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편「중국」 덩샤오핑14 - 탐욕스러운 4인방을 분쇄시키고 삶을 도모한 화국봉
권력은 잔인한 것이다.
▲부연 설명이 필요 없는 당대의 실세, 강청
모택동의 후광을 받고 수상대리까지 오른 화국봉은 이제 정치권력의 밑천이었던 4인방에 관하여 고심하기 시작한다. 처음에 그는 “모택동이 말하고 지시한 그 어떤 단 한마디의 교시는 무조건 옳다. 그의 말은 진리이고 전 인민은 무조건 그 교시를 받들어야한다”라는 양개범시兩個凡是를 내세운 화국봉은 서서히 권력의 수장으로 눈치를 보는 입장으로 선회할 수밖에 없었다. 인민들의 개화된 눈이 현실적인 정책을 펼치는 등소평 쪽으로 기울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 당시 등소평은 두 번째 천안문 사태에서 벌어진 인민 살상에 대한 책임을 홀로 뒤집어쓰고 (물론 4인방이 만든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세 번째 실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모택동이 사망한 직후 화국봉이 전면 등장하게 된 배경에는 등소평에게 결과적으로 천우신조의 기회를 제공한 역사적 사건이 되고 말았다. 그것은 등소평이 실각과 동시에 복권의 길을 함께 열어 놓게 만든 숨겨진 비밀 카드가 있음을 알리는 것이다 .
그 비밀 카드는 등소평 스스로가 만든 ‘긍정의 힘’과 ‘인민의 결속된 힘’ 이었다. 등소평은 수많은 경제정책 실패에도 불구하고 전 인민들이 모택동을 지지하는 것을 본 후, 자신에 대한 긍정적인 성찰로 이어졌고, 그 긍정적 성찰은 모택동을 비판하기보다는 인민을 위해 현대화된 자본주의 개념을 이식 시키는 쪽으로 입장을 정리한 것이다. 이러한 등소평의 긍정적인 사상이 결국은 인민의 마음을 움직였고, 세월이 흘러가면서 인민을 하나로 결집시키는 위대한 힘이 되었다. 등소평 스스로가 억울하게 당한 변명을 하지 않은 것이 썩은 정치권력을 바로 본 인민들의 눈에는 신선한 충격이었고, 등소평에게 더 가까이 다가 설 수 있는 길잡이가 된 것이다.
비생산적인 정책을 가지고 인민을 살찌운다는 거짓말이 비밀의 카드인 것처럼 선전했던 과거의 모택동 선동주의자들은 이제 개명된 무서운 민중의 힘 앞에 서게 되었다. 인민들은 그들이 조성한 여론의 힘으로 등소평의 복권에 힘을 실어 주었다. 인민들은 세상을 바꾸기 위한 카드로 제물을 원했다. 제단에 제물을 바침으로 인하여 등소평을 복권 시키려는 의중이었다. 이것을 만족 시킬 수 있는 제물이 4인방임에는 인민들 모두가 공감하고 있었다. 화국봉은 이제 위대한 인민의 힘을 자각하고 모택동 교주 사상인 양개범시의 입장을 철회하고 4인방 체포 작전에 동참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4인방의 권력에 대한 욕심과 파멸
▲현대판 측천무후로 통했던 모택동의 부인 강청, 그는 군사재판에 회부됐고, 결국 1991년 스스로 자살하면서 생을 마감했다
4인방이 실수한 것은 권력에 대한 욕심이었고 민심의 흐름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한 것이다. 그들은 모택동이 죽은 후에도 그 후광이 영원히 지속 될 줄 착각했다. 그러나 민심은 이제 4인방으로 인해 좌절되었던 등소평의 ‘4개 현대화 정책’에 갈증을 느꼈고 희망을 찾고자 했다. 한번 이반된 민심은 4인방의 힘으로 두 번 다시 되돌릴 수 없었다. 모택동의 일인 카리스카에 의해 지배되었던 세상과 같은 달콤한 솜사탕은 사라진지 오래이다. 죽은 자의 힘은 현실 속에서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을 착각한 4인방의 위대한 실수였던 것이다. 물론 모택동이 살아있어 그들에게 계속 힘을 실어주었다면, 역사는 4인방의 체제로 권력이 승계 되었을 터이고, 등소평은 아침의 흰 꽃을 선물 받으면서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인간이 마지막 가는 저승길에 발을 내 디딜 때 하늘은 마지막 작별의 키스를 그 어떤 방식으로든 예견케 한다. 모택동이 생명의 호흡을 하고 있을 때 까지만 해도 4인방에게는 권력의 에너지가 되었지만, 아쉽게도 그 에너지는 4인방을 위한 희망의 메시지가 아니었다. 그는 죽기 불과 몇 개월 전에 좌도 우도 아닌 화국봉에게 후계자 자리를 물려주면서 세상을 떠났다. (모택동은 죽기 전에 조용하고 넌지시 4인방의 견제와 분쇄지시를 시기를 봐 가면서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주장도 최근에 제기된다)
