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학의 차원에서는 이황이 옳고 존재론의 차원에서는 이이가 옳
기 때문에 양쪽 모두 옳다고 할 수도 있지만, 이는 동시에 존재론의 차
원에서는 이황이 틀리고 윤리학의 차원에서는 이이가 틀리다는 것을
함축할 것이다. 양쪽 모두 옳다는 것은 양쪽 모두 그르다는 주장과 같
은 말이다. 문제는 굳이 한쪽의 잘못을 따지려 하기 때문에 “시비가 분
분하여 끝이 없게 되었다”는 점이다. 즉, 사칠논쟁의 저변에는 옳음과
그름 을 가리고자 하는 인식적 태도가 깔려 있다는 것이다. 정약용의 양
립 가능성 논증은 곧, 그와 같은 인식적 태도를 버려야 한다는 것을 함축
하고 있다. 도덕은 원리에 대한 인식의 문제가 아니라고 본 것이다.
따라서 해결의 열쇠는 인식의 관점이 아닌 존재의 관점에 입각한 윤리
학을 어떻게 건립할 수 있는가에 놓여 있는 것이다 . 다시 말해 그것은
이미 형성된 상제귀신의 존재관에 입각해서 새로운 인심도심의 윤리학
을 구성하는 일이다
위와 같은 문제 의식은 「이발기발변 2」에 단편적으로 드러나 있다. 그
는 이황의 인심칠정과 도심사단의 대립 구도에는 근본적으로 공감하
지만 그것을 대하는 입각점에 있어서는 생각을 달리한다. 이황이 도
심과 인심을 이발과 기발로 구분한 것은 결국 도덕을 리理의 지각에 의
해 설명하고 정당화 하려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와 같은 이론적 정당
화는 도심을 설명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도덕적 실천으로 이어지지 못
한다. 왜냐하면 도심의 선택과 실행에는 지각과는 별도의 자의적 의향
意이 개입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약용은 보다 단순하고 실천 지향적
인 존재의 윤리학을 모색하게 되는 바 그 돌파구는 덕德 개념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었다. 성리학에서는 ‘명덕明德’ 을 “사람이 하늘로부터 얻
어서 텅 비고 신령스럽되 어둡지 않으며 여러 이치들을 갖추어 만사에
응 하는 것”이라고 설명하듯이 심성에 내재된 보편적 원리와 그 운용
지각을 덕이라 본다. 인의예지의 덕은 원리로서 심성에 내재한다는 것
이다. 반면, 정약용은 덕을 일과 행위행사에 구현된 효孝·제弟·자慈와
같은 구체적 인륜이라고 본다. 공자나 맹자는 실천적 인륜을 말했을
뿐인데 주자학자들은 그것을 심성에 관련된 이론으로써 설명하려 한다
고 그는 비판한다.
대저 후세의 학자들이 경經을 해석할 적에 언제나 일과 행위에 발현하는
것을 심성이라 인정해 버렸으니, 명덕의 해석만이 그와 같은 것이 아닙니
다. 예를 들어 ‘인仁’ 이라는 글자의 뜻에 있어서도 공자나 맹자는 모두 ‘인
仁이란 인人이다’라고 하였는데도 주자는 ‘심의 덕이요. 사랑의 이치이다’라
고 하였습니다. [중용]에 나오는 희로애락의 미발未發도 다만 ‘희로애락의
미발’ 이라고 말했을 뿐인데, 사려지각思慮知覺의 미발이라고 말합니다. 그리
고 [맹자]의 측은·수오·사양·시비 등은 바로 안에서 동動 했으나 행위에
는 미치지 못하므로 다만 인·의·예·지의 단서가 될 뿐이며, 인의예지는 바
로 행동과 일에 나타나 이미 인이 되고 의가 되고 예가 되고 지가 된 것입
니다. 그런데 (주자는) 인의예지를 내부에 있는 성이라고 인식하고 반대로
측은 ·수오·사양·시비를 인의예지에서 발현하는 것 이라고 하고 있으니, 이
것은 모두 심성을 너무 중요하게 본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정약용이 볼 때 주자학자들은 경전을 해석할 때 일과 행위에 발현되
는 것을 덕이 아닌 심성의 이치와 작용으로 해석해왔다. 즉, 인仁도 주
자학자들은 “마음의 덕이자 사랑의 이치”로 해석하고 [중용]의 미발
도 사려지각의 미발로, 맹자의 사단도 마음 내부의 인의예지라는 본성
에서 발현한 것이라고 해석 한다는 것이다. 이는 모두 성의 원리와 심의
작용을 중심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여기서 비판의 표적이 되고 있는 것
은 심성의 정적 수양이 아니라, 심성 내재적인 보편적 원리와 작용으로
써 전통적 유가경전을 설명하려는 태도인 것이다. 다만, 위에서 사단을
“단서端緖”라고 표현한 데서 엿 보이듯 그의 덕 윤리학은 아직 구체화되
지 않은 상태이다. 요컨대 정약용은 도덕이 보편적인 이치나 규칙에
대한 인식의 문제가 아니라 호오好惡라고 하는 구체적 실천적 성향의
문제이며, 궁극적으로는 전통 속에서 형성된 인륜규범의 실천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 덕은 그와 같은 전승되어 온 인륜규범의 구체적 내용을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정약용 윤리사상의 본질은 바로 여기에 있다. 도
덕을 인식적으로 정당화 하려 했던 기존의 성리학과는 다른 입각점에서
윤리학을 모색한 것이야 말로 다산을 다산으로 만드는 궁극적 소이所以
가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