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쿠닌만이 아니라 크로포트킨도 러시아 민중과의 만남을 통
해 민중 속으로 들어가야 할 필요성을 이야기한 바 있다. 크로포
트킨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나는 농민들에게 사회주의 사상을
선전할 때 나보다도 훨씬 민주적인 교육을 많이 받은 것처럼 보
이는 친구들이 농민이나 시골 출신 노동자와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 모르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소위 '민중적 언어'를 많이 쓰면서 '농민의 말'에 익숙해지려고
노력했지만 실제로는 민중을 이해하지 못한 채 말만 빌려왔기
때문이다. 농민과 대화하거나 농민을 대상으로 글을 쓸 때는 그
럴 필요가 없다. 러시아의 농민도 외국어만 잔뜩 쓰지 않는다면
지식인의 이야기를모두 이해할 수 있다.
농민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구체적인 예를 들어 설명하지 않는
추상적 개념이다. 평균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는 말은 과학적, 사회적, 자연적 총체에서 추출된 일반화가
아니다"라며 말로만 민중을 앞세우거나 현란한 개념으로 민중을
속이는 자들을 비판했다. 교육의 기회만 가진다면 민중은 자신의
삶과 혁명의 목표를 스스로 규정할 수 있다.
그래서 아나키스트들은 역사가 특정한 발전 법칙(역사적 유물
론 또는 과학적 사회주의)에 따라 실현된다는 생각을 거부했다.
아나키스트들은 새로운 사회의 구체적인 청사진을 미리 그릴 수
없다고 보았고 새로운 사회는 그것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그리
고 운동에 참여하는 대중의 집단적인 활력으로 드러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런 관점은 아나키스트들이 과학적인 합리성이나 의식보다
대중의 본능과 연대에 희망을 걸었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바
쿠닌은 대중이 지닌 반란의 본능과 파괴적인 충동에 희망을 걸
었고, 크로포트킨은 서로 돕고 보살피고 연대에 희망을 걸었다.
새로운 사회는 냉철한 이성이나 지성보다 창조적인 파괴를 지향
하고 서로 보살피는 본능을 바탕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본능은 특별한 엘리트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
기 때문에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는 데 탁월한 지성과 능력을 갖
춘 엘리트가 필요하지 않았다. 서로 보살피고 사랑하는 따뜻한 마
음만으로도 인간은 사회를 바꿀 수 있다.
참고
1. 흑색인터내셔널
마르크스와 바쿠닌은 국제노동자협회(인터내셔널)에
서 조직의 권위를 어디까지 인정할 것인가, 노동자의
자유로운 연합을 어느 정도 인정할 것인가 등의 문제
를 둘러싸고 계속 대립했다. 마르크스가 바쿠닌을 제
명하자 바쿠닌은 자신을 지지하는 아나키스트들을 모
아 1872년 흑색인터내셔널을 창립했다.
2. 직접행동
과거 아나키스트들이 체제에 도전하기 위해 사용했던
말이다. 아나키스트들은 다른 누군가가 자신을 대변
해주길 바라거나 말이나 구호로만 사상을 표현하지
않고 직접 행동에 나서 자신의 사상을 실천하려 했다.
그래서 많은 아나키스트들이 때로는 폭탄과 무기를
들고 권력에 맞섰고, 때로는 학교를 세우고 탁아소를
만들며 공동체를 꾸몄다. 자신의 일상적인 삶을 바꾸
기 위해, 자신이 삵고 있는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직
접 행동하는 것, 몸으로 자신의 사상을 실현하는 것이
직접 행동의 의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