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작도烏鵲圖 5<봉사잔치와 송월松月의 만남>
중학교 때 재미있게 보던 드라마가 있었다. 홍길동전이다. 얼마나 재미있었던지 어디서 놀다가도 이 시간이 되면 집으로 귀가를 했다. 시간이 촉박하면 걷지 않고 뛰었다. 그런데 소풍을 갔던 곳에서 우연히 그 촬영 현장을 목격했다. 운수가 참 좋았다. 그런데 방송에서 보던 것과 달리 별 재미가 없었다. 내가 본 것은 주인공 홍길동이 산길을 걸어가는 장면이었다. 저건 무엇을 의미하는 대목일까. 편집의 과정을 거쳐 완성된 드라마로 TV에 방영되기 전까지는 그 퍼즐조각 같은 장면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드라마든 영화든 촬영 현장에서 본 장면이 편집의 과정에서 어떻게 쓰일지는 알 수 없다. 어떤 장면은 과거를 회상하는 것일 수도 있고, 어떤 장면은 주인공이 잠을 자며 꾸는 꿈을 묘사한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내가 촬영현장에서 본 장면이, 미래의 얘기인지 현재의 얘기인지 과거의 얘기인지 편집의 과정을 거쳐 방영된 TV 화면을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었다. 액면 그대로 해석했다가는 빗나간 화살이 되고 만다.
상제님 진리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가끔 중학교 때 우연히 목격했던 드라마 찍던 현장이 떠오른다. 도전을 통해 상제님 공사 말씀을 읽으면서 도무지 알 수 없는 대목을 만날 때면 더욱 그렇다. 공사의 참뜻이 알고 싶어 나름, 지식이라 말할 것도 없는, 온갖 지식들을 동원해서 해석을 해보려 하지만, 모사재천한 공사가 성사재인되어 현실 역사위에 펼쳐지기 전까지는 나의 해석이라고 하는 것은 다만 추측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봉사잔치다.
종정님의 도전 해석을 보면 봉사잔치의 의미를 더욱 확연히 느껴볼 수 있다. 종정님은 말馬이 나오는 대목이면 무조건 황극 종통공사라 해석해 버린다. 그러나 현실 역사위에 펼쳐진 것을 보면 종정님을 위한 종통공사가 아니다. <말이 콩밭으로 들어가는데 안 쫒아>라는 말씀을 종정님께서는, 사람들이 자신을 따르리라는 의미로 해석하지만 현실 역사에서는 콩밭을 짓밟아 초토화 시켜버리는 말을 어서 끌어내라는 혁명으로 구체화되었기 때문이다. 상제님 공사가 현실 역사 위에서 어떻게 쓰일 것인지는 되어놓고 봐야 알 수 있는 것이다. 섣불리 예단했다간, 아라사 병사가 내 병사라 했던 상제님 말씀을 믿고 진주하는 소련군을 환영하러 갔다가 총 맞아 죽는 것 같은 비참한 상황을 맞이할지도 모른다.
또 종정님께서 잘 쓰시는 문구중 하나가 <무슨 도수가 인사화 되었다>는 말이 있다. 상제님께서 이런 공사를 보셨으므로 이것을 인사화 한다고 떠벌리는 것이다. 상제님은 모든 공사 내용을 다 성편되도록 하지 않으시고 성편 될 것을 일부만 허락하셨다. 성편되지 않은 공사내용도 인사화 되어야 성사재인을 할 것인데, 종정님은 성편된 말씀에만 얽매여 공사의 인사화만 외치다보니 보이지 않은 중간과정은 다 생략되어 마치 사상누각을 짓는 실정만 거듭할 뿐이다.
성사재인은 성편된 말씀만을 이루는 일이 아니다. 그러니 무슨 말씀의 인사화라고 떠벌리는 것 자체가 도수주의자의 노예 신앙이다. 성편되지 않은 말씀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성편된 책 속의 말씀에만 얽매인다면 결국 나갈 바를 몰라 공중에 붕 뜨게 되는 것이다. 도수주의는 장님이 코끼리 만지는 격이라 절대 일을 이루지 못한다. 상제님께서 말씀 성편에 제한을 두신 것은 미주알고주알 성사재인의 도정이 나갈 바를 가르치지 않는다는 말씀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성사재인하는 일꾼은 절대 도수를 인사화 시키는 마음으로 일을 하지 않는다. 상제님 일꾼은 상제님 정신에 정통해야 한다. 상제님께서 비겁에 빠진 천하창생을 건지려고 사람으로 다녀가신 그 마음을 나의 심법으로 삼아야 한다. 어떻게 하면 창생을 살릴까 하는 고민을 하는 것이 성사재인하는 일꾼의 마음이다. 상제님의 마음으로 현실 역사 속에서 먼저 할 일과 나중 할 일을 가려서 도정을 경영하다 보면 저절로 상제님 말씀과 맞아드는 것이 상제님 진리의 묘미다.
