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과 유가로의 복귀, 그리고 박해 등을 거치는 과정에서 20~30대에는
넓었던 그의 관심이 실용으로 좁혀진 점을 들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또한 천주교 교리와 비슷한 정약용의 새로운 생각들이 모두 천주교
의 영향이었다고만 할 수도 없다. 실제로 정약용에게서 볼 수 있는 천주
교 교리와 비슷한 관념들은 고대 유가 전통은 물론, 신유학 전통, 그리
고 조선 성리학 전통 자체에서도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인격적 주재자, 초월자로서의 ‘상제’ 개념은 고대 유가 경전에 자주 나온
다. 장재張載(1020~1077)의 [서명西銘]도 ‘사천事天’을 중시하였으며 상제
의 개념이 거기서 나올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위에서도 보았듯이,
조선에서도 이황, 윤휴 등의 하늘[天 ]개념은 분명히 정약용과 비슷한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또한 정약용의 상제 관념은 ‘천지의 생물生物’ 이
나 ‘조화造化’와 같은 주자 성리학의 표현들에 담겨 있는 의미들에서 크
게 벗어 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으며, 심지어는 성리학의 ‘리理’ 개념과
도 통한다고 할 수 있겠다. 따라서 중형仲兄 정약전에게 보낸 편지에서
정약용이 “하늘이 다산茶山을 내가 묻힐 땅으로 마련해 주고 보암산寶
岩山 밭 몇 이랑을 나의 식읍지로 마련해 주었다”고 이야기 했을 때 그
가 말한 ‘하늘’ 이란 천주교의 천주 이기보다는 유가 전통 속의 ‘하늘[天]’
이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천’과 ‘상제’ 이외에 기독교 교리와 비슷한 다른 개념들도 유가 전
통에서 나올 수 있는 것들이었다. 예컨대, ‘영명靈明’ 개념은 [맹자孟子]
의 여러 구절들에 대한 주석으로부터 나올 수 있는 개념이었으며, 그
의 ‘성기호性嗜好’설도 [맹자]· [중용中庸]의 구절들로부터 나올 수 있었
다. 백민정이 보여 주듯이 ‘자주의지’ 로서의 ‘권형權衡’ 개념도 굳이 기
독교만이 아니라 [맹자]나 주희의 논의로부터 나올 수 있는 것이었다.
또한 리의 실체성을 부인하고 [중용]의 ‘미발未發’ 개념에 대한 주희의
해석을 비판하는 정약용의 견해가 천주교의 영향 때문인 것으로 흔히
보지만, 이봉규가 지적하듯이 이는 천주교 뿐만 아니라 양명학의 수용
을 통해 유학 전통을 새롭게 해석한 성호좌파의 영향이었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정약용이 일단 천주교 교리들에 회의를 느껴 천주교 신앙을
버린 후에도 그중 ‘상제’· ‘영명’ 등의 개념들을 유가 전통의 개념들과 연
결시켜 유지하려 했던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심지어는 정약용이
천주교에 접하기 전에 고대 경전으로부터 ‘상제’ 개념을 받아들여 지니
고 있었을 가능성을 제기하는 학자도 있다. 정약용에게서 보이는 이
같은 측면을 두고서 전통적 유학과 서양 기독교 사상 사이의 조화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보다는 그가 천주교의 일부 관념을 받
아들여 전통 유학 체계 속으로 포함 시키게 된 것이라고 보는 편이 더 정
확할 것이다. 기독교 신학에 자극 받아 그가 주자학, 나아가 유가 전
통 전체를 살피는 과정에서 그것들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그러한 깊
어진 이해에 바탕해서 유가 전통을 더 확고한 토대 위에 구축하고자 했
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