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편「중국」 덩샤오핑13 - 1976년 천안문 사건과 4인방과 투쟁하는 등소평
중국 천안문 사건(톈안먼)의 3단계
▲ 1919년 제 1차 5.4 운동 당시 천안문 사건
대부분의 독자들은 민주화를 열망하는 ‘천안문 사건’을 1989년으로 한정지어서 생각을 하고 있다. 천안문 광장에 집결한 군중 그리고 탱크 앞을 막아선 이름 모를 사내를 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 역사에서 천안문 사건은 크게 3단계로 분류된다.
모택동의 대형 초상화가 걸려있는 천안문(톈안먼)광장은 중국을 상징하는 국기와 같은 역할을 한다. 도도히 흐르는 역사에서 우주에서도 그 모습이 선명한 만리장성이 백성의 주검 위에서 이룩한 역사를 캐묻는 왕조의 흔적이라면, 천안문 광장은 혁명과 민주화를 위한 현대적 역사로 그 의미가 크다 할 것이다. 먼저 1919년 5월 4일 일어난 제 1차 천안문 사태는 북경대학생들이 주축이 되서 제국열강들과 반봉건주의를 위해 거국적으로 일어난 혁명운동 사건이다. 이 첫 번째 천안문 사태는 대한제국의 3.1운동과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 1976년 제 2차 천안문 사건. 주은래 사망이 도화선이 됐고, 4인방의 만행에 대해 규탄한다.
두 번째 천안문 사태는 주은래 사망이후 몇 개월 지나지 않아 연이어 사망한 모택동과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모택동의 3번째 부인 강청(장칭) 일파가 중심이 된 4인방체제의 권력놀음은 주은래와 등소평을 실각 시키려는 음모로 진행 되었다. 급기야 주은래가 사망한 이후 추모제를 위해 천안문 광장에 모인 1만 여명의 인민들을 살상 한데서 촉발된 사건이다.
▲ 1989년 제 3차 천안문 사건. 외신에 전해진 유명한 사진(위) 1989년 5월 4일 천안문 광장을 가득 메운 민주화 시위(아래)
세 번째 천안문 사태는 1989년 6월에 발생한 민주화에 대한 정치적 시위였다. 군인을 동원하여 무력으로 잔혹하게 진압한 이 사건은 천안문 광장에서 탱크를 맨 몸으로 막아선 사진 한 장이 전 세계로 타전 되면서 중국 사회주의 발전과 그 모순을 알아 볼 수 있는 중요한 발단이 된 사건이다.
여기서 우리는 천안문 사태에 관하여 소중하게 기억해야할 단서를 찾아야 한다. 3번의 천안문 사태는 제국주의 • 반봉건 타도 혁명--> 주은래의 추모집회로 파생된 모택동과 그의 처 강청에 대한 항위 시위--> 민주화 시위로 이어진 3번의 대규모 천안문 광장 혁명 사건이 시사하는 바이다. 이는 비록 각각 시대적 요구 사항이 비록 달랐지만 억압받는 민중은 언제나 깨어 있는 정신을 가지고 혁명을 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1976년 제 2차 천안문 사태와 주은래• 모택동의 사망
▲ 유소기 (좌) 모택동(중앙) 주은래(우)
1969년 유소기(류사오치)의 사망에 이어서, 1975년 4월 5일 대만의 장개석이 87세로 사망한다. 대만의 실권은 그의 장남인 장경국(장징궈)이 중국국민당 총통으로 취임하면서 자연스러운 정치적 부자세습이 이루어진다. 한편 중국은 1976년에는 제 2차 천안문사태가 일어나는 동시에 주은래와 모택동이 몇 개월 간격을 두고 사망하게 된다.
▲ 4인방 중 강청이 체포 후 재판정으로 들어서는 모습(좌) 젊은 시절 모택동과 강청(우)
1976년 강청(장칭) 등 4인방 중심의 문화대혁명세력이 실용주의 노선을 추구해 나가는 등소평을 재차 실각시키려는 운동을 전개해 나간다. 이들의 행위는 모택동 사후 후계 권력을 차지하려는 것이 그 주된 목적이었다. 먼저 4인방의 계획인 주은래와 등소평을 모두 실각시키는 데는 일단 임시적으로 성공했다. 4인방 중 강청이 등소평을 거세하려던 작전이 얼마나 유치했는지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등소평에 대한 공격은 강청의 ‘『수호지』비판’으로 분명해졌다. 강청은 “이 소설에서 송강宋江이 첫 번째 두령 조개晁開를 허수아비로 만들었듯 현재 당중앙에는 모택동 주석을 무시하는 자가 있다”고 발언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주은래와 등소평을 비판한 것이다.