무슨 도수가 나왔으니 이제 그 도수를 인사화 한다고 떠들어본댔자 상제님의 공사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상제님 진리의 대의를 품고 일을 추진해 나가다 보면 기운이 붙어 모든 일에 신령스러움이 있는 것이지, 지도자의 도수의 인사화 선언을 통해서 모든 일이 신령스러워져서 일에 성공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만약 종정님의 도수 선언을 통해 기운이 신령스러워 졌다면 도세가 저렇게 쪼그라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순신님의 <진법 일기16>을 읽다가 보면 성사재인하는 일꾼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 잘 표현되어 있다.
<식사 자리에서 ‘부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는 지영석의 물음에 브론스 잉그람은 “더 열심히 일할수록 운이 따를 것이다”라고 답했습니다. 운은 열심히 일할 때 따르는 것이라는 지극히 평범하면서 핵심적인이 말이 그의 철학이 되었습니다.(이순신, 진법일기 16- 좋은 사람 엘스비어 회장 지영석)>
상제님 진리의 대운은 도수를 선언하고 앉아 있는 사람에게로 가지 않는다. 현실을 보면 종정님께서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강연을 한다고 해서 사람이 들어오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입으로 선언만 하지 말고 실지 역사 속에서 일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종정님의 가장 큰 문제는 언제나 선언만 하고 그냥 앉아 있다는 것이다. 세상이 떠받들어 주겠지 하는 마음에 세상과도 어울리지 않는다. 상제님 말씀을 종정님이 읽어서 선언만 하면 그것이 성사재인인가. 그래서 무슨 일이 이루어진다는 말인가?
도전은 상제님 진리의 대의를 깨우치는 책이다. 도수를 해석하여 선언하고 그냥 앉아서 때만 기다리고 있으라는 책이 아니다. 사실 도전에 성편된 상제님 말씀을 면밀히 살펴서 읽어본다 한들 역사 전개의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한다. 이것은 지난 도사를 돌아다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상제님 진리를 움켜쥐고 있다고 자부하면서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도정을 경영했다. 생각해보면 도수주의자와 기회주의자들의 발호를 막기 위해 역사전개의 앞날을 내다볼 수 있는 말씀은 성편되지 않도록 상제님께서 감추어 놓으셨다. 그러므로 도전은 다가올 일을 내다보는 책이 아니라, 서전서문의 말씀처럼 도전은 득기심得其心하는데 중요한 말씀이 성편되어 있는 책이다. 도전을 읽어 득기심得其心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로 상제님의 마음을 취하는 일이다. 상제님 마음을 깨우치는 것 이것이 곧 일심이다.
오직 천하창생을 위하는 마음, 즉 일심을 갖고 세상 속에서 도정의 일을 추진해 나가다 보면 세상일에 도를 통해 앞날을 내다보는 지혜가 열린다. 지혜라는 것은 누가 가르쳐 준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상제님께서는 마음자리가 열리지 사람에게 앞날을 내다보는 지혜 또한 열리지 않도록 막아 놓으신 것이 도전성편의 묘미라 할 것이다. 앞 세상 굴러가는 비결이 도전에 다 담긴 것 같은데 도전을 성편했다는 종정님마저도 세상공부를 등한시 하고 도전만 읽었기 때문에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한다. 도전공부는 심법공부요, 세상공부는 지혜를 여는 공부다. 세상공부를 통해서만이 도전의 행간 속으로 숨어버린, 성편되지 않은 상제님 공사를 읽어낼 수 있다.
단언하지만 도전이라는 책 속에는 개벽하는 날짜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개벽하는 날짜는 상제님께서 일심가진 자의 마음과 성편된 말씀의 행간 속에 감추어 놓으셨다. 공연히 종정님 염화미소에 속아 종정님도 모르는 개벽일자를 찾아 도전이며 갖은 비결서秘訣書들을 샅샅이 뒤질 필요는 없다. 먼저 상제님이 어떤 마음을 갖고 이 땅에 오셨는지 그 마음을 얻으려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 마음을 얻고 세상 속에서 인정받는 진정한 일꾼이 되면 세상을 보는 안목이 열려 자연스럽게 앞날을 내다 볼 수 있는 지혜가 열리는 것이다. 그러면 상제님은 항상 내 곁에 임어해 계시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상제님께서 일심가진 자는 일일이 다 찾으신다는 말씀은 이를 두고 하신 말씀이리라.
혁명이 시작되기 전, 신앙의 희망이 없었던 그 시절에, 필자는 아래 도전 성구를 읽으며 실낱같은 신앙 회복의 희망을 품어보기도 했었다.
