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가 특히 정약용에게 깊은 영향을 준 것으
로 보인다. 정약용에 대한 리치의 영향은 이벽의 의견을 반영하여 1784
년 작성해서 정조에게 제출했던 [중용강의]를 유배 기간 중인 1814년
보완하여 완성한 [중용강의보]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또한 정약용의
‘천’이나 상제 개념만이 아니라 ‘자주지권自主之權’, ‘권형權衡’ 등의 개념
에서도 리치의 영향을 볼 수 있다 . 그 외에도 정약용의 생각과 저술에
서는 여러 면에서 리치의 영향이 나타난다. 예컨대 ‘리’와 ‘기氣’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리를 “의부지품依附之品”, 기를 “자유自有”라고 한 것은
[천주실의]의 영향임이 분명하며, 그에 바탕해서 그가 음양이나 오행
을 비판하는 방식도 [천주실의]의 내용과 아주 비슷하다. 사실 이같
은 리치의 영향은 17~18세기 동아시아의 유학자들에게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렇듯 분명히 천주교 교리에 흥미를 느끼고 받아 들였던 정
약용은 나중에 가서 천주교 신앙을 버렸다. 정약용 자신의 언급들이
그가 천주교 신앙을 버렸음을 분명히 말해주고 있다.
가장 직접적인 언급은 1797년 천주교 신자라는 계속된 비판에 대해
소명하기 위해 동부승지同副承旨 직을 사직하면서 정약용이 정조에게
제출한 자명소自明疏에 담겨 있다. 이 자명소에서 그는 아주 강렬하
고 단호한 어조로 천주교를 비판하고 자신이 천주교를 떠났음을 분명
히 밝히고 있다. 예컨대 그는 자신의 인척들이 연루된 1791년의 진산사
건 이래 “분하고 원통하여 (천주교도들을) 나의 원수같이 미워하고 흉악
한 역적처럼 성토할 것을 마음으로 맹세”했으며, 그 후 “양심良心이 회
복되고 리理를 보는 것이 저절로 밝아지자 전날 즐기고 흠모하던 (천주교
교리들을) 돌이켜 생각해 보면 한 가지도 허황되거나 괴이하고 망령되지
않은 것이 없었다”고 이야기 했다. 또한 그는 자신이 “당초 (천주교에)
물든 것은 어린아이의 장난 같은 바가 있었는데, 지식이 얼마간 자라면
서 곧 (천주교)를 적과 원수처럼 여기게 되었고, 분명히 알게 되어서는 그
것을 배척함이 더욱 엄해졌으며, 깨달음이 이미 (늦었기에) 오히려 미워
함이 더욱 심해졌다”라고 말하고, 이어서 “심장과 얼굴을 깎아도 진실로
더 가려진 것이 없고 창자 곳곳을 더듬어도 진실로 남은 찌끼가 없다”
고 이야기했다. 그는 1799년 또 한 차례의 자명소를 써서 자신이 천주
교 신앙을 버렸음을 재확인 했으며, 1801년 신유사옥 중 추국 과정에서
도 비슷한 이야기를 되풀이 했다.
그 외에도 천주교 신앙을 버린 데 대한 정약용 자신의 기록은 많이
남아 있다. 예를 들어 1800년 정조가 죽은 후 귀향하여 고향집에 ‘여유
당與猶堂’이라는 당호를 붙이고서 쓴 「여유당기與猶堂記」에서 그는 자신
이 “어린 시절 천주교[方外]에 치달리면서도 의심하지 않았고 , 장성해서
는 과거科擧 공부에 빠져서 (자신의 잘못을) 되돌아보지 않았는데, 30세가
되어서야 지난 일에 대한 후회를 깊이 드러내 보이면서 두려워하지 않
게 되었다”고 적었다. 1801년 추국을 받던 중 형 정약종에게 보낸 편지
에서는 “재난의 상황이 박두했는 데도 이를 (즉 천주교를) 종용하면 내가
손수 베어 버리겠다”고 단호하게 이야기 했다. 1822년 회갑을 맞이하여
작성한 「자찬묘지명」에서도 자신이 1784년 부터 기독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1787년 부터 수년간은 기독교 신앙에 깊이 빠졌지만 1791년 진
산사건을 계기로 기독교 믿음을 버렸다고 밝히고 있다. 그 자신의 기
록 이외에도 정약용의 배교 후 그의 형 정약종이 동료 신자들과의 서
신 교환 등 천주교 활동을 동생 정약용에게는 감추려 했다는 사실이
나, 이기경李基慶이 1787년 정미반회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정약
용이 “처음 ‘신기한 것을 좋아하는[好奇]’ 버릇에서 간혹 그 책을 펴 읽
기는 했으나 요즘에는 벗어났으므로 나의 교정交情은 전과 같이 한결 같
다”고 한 것 등 다른 사람들이 정약용이 천주교를 버린 것으로 믿고
있는 기록들도 있다.
또한 정약용은 이렇듯 천주교 신앙을 버린 것을 밝히면서, 자신이 젊
은 시절 왜 그 같은 잘못된 신앙에 빠졌었는지를 설명하기도 했다. 그가
제시한 설명은 대체로 당시 서학이 유행하던 상황에서 아직 나이 어리
고 미숙한 자신이 신기한 것을 좋아하고 넓은 지식을 얻고자 욕심내다
가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예컨대, 1797년의 자명소에서 그는 자신이
천주교 서적들을 볼 당시에는 “일종의 풍조가 있어 천문역상의 이론,
농정수리의 기구, 측량추험의 법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세상에
서 서로 전하면서 그를 가리켜 해박하다고 했는데 제가 그때 어리고 모
자라서 몰래 홀로 그것을 흠모했으며”, 천주교의 “기이하고 능란하고 폭
넓은 글들에 현혹되어 이를 ‘유가의 또 다른 일파[儒門別派]’로 생각했
습니다”라고 썼다. 「영보정연유기永保亭宴游記」에서도 정약용은 자신
이 젊어서 기독교에 빠졌다가 처벌 받은 일에 대해 “신기한 것을 좋아하
다가[好奇[” 그렇게 되었다고 이야기 했다. 그렇다면 나이가 들어 지적
으로 성숙해 지고 유학의 도道에 대한 깨달음이 얻어진 후에 그가 그같
은 잘못된 상태에서 벗어나려 하게 될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
었다고 할 수 있겠다. 실제로 그는 자신이 과거를 준비하고 벼슬길에 나
선 후에는 천주교 같은 “방외方外”의 일에 관심을 둘 겨를이 없었을 뿐
아니라 차츰 천주교에 “상륜패리傷倫悖理”의 설이 수 없이 많음을 깨닫
게 되었고, 제사를 폐하는 일에 접해서는 “마음이 무너지고 뼈가 떨렸
다[崩心顫骨]”고 이야기했다.
※ 혁명은 증산상제님의 갑옷을 입고 행하는 성사재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