 실각을 당한 이유는 유소기(류사오치)와 뜻을 함께했다는 죄명이다. 그러나 덩샤오핑은 유소기가 모택동이 탈권시도를 막으려고 1966년 여름에 준비한 ‘반마오 쿠데타’의 마지막 단계는 동조하지 않았고 일정한 선을 넘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등소평은 사상적으로는 모택동 노선을 추종했기 때문에 정치적 시련은 맛 본 것이다. 등소평의 실용주의는 비록 사상적으로는 모택동 노선을 추종했지만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 길을 추구한 것이다.
두 번째 실각은 등소평이 소련과 내통할까 염려하여 실행된 조치였지만 그 내면에는 모택동의 좌경 노선을 반대한 것이 주요 원인이었다. 그는 아내 탁림卓琳과 계모 하배근夏培根과 함께 1969년 10월 20일부터 강서 지역으로 유배생활을 떠나게 됐다. 이 두 번째 실각에서는 가족까지 피해를 입는 암담한 시련을 맞게 된다. 첫 번째 실각에서 보는 바와 같이 ‘자본주의 길’을 걸었다는 낙인이 찍힌 마당에 두 번째 실각에서는 그의 가족들의 ‘자본주의 길을 걷는 독재자’라는 지독한 낙인이 하나 더 보태져서 사회의 변두리에 처박혀 버린 것이다.
▲ 부인 탁림(왼쪽 의자 앉은 이), 등소평(중앙), 장남 박방( 오른쪽 흴체어 앉은 이)
등소평의 가족 중에서 직접적으로 가장 많은 피해를 본 사람이 장남 박방樸方이었다. 그는 젊고 어리고 무지막지한 홍위병에 의해 방사능에 오염된 실험실에 갇히게 되자 탈출을 시도하려고 4층에서 뛰어내리다 척추를 다쳐 평생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불구가 된 것이다.
한편 하방(실각)된 등소평과 그의 부인은 유배생활 동안 일반 근로자들과 마찬가지로 출•퇴근을 정확한 시간에 맞추어서 생활했다. 그의 하루 일과를 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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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즈베리 저작 <새로운 황제들> 한글 번역 본
동소평의 강서 유배생활은 매우 단조로웠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아
침 7시 45분에 트랙터 수리공장으로 출근하여 11시 반에 퇴근하였다.
낮잠을 잔 후 마당의 채소를 돌보았고 오후에는 정원을 40바퀴씩 돌며
체력을 단련하고 저녁에는 신문, 라디오를 통해 정국의 추이를 주의깊
게 지켜보았으며 밤늦도록 책을 읽었다. 잔병이 많은 탁림과 늙은 계모
가 하기 힘든 일은 등소평이 도맡아 했다. 자녀들이 합류한 후에는, 특
히 반신불구가 된 장남 박방의 몸을 씻기거나 침상에 누이고 일으키는
일은 등소평의 몫이었다. 등소평 부부는 트랙터 공장에서 노동자로 생
활하는 동안 모든 동료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성실한 작업태도와 검
소한 생활, 프랑스 유학생활 중에 익힌 숙련된 솜씨, 그리고 노동자들
과 격의 없이 어울리는 태도 때문이었다. 실제로 어느 노동자는 솔즈베
리에게 “그는 결코 위대한 국가 지도자처럼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마치 우리 가운데 한 사람과 같았습니다.“라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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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내용은 솔즈베리의 저작 <새로운 황제들>에 포함된 내용이다.
등소평의 두 번째 강서유배는 현대 중국이 경제대국으로 가는 결정적인 배경이 된 것이다. 이것은 메리암Merriam의 정치권력론에도 그대로 투영되어 드러난다. “지배자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사회의 기능이자 도구이며 수단이다.... 만약 그가 자기주장과 더불어 자기희생을 구체화시키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가 이기주의와 같은 정도로 이타주의를 병행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목소리가 거칠고 손이 매섭다고 할지라도 그는 지배할 수 없다”라고 지적했다.
메리암이 지적한 바를 등소평에 대입시켜 보면, 이는 순전히 등소평의 이기주의와 이타주의가 결합된 조화로움이었고 이러한 것이 종합되어서 개인의 권력과 함께 중국사회주의 비전을 하나로 묶어 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조선시대 정약용이 유배기간 동안 피눈물 흘리면서 쓴 실용•실천주의에 관한 무수한 저작물이 있었다면, 등소평은 유배기간인 하방(실권)동안 정신이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고, 원대한 중국의 발전에 관하여 끊임없이 용수철처럼 튀어 나오는 아이디어를 머릿속에 담아 미래 중국의 실용•실천주의의 계획을 구상했다.