우리가 반드시 서로 만나리라
1 상제님께서 하운동에 오랫동안 머무르시면서 종종 본댁을 왕래하시므로 형렬도 또한 상제님의 본댁에 자주 왕래하니
2 그 길 중간에 있는 솟튼(鼎魚院) 주점 사람들이 그 빈번한 왕래를 괴이하게 여기더라.
3 11월에 하루는 상제님께서 본댁에 계시므로 형렬이 가 뵈려 할 때
4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김을 꺼려 그 길을 피하여 샛길로 가던 중 솟튼재 밑 송월(松月)에 이르러 뜻밖에도 상제님을 만나니 마침 하운동으로 오시는 길이라.
5 형렬이 크게 기뻐하여 샛길로 든 이유를 아뢰며 말씀드리기를 “만일 이 길로 가지 않았으면 서로 엇갈려 만나지 못하였겠습니다.” 하니
6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비록 동서로 멀리 떨어져 있을지라도 반드시 서로 만나리라.
7 네가 나를 좇음은 다만 마음을 취함이요, 금전이나 권세를 취함이 아닌 연고라. (증산도 道典 3:29)
김형렬 성도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샛길로 상제님을 뵈러 가다가 송월에서 뜻밖에도 상제님을 만난다. 김형렬 성도가 기뻐하며 이 길로 온 까닭에 대해 말하자 상제님께서는 네가 나의 마음을 취해 좇았으므로 비록 동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도 서로 만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세상의 천덕꾸러기가 되어 부평초같이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닐 때 위의 상제님 말씀은 큰 위안이 되었다. 마음을 취했으므로 동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어 신앙의 끈을 마음속에서 놓아버리지 않았다. ‘어쩌면 나도, 단절된 듯한 신앙을 회복할 수 있겠구나!’희망을 품은 것이다. 그랬더니 거짓말 같이 혁명의 소식이 춘신인양 당도한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상제님께서는 도탄에 빠진 백성을 건져 안정을 누리게 하시러 사람으로 오셨다. 백성을 잘 되게 하려는 오직 한마음으로 인간의 길을 걸으신 것이다. 그것은 인간혁명의 길이었다. 그러므로 상제님 신앙은 백성을 위하는 일심을 가지면 쉬워도, 백성을 쥐어짜는 금전이나 권세를 취하려 하는 두 마음을 품는다면 <잦히고 눕히고 엎치고 뒤치고 들어치고 내치고 좌(左)로 돌리고 우(右)로 돌리고>해서 신앙하기 어려운 것이다.
똑똑히 들어 두어라
1 하루는 형렬이 상제님께서 출세하실 때를 여쭈니 “응.” 하시고 “나의 말을 듣기가 어렵다.” 하시며
2 “잦히고 눕히고 엎치고 뒤치고 들어치고 내치고 좌(左)로 돌리고 우(右)로 돌리고…, 알겠느냐? 똑똑히 들어 두어라.
3 내가 도솔천궁에 있다가 서양 대법국 천개탑으로 내려와 모악산 금산사 삼층전에 머물며 경주용담 구경하고
4 고부 객망리 강씨 문중에 탄생하여 기해년에 포(胞)하고 경자년에 득천문(得天文)하고 신축년에 대원사에서 도통하고
5 임인년에 너와 상봉하고 계묘년 봄에 동곡에 들었노라.
6 나의 말은 쌀에서 뉘 가리기와 같으니라. 알아듣겠느냐?
7 알기 쉽고 알기 어렵고 두 가지다. 알아듣겠느냐?
8 우리 일은 쉽고도 어려운지라, 알고도 어렵고 모르고도 쉬우니라.
9 똑똑한 것이 병통이니 식자우환(識字憂患)이라. 아는 것도 병이 되느니라.” 하시니라.
(증산도 道典 6:11)
이 성구를 읽으면서 상제님께서 이 땅에 오신 뜻을 면밀히 살펴야 할 것이다. 종통을 주장하지도 말고, 천지공사 도수도 살피지 말고 오직 상제님의 백성을 생각하는 그 마음을 내 마음으로 삼는 일에만 집중해보자. 이것이 잘못된 신앙으로 상처받은 내 마음을 치유하는 힐링이 될 것이다.
종정님 도훈은 사람의 마음을 병들게 하니 이제 그만 하셨으면 좋겠다. 사실 도장에 발을 끊은 것도 따지고 보면 종정님 말씀을 들으면 스트레스가 쌓였기 때문이다. 만병의 근원이 스트레스인데 당시로서는 도장에 그만 나가는 것이 살길이었다. 그래서 종정님 말씀이 들리지 않는 곳으로 나는 도망쳤었다. 도장이 성장하려면, 종정님이 두 마음 품은 자들을 말끔히 정리하고, 묵언수행에 들어가는 길 뿐이다.
※ 혁명은 증산상제님의 갑옷을 입고 행하는 성사재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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