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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9월4일 미 제24군단의 해리스(Charles S. Harris) 육군 준장을 단장으로 하는 37명의 선발대가 비행기 8대로 서울로 향했다. 그러나 심한 폭풍우를 만나 6대는 돌아갔고, 해리스 준장이 탄 비행기를 포함한 2대만이 9월6일 김포 비행장에 도착했다. 1945.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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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 비행장을 정찰 중인 미군 정찰기. 1945.9.4
상공에서 바라 본 경성 비행기 이착륙장. 1945.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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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에서 총독부 건물까지 거리행진을 하며 광복의 기쁨을 만끽하는 한국 인들. 1945.9.9.
미국이 점령한 모든 지역에서 일본 세력이 정식 항복함에 따라 한국에 대한 오랜 지배도 종식됐다.
38선 이남에 진주한 미 24군단의 군대와 장교들이 내려지는 일장기를 지켜보고 있다. 1945.9.10.
■ 떠나는 일본인들
일본의 항복으로 재한 일본인들은 자국으로 돌아갔다. 조선총독부의 인구통계에 따르면 1944년까지 조선에 거주한 일본인은 약 71만명이다. 군인과 민간인들은 차례로 미군의 통제 하에 본국으로 송환됐다.
한반도, 중국, 만주, 타이완, 남양군도 등 각지에서 주둔 또는 거주한 일본인들 대부분은 1949년 말까지 자국으로 귀환했다. 그 수는 군인·군속 및 민간인을 포함해서 600만명이 넘었다. 이들은 주로 마이즈루, 시모노세키, 하카타, 사세보 등 각 지역의 항구로 들어갔다.
일본에서는 이를 기념하여 마이즈루와 사세보 등에 ‘귀환기념관’을 설치해 사진, 수기 등 당시의 자료를 전시했다. 귀국 과정에서 그들이 겪은 고초와 희생을 기리는 전시로 일관하고 있다.
일본으로 돌아가는 배에 승선하기에 앞서 일본 군인이 무기 혹은 시계, 카메라 등 허가되지
않은 물품 소지 여부를 검사받고 있다. 이 물품들은 일본 송환 시 제한 품목이다. 부산항, 1945.10.12
일본으로 가는 배에 실을 짐을 싸고 있는 일본인 가족. 1945.10.30
■ 돌아오는 한국인들
일제의 식민통치 기간 동안 많은 한국인들은 농업기반을 잃어 다른 곳으로 이주하거나 강제 연행됐다. 고국을 떠난 한국인들은 해방된 조국에 돌아오기 위해 귀환 길에 오르게 된다. 1945년 8월 일본에는 220만여명의 한국인들이 있었다. 1947년 9월까지 귀환자 수는 약 186만명이다.
타지에서 생활하던 한국인들이 돌아오는 길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1945년 8월24일 일본으로 징용 당했던 한국인들이 귀국하던 배가 마이즈루항 근처에서 침몰 당했다. 이 사고로 500명이 넘는 한국인들이 사망했다고 공식 발표됐으나 실제 사망자가 수천명이 넘는다는 얘기도 있다.
광복 직후 한반도로 돌아온 재만 한국인들의 수는 70만명이다. 광복 직전까지 재만 한국인의 수는 230만명이었다. 만주사변 이후 개척민으로 이주한 사례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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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항의 난민캠프에서 한국인 요리사가 큰 솥에 음식을 준비하고 있다. 난민 수백명이 매일 중국 톈진에서 돌아왔다. 이들 한국인들은 거주시설이 마련될 때까지 캠프에서 생활했다. 1948.5.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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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에서 인천으로 돌아온 한국인 중 한 소녀가 인천에 세워진 캠프에 들어가기 전에 이(louse)를 없애고 있다. 이들은 거주시설이 마련될 때까지 캠프에 머물렀다. 1948.5.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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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한국인들이 하카다 항에서 배를 기다리고 있다. 1945.10.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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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공간의 일상
해방된 조국에서 한국인들은 일상으로 빠르게 복귀했다. 공장을 가동하고 도로를 보수했다. 해방된 공간에서 생업을 유지하며, 활기차게 활동하는 한국인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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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건너편 건물에서 찍은 사진. 오른쪽에 보이는 건물은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던 석조전 건물로, UN임시위원단의 회의장소로도 사용되었다.1948.2.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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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호텔에서 찍은 조선총독부 건물 사진. 이 건물은 미군정청과 과도입법의원이 사용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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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젊은 남자가 아이들이 보는 가운데 운동장에서 그네를 타고 있다. 운동장이 작고 시설도 열악하지만 이 지역 아이들은 대부분 이곳에서 시간을 보낸다. 1947.12.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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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생소가 만들어진 이래 처음으로 청소차가 거리를 청소하고 있다. 1946.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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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중학교의 수학 시간. 1945.1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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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한국인 여성들이 전화 교환소의 교환기 앞에 앉아 일하고 있다. 1945.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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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주부 2명이 집 근처 개울에서 가족들의 빨래를 하고 있다. 사진을 찍은 미국병사는 ‘비누가 부족하고 한국 전통의 흰 옷을 빨기 힘든 조건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자신들의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고 평하고 있다. 19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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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들이 잔치에서 춤을 추고 전통 민요를 부르고 있다. 이는 해방 이후 매년 개최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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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점으로, 일종의 만물상이다. 적절한 건물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막대기 몇 개와 천막, 상자, 볏짚 정도로 지붕을 삼은 노점을 만들었고, 밤에는 파는 물건을 다시 집에 가져가 보관했다.1947.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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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천시장의 식당. 선반위에 밥과 자반생선, 김치, 콩나물, 시금치, 두부 등의 반찬이 놓여 있다. 남자 손님이 술 한잔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1947.4.6. |
■ 신생 대한민국의 출발
1948년 5월10일 남한에서 총선거가 실시됐다. 국회의원 198명을 선출하고 제헌국회를 구성했다. 총선거는 21세 이상 모든 국민에게 투표권을 부여했다. 보통·평등·비밀·직접 선거의 원칙에 따라 이루어진 한국 최초의 민주주의 선거였다. 제헌국회에서 제정한 헌법을 토대로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을 국내외에 선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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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근교의 작은 마을에서 다가오는 총선거에 관한 전단을 읽고 있다. 전단은 다가오는 총선거 날짜를 알리고 투표를 독려하는 것으로 L-5 연락기에 의해 남부 지방 일대에 뿌려진 것이다. 1948.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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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0 총선거가 실시되는 투표소 입구. 유권자의 신분을 확인하고 있다. 1948.5.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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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중앙청 앞에 모여든 군중들이 손을 들어 ‘만세’를 외치고 있다. 1948.8.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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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혁명은 증산상제님의 갑옷을 입고 행하는 성사재인이다
※ 밀알가입은 hmwiwon@gmail.com (개인신상은 철저히 보호됩니다)
※ 군자금계좌 : 국민은행 474901-04-153920 성사재인(김갑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