1973년 4월 두 번 째 복권된 등소평
등소평이 두 번째 복권되면서 가장 먼저 서둘렀던 것이 문화대혁명 기간에 중단되었던 경제를 회생 시키려는 조정정책을 확장, 가속화 시키는 것이었다. 그가 경제를 회생 시키려 했던 방법은 당연히 실용적인 경험에 의한 것이다. 중국 사회주의 정권이 수립 된 이후 지난 20년을 되돌아 종합해 보면, 모택동의 모험주의로 인한 경제 실패의 참담함, 그리고 인민들의 시체들이 산과 들에 가득했던 경험을 통감하고 생산력을 높이는데 집중했다.
한편 등소평의 두 번째 복권은 조용하게 진행됐다. 정치권력의 속성상 등소평의 실각에서 복권의 과정은 일반인민들의 민심이완을 최대한 배려하는 방향으로 나갔다. 1973년 4월 12일 북경에서 캄보디아 국가원수 시아누크를 환영하는 연회가 베풀어 졌는데, 이 자리에 모택동의 질녀인 외교부의 부부장 왕해용(王海容; 왕하이룽)의 부축을 받으면서 등소평이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이와 더불어 국무원 총리였던 주은래(저우언라이)는 등소평을 국무원 부총리로 소개했던 것이다. 중국의 정치권력의 특성은 한번 하방(실각) 시키고 난 후, 그들의 인민에 대한 경제적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서는 가장 필요했던 인재를 실각 시킨 후, 등용할 때는 과거에 자신들이 저질렀던 과오를 보상이라도 하듯 소리 없이 날개를 달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그리고 정치속성상 자신들에게 언제든지 부담이 가면 새로운 죄를 덧 씌어서 가차 없이 실각을 시키는 것을 되풀이 하는 과정을 거치는 중국 사회주의적 특색을 가지고 있다.
이제 등소평은 두 번째 복권과 더불어 짧은 시간 동안에 권력의 중심으로 날개를 달게 된다. 등소평은 1973년 1월 북경에서 열린 제 4기 전국인민대표 대회 제 1차 회의에서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두 번째로 새 헌법이 채택되면서, 그 근거를 가지고 정치권력의 닫혔던 족쇄를 풀 게된다. 등소평은 이 새 헌법에 근거해, 국가부주석으로 선출됐다. 1974년에는 당정치국 정 위원과 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으로 선출됐으며, 1975년에는 당부주석과 당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으로 복귀했다. 모택동이 등소평을 복권 시킨 결정적인 계기는 주은래의 권유가 있었고, 그의 의견을 적극 수용했기 때문이다.
모택동이 주은래의 권유를 거부할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문화대혁명으로 처참하게 망가지고 피폐해진 경제를 살리는 쪽의 적임자로 등소평 만한 인재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문화대혁명의 과오는 모택동이 저지른 권력에 대한 욕심이었다. 그로 인하여 경제정책이 엉망이 되고 인민의 삶이 파탄 난 것이다. ‘자본주의 길’로 들어섰다고 실각시킨 등소평을 재 등용할 때는 모택동도 이제는 ‘자본주의’를 사상으로 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한 꼴이 된 것이다. 이러한 증거는 모택동이 등소평을 복권 시키는 동시에 스스로 대외적으로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추진했고, 일본과 복교를 실현했으며, 서방세계와 협력을 추구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다는 데서 잘 드러난다.
이제 등소평을 재 등용시키는데 일등공신인 주은래는 1975년이 되자마자 중국이 농업, 공업, 군사, 과학기술 등 4대 부문에서 현대화를 요구해야 한다고 공언하게 됐다. 그것은 그의 사상이자 실용주의정책을 힘차게 추진하고자 하는 열망이었다. 주은래가 이러한 정책추진을 강력하게 열망한 배경에는 등소평이 당당하게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실용주의의 사상의 조력자임과 동시에 든든한 실무 지식으로 달통한 동소평과 주은래는 손발을 맞추면서 자신감 있게 실용주의 배를 현대화라는 물품을 싣고 대양을 향해 출발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