이러한 모택동의 중도적 선택은 결국 중국의 미래에 대한 대안 책으로 등소평을 염두에 둔 것이다. 화국봉을 선택했다는 것은 결국 자신이 죽고 난 이후 4인방의 예봉을 피해 나갈 수 있는 인물이 화국봉 밖에는 없다는 것을 간파한 것이다. 그와 동시에 등소평과도 적대적인 권력 투쟁을 화국봉이 선택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염두에 둔 속 깊은 인사정책이었다. 사실 모택동의 입장에서는 등소평이 그간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실각을 당하면서 까지 모택동의 사상을 전면에 나서 비난하지 않은 것에 대한 하나의 보답이었을지도 모른다. 만일 등소평이 공개적으로 모택동의 사상을 전 인민들 앞에서 비난했다면 문제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최소한 모택동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죽은 이후를 지켜 줄 사상적 동반자가 필요했던 것이다. 더불어 자신의 죽음으로 인하여 중국 전체가 불안한 정국 상황에 처 할 때, 4인방과 등소평의 문제를 중도적 입장에서 해결할 수 있는 인물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가 선택한 중도적 대리인으로 화국봉이 결국 선택되었다. 권력을 승계한 몇 개월 동안 정국은 모택동의 생각대로 정확하게 흘러갔다. 죽음을 눈앞에 둔 모택동에게 4인방은 숨 돌릴 틈을 주지 않고 정권을 잡기 위해 중국 내부 상황을 위기로 몰고 갔다.
그 탐욕스러운 결과가 천안문 사태를 억지로 만들어 일만 명 이상을 살해한 것이다. 그러나 비단 천안문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도 4인방은 제단에 피 묻은 제물을 만들기 위해서 정신이 흐려진 모택동에게 정국상황을 자신들이 유리한 고지에 오르기 위해 많은 거짓 진술을 자행한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등소평이 모택동 사상을 짓 밝고 있다는 ‘허수아비’ 이론이었다.
모택동이 죽음을 앞두고 중국의 최고지도자로 선택한 화국봉이 손에 권력을 쥐어주고도 스스로 움켜 질 수 없었던 이유는 실체적인 실권이 3조각으로 나뉘어 졌기 때문이다. 화국봉 자신은 사회주의 교조인 모택동의 후계자로 선택되었다는 점을 빼고는 특별히 권력과정에서 내세울 수 있는 것이 부족했다. 사실상의 권력은 4인방이 주도적으로 쥐고 있었다. 그러나 등소평에게는 인민의 위대한 힘이 있었다. 그리고 등소평과 뜻을 같이하면서 조용히 웅크리고 정국을 주시하고 있으면서 현대화 추진에 보조를 맞추려는 많은 군소 지도자가 따르고 있었다. 이것이 초기 등소평을 비난했던 화국봉이 스스로 4인방을 처단케 하는 동기로 작용한 것이다.
화국봉의 입장에서는 그 스스로가 4인방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어차피 그들의 손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는 사실을 집권하면서 알아차린 것이다. 화국봉은 그가 살아남기 위해서 군대의 힘을 빌러 4인방 체포 작전에 나서 법정에 세웠지만 등소평의 입장에서는 실각된 백의종군인 입장에서 화국봉에게 탄원을 해서라도 복권을 해야만 했다. 국가와 인민을 위해서는 국가 조직의 직위가 등소평에게 필요했던 것이다. 그가 필요했던 것은 권력이 아니라 그 권력에 서서 인민을 위한 중국사회주의에 대한 비전과 현대화 정책을 가속화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화국봉(좌) 등소평(우)이 1986년 전국인민대표대회 전체회의에서 쉬는 시간, 휴게실에서 담소를 나누는 사진
등소평은 결국 복권 되었고, 그의 신념대로 이제 중국을 개혁•개방시키기 위해 일관된 조정정책을 펼쳐 나간다. 물론 정치권력의 기반을 확보하기 위한 권력투쟁을 단계적으로 설정한 것도 잊지 않았다. 아직 화국봉을 중심으로 하는 범시파凡是派와 진운을 중심으로 하는 보수파와의 ‘노선 투쟁’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