강청은 모택동의 부인으로 4인방 중에서 최고의 실권을 가지고 있었다. 최고 권력자 부인의 입에서 나온 ‘수호지 비판’은 일견 유치하게 보였지만 그 파장은 만만치 않았다. 그만큼 4인방 주변에는 권력을 위해 기생하는 정치적 박쥐들이 많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역사의 물결은 4인방이 이러한 유치한 전략을 펴 나가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지 않았다.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터져 나왔고 그 물결이 큰 파고로 번져 나가 담벼락을 무너트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1976년 1월 6일 4인방에게는 눈에 가시 같은 존재였던 주은래가 사망한 것이다. 그는 인민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었고, 추모식장에서 가장 친분이 두터웠던 등소평이 추모사를 맡았다. 사실 주은래와 등소평은 프랑스 유학시절부터 인연을 맺으면서 가장 가까운 사이였고, 등소평 스스로가 ‘ 주은래는 항상 자신의 형님이었다고 『등소평 문선』에 술회했을 정도였다. 이러한 인연은 1952년 등소평이 중앙에 발탁되기 까지 야전에서 군사지도자로 활약할 때 까지 직간접적으로 그를 보살펴 주었던 인연이 있기도 하다.
1976년 4월 3일 청명절에 북경 천안문 광장에는 약 1 백만 명(10만 명이라 축소해서 기록한 곳도 있다)에 달하는 인민들이 모여들었다. 주은래를 추모하는 인민들은 그를 추모하는 글과 꽃으로 천안문 광장을 가득 메웠고 그를 추모 하려는 인파들이 꼬리를 물고 있었다. 인민들은 주은래 추모와 동시에 모택동과 강청을 은유적으로 비난하는 글을 내걸었고, 강청은 이러한 모든 것을 치우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4월 5일 아침 마침내 분노한 군중들의 항위 시위로 이어졌다. 군경이 진압에 나서 이 시위로 1만 여명이 피를 흘리면서 죽어갔다.
강청에 대한 인민들의 반감은 더욱 커 나가는 가운데 모택동은 눈을 감고 오히려 강청 일파의 요구를 받아들여 그 배후로 등소평을 지목하고 다시 실각 시키는 계기로 삼았다. 이러한 국내의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모택동은 자신의 후계자로 키운 화국봉(화궈펑)에게 당 부주석과 국무원 총리를 맡겼다. 이제 중국의 역사는 안개 속으로 향해가는 듯 했으나 몇 개월 후에 모택동이 죽게 됨으로 대반전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모택동의 죽음으로 인한 4인방의 행동은 극도의 혼란 상태에서 최후의 발악을 하게 만들었다. 등소평이 추진하는 4개 현대화 정책이 친자본주의 노선이라는 구실(주자파)로 맹렬하게 공개비판을 해 나갔다. 그러나 쓰러지면 일어서는 오뚝이 등소평도 4개 현대화 천명을 계속 부르짖으면서 가열 차게 투쟁을 이어 나간다. 모택동이 후계로 지목한 화국봉은 초기에 등소평이 추진하는 친자본주의 노선도 아니고 사인방의 노선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이 둘의 절충점이나 조화로운 길을 선택하는 노선주의자도 아니었다. 그는 단지 모택동 개인을 추종하는 인물이었을 뿐이다. 개인적으로는 중도노선을 밟아 나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큰 틀로 양면에서 보면 기회주의의 속성을 간직하고 있었다.
화국봉에 관해서 『새로운 황제들』에 기록된 내용을 잠시 살펴보기로 하겠다.
화국봉은 1959년 모택동의 고향인 호남성 소산현의 당서기를 지내면서 거대한
방문객 숙소를 짓고 새로운 도로와 철도를 연결시켜 방문객의 수송과 참배를
편하게 만들어 처음으로 모택동과 만났으며 이로 인해 중앙으로 발탁되었다.
그가 부총리로 기용된 것은 원래 사인방의 한명이었고 상해의 공장노동자 출
신이며 강청이 주은래의 뒤를 이어 수상으로 앉히려던 왕홍문을 견제하기 위
한 것이다. 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초기 화국봉은 열렬한 모택동의 추종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자신에게 권력의 최고수장까지 만들어 준 사람이 바로 모택동 아니었던가. 그는 모택동의 지시는 무조건 옳다고 주장하는 ‘양개범시兩個凡是’를 인민들에게 강조하기 시작했다. 모택동을 사회주의 유일신으로 받드는 양개범시 사상은 인민들에게 외면당했고, 이미 스스로가 만든 신격화 된 그의 사상은 사망과 더불어 우주 저편으로 날아가 버렸다. 모택동의 잦은 경제정책 실패로 인하여 인민들은 등소평이 추진하는 4개 현대화 정책에 많은 지지를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화국봉은 이때 까지만 해도 분위기를 전혀 간파하지 못하고 오직 모택동에 대한 충성심만 남발하고 있었다. 이 분위기에 고무된 4인방은 줄기차게 등소평을 제국주의와 마르크스주의 조차 분간 못하는 애송이 흑묘백묘 주의자라고 일격을 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