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편「중국」 덩샤오핑12 - 실체적 화법(등소평)과 유체이탈 화법(모택동)
모택동 화법과 등소평 화법의 차이점
언어란 개인의 사상과 신념이 구체화되어 행동으로 전이되는 에너지와 같은 존재이다. 조직을 움직이는 지도자의 언어는 ‘실체적 화법’과 ‘유체이탈 화법’이 상존한다. 실체적 생존의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민중들의 희망은 의식주의 문제일 수밖에 없다. 민중이 희망하는 경제문제에 있어서 모택동과 등소평의 언어적 실천방식에 관하여 대략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1. 모택동식 경제 실천방법과 화법
모택동이 쓴 언어적 표현은 이중적인 화법을 구사하고 있다. 외면적으로는 민중의 삶을 풍부하게 해줄 것 같은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선포한다. 앞면에서 밝혔듯 농업과, 공업, 과학기술, 등 많은 모택동식 경제실천론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 방법론을 전개해 나가는 방식이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유체이탈 화법이라는데 문제가 심각하다. 대표적인 것이 4대 해악을 가한다는 ‘참새잡기’가 그 좋은 한 예가 될 것이다.
둘째 우리는 흔히 모택동을 학업을 중도에 포기한 혁명적인 인물로만 알고 있으나 사실 모택동은 대단히 학구적인 자세를 견지하면서 혁명에 임했다. 모택동의 부친이 자신의 대를 이어 농사를 짓기를 강요한 성장과정은 역설적으로 모택동이 평생 책을 읽으면서 학구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었다는 슬픈 상처의 과거사이인 동시에 모택동에게는 지도자로서 끊임없이 탐구해야 하는 현실의 문제였다.
셋째 그의 사상적 기조는 중국 인민의 문제를 초기 마르크스와 레닌에게서 찾으려다, 모택동 사상, 즉 자신이 중국식 공산주의 교조가 되는 사상으로 전이 시켜 버린다. 이것은 사회주의 사상의 뿌리를 중국식 모택동 사상으로 전이 시켜 소련을 배제 시키는 분파적 행위였다. 공산주의 종주국인 소련에서 모택동을 좋게 봐줄리 없었고, 이때부터 소련은 중국을 견제해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 방법은 외교적으로 고립시켜 나가거나 자원과 기술이전을 중단하는 방식을 취해 나간 것이다. 이 때문에 중국은 상당한 경제적 타격을 받게 되었다.
넷째 위기에 처하게 된 모택동은 인민의 문제를 중국의 ‘역사문제’에서 해법을 찾으려 했다. 모택동은 “우리는 공자에서 손문까지의 역사를 요약해 보아야 한다. 이것은 오늘날의 운동으 로 이끌어 나가는 데 중요하다.”(Wind In The Tower)라 했다.
이 얼마나 멋진 화법인가? 마치 역사적 판도라의 상자 속에 그 무엇이 들어있을 것 같은 달콤한 사탕발림의 뉘앙스인 동시에 진중한 그 무엇이 꼭 들어 있게끔 타인이 모르는 화법을 구사하는 것이다. 일명 또 다른 문제가 생길 때 피해 나가려는 염화미소 작전인 것이다.
2. 등소평식 경제실천 방법과 화법
등소평은 유배라는 좌절을 통해 개인적 좌절은 고사하고, 모택동의 독단으로 인한 사회주의 좌절에 대해 끊임없이 그 원인을 분석해 나갔다. 현대화를 위한 그의 정책이 옳았음에도 불구하고 유배를 당하는 아픔을 겪었던 당사자로서, 인민들이 계속하여 모택동을 추종하는 본질 자체가 무엇인지에 관하여 연구해 나갔다.
둘째 인민들이 실패한 모택동을 추종해 나가는 가장 근본원인은 무엇일까? 그것은 모택동이 주장한 역사인식에 있었다는 것이 적어도 이 시기에는 해답이 될 것이다. 중국 혁명의 본질이 왕조를 타파하고 인민중심으로 세상을 개편하려는 대동세계의 건설을 목적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인민의 마음은 왕조에 대한 ‘향수’가 분명히 잠재하고 있었다. 마치 길 잃은 양들이 양치기의 신호에 따라서 움직이다 어느 날 갑자기 양치기가 사라진 후, 우왕좌왕하는 양들의 방황에 견주어 비길 수가 있을 것이다. 적어도 혁명에는 낮은 단계의 민중들이 참여 했지만 아직 기득권을 가졌거나, 가진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그 지독한 권력에 대한 향수가 사라지지 못했다. 더불어 일반 민중의 의식 속에서도 지배를 받으면서 뼈 속까지 파묻혔고, 지시이행을 했던 옛 향수가 없어진 것이 아니었다. 마치 수십 년을 감옥에서 지낸 장기수가 조건부 석방으로 사회 속에 나왔을 때, 스스로 일을 못하고 자살을 선택하는 것과 같은 감옥 향수병에 걸려 있었던 것이다.
모택동의 계획은 치밀했다. 공자에서 순응하는 법칙을, 손문에서 민중의 평등사상이라는 양 축을 저울질 하면서 실천적인 동시에 비실천적인 유체이탈 화법을 동시에 구사한 것이다. 이러한 모택동식 ‘역사문제’에 대한 화법이 민중들에게는 등소평의 실사구시적인 실체적 화법을 압도한 것이다. 적어도 모택동은 아직은 많은 인민들이 향수병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알아 챈 것이다. 5천만 명 이상을 굶어 죽인 모택동식 화법은 이후에도 홍위병으로 둔갑하면서 등소평을 끊임없이 압박하고 괴롭히는 수단이 된다. 자신이 죄를 짓고 그 죄를 타인에게 전가하는 모택동식 화법이 결국은 세상을 모르는 젊은 층에게까지 전이되게 된다.
셋째 역사 문제를 거론해서 민중의 마음을 움직였고, 자신의 실패마저 등소평과 다수에게 전가시키는 신출귀몰한 모택동식 전략에 등소평은 오히려 중국인의 의식과 본질을 이해하는데 부족했기에 실질적인 역사와 문화를 이해해야 한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이는 모택동은 스스로를 회피한 전략에 불과했지만 등소평은 모택동이 던져준 역사와 문화의 파편에 오히려 그 정수를 깨닫게 된다. 그 방법론이 앞으로 중국의 앞날에 현대화와 실사구시로 드러나게 된다.
넷째 등소평의 입장에서는 혁명에 있어 모택동과 어차피 불가분과 관계에 있기에 모택동 사상을 2가지로 분류해 낸 것이다. 즉 모택동 사상의 근원을 추적해서 그의 과거에 있었던 행적에서 긍정적인 것들은 확대해서 마음에 담았고 부정적인 것은 ‘자신의 사상으로 재구성’하였던 것이다. 과거 등소평이 사상적으로 미숙할 때 그는 모택동 사상의 실패가 가져온 사상을 분리하지 않았고 모택동의 정책 실패에 대한 것만을 거론하면서 부정적인 면에서만 편향된 의식을 보여 주었던 것이다. 이러한 결과는 결국 등소평 개인에 대한 좌절만 가져오고, 정책실패를 교묘하게 빠져 나가려는 모택동에 의해서 그 여파는 중국 전체의 혼란과 혼돈만을 야기 시켰을 뿐이다. 이제 등소평은 뚝심과 지혜를 발휘해서 실사구시적인 정치적 태도는 유지하면서, 모택동이 걸었던 과거를 드러내지 않고, 혁명의 차원에서 과거를 종합했으며, 모택동이라는 개인과 그의 사상을 분리해서 마음속에 차곡차곡 담아 실천사상으로 발걸음을 옮겨 나갈 채비를 한다.
어제의 혁명 동지가 모택동식 권력 앞에서는 오늘의 적이 되는 순간, 수많은 동지들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마치 스탈린이 써 먹던 수법과 같이, 모두가 잠든 새벽 트럭 한 대가 조용히 다가와 온 가족을 싣고 조용히 산에서 멈춘다. 그리고 이어지는 총소리. 이와 같은 소련의 처형 방식은 중국의 혁명 역사에서도 그대로 차용되었다. 등소평은 동 트는 새벽이 오기를 기다리는 동시에 역사를 관조하면서 긴 유배기간 동안 몸을 낮추고 지혜를 함양하고 있었다.
1959년 노산회의盧山會議와 등소평의 신념과 사고
등소평이 1959년 다리가 부러진 적이 있었다. 그 당시 중국의 혁명 동지들의 사회적 배경을 바라보면 아직 모택동의 카리스마적 권력이 완전하게 자리 잡기 이전의 분위기가 파악된다. 더불어 등소평에 대한 모택동의 심중이 드러난다. 정치권력의 속성상 필요할 때 베풀고, 스스로 위험을 감지할 때 숙청 시키는 이중의 속성을 살펴보기로 하자.
“등소평은 탁구를 치다가 다리가 부러진 까닭에 1959년 노산회의에서 참석할 수 없었다. 이 회의에서 팽덕회는 모택동에게 대약진 운동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물었고, 이에 모택동은 자아비판을, 팽덕회는 실각을 당했는데 일설에 의하면 중앙 정치 지도자들이 노산에 집결하여 회의를 진행함으로써 생기는 중앙의 공백을 우려해서 모택동은 등소평으로 하여금 중앙에 남아 일상적인 국가 업무를 주관 하도록 배려했다.” 고 전해진다.
한편 등소평의 딸 등용에 의하면 등소평이 매일 정원을 도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확실하면서도 속도가 빠른 아버지의 걸음걸이를 보면서 나는 아버지의 신념, 사고,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싸움을 위한 준비 작업일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술회했다(毛毛, 在江西的日子理)
유배기간과 다리가 부러진 기간 동안에 스스로의 몸을 지켜 가면서, 사고한 등소평에 관하여 유세희 교수는 <인치술을 바탕으로 하는 중국의 리더십> 에서 “이러한 정치적 부침을 겪으면서 오히려 그는 정책추진의 자신감과 함께 정국을 돌파하는 합리적 대안을 만들어 가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고, 역(力)관계가 상대적으로 불리할 때는 시기를 기다리는 헌형의 리더십을 체득함으로써 유연하면서도 원칙적인 품격을 형성하였다” 고 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