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와의 만남과 천주교 신앙의 포기
17세기 초부터 북경에 다녀온 사신들을 통해 리치(Matteo Ricci, 利瑪竇,
1552~1610)의 [천주실의天主實義]· [교우론交友論]· [기인십편畸人十篇] 알
레니(Giulio Aleni, 艾儒略, 1582~1649)의 [직방외기職方外記], 샬(Johann Adam
Schall von Bell , 湯若望, 1592~1666)의 [주제군징主制群徵], 판토하(Diego de
Pantoja, 龐迪我 1571~1618) 의 [칠극七克] 등 많은 기독교 서적이 조선에 소
개되고 전래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안정복安鼎福(1712~1791)은 서학서가
유행하던 당시의 상황에 대해 “서양서들이 선조 말년부터 이미 동국에
들어와 명경名卿과 석유碩儒 중 읽지 않은 사람이 없으며, 그 책들을 제
자백가나 도가, 불가의 것들처럼 여기고 서재의 완상품으로 갖추고 있
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한참 동안 대부분의 조선 학자들은 기독교
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지녔다. 그들 중에는 서학 서적에 담긴 서양
과학 지식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들도 대부분 기독교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다.
18세기 말에 이르러서야 기독교 교리에 심취한 학자들이 나타나기 시
작했다. 이에 계기가 되었던 것은 1777년에서 1779년 사이에 천진암天
眞菴과 주어사走魚寺에서 권철신權哲身(1736~1801) 의 주도로 몇 차례 열
린 것으로 보이는 강학회였다. 이 강학회에는 권철신 이외에 이벽李蘗
(1754~1789)·이승훈李承薰(1756~1801)·이가환李家煥(1742~1801)·권상학權相
學·이기양李基讓·정약전丁若銓(1758~1816 ) 등 남인 신서파信西派 학자들
이 참여해서 유교 경전을 탐구하면서 천주교 교리를 담은 서학서도 논
의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의 천주교 교리 학습은 이후 이벽의 주도로
계속 이어졌는데, 1783년 사행使行 길에 오른 부친을 수행해 북경에 간
이승훈이 다음해 영세를 받고 돌아오기에 이르렀다. 그 후 이벽은 이승
훈과 함께 자신의 집으로 부터 중인中人 김범우金範禹의 집으로 옮겨가
며 천주교 교리 모임을 가졌고, 이들의 활동은 1785년 적발되어 사교邪
敎 금령이 내려지기도 하는 가운데에도 지속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천
주교 교리는 이들을 중심으로 해서 급히 퍼져 나갔다. 심지어는 과거
시험에 기독교에 관한 문제가 출제 되기도 했으며, 천주교가 퍼져 나가
는 이 같은 상황에 대해 걱정하는 사람들이 나오기도 했다. 급기야 1791
년에는 천주교 신자들이 신주를 불태우고 제사를 폐지하는 진산珍山 사
건이 발생하여 큰 물의를 빚지만 천주교는 계속 퍼져 나가서 1794 년에는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1752~1801)가 조선에 잠입하여 활동하게 되었
다. 1801년에는 신유사옥辛酉邪獄으로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가해졌고
뒤이어 청의 영향력과 서양의 무력을 빌어 조선에서의 천주교 포교를
꾀하는 황사영黃嗣永(1775~1801)의 백서帛書가 발각되자 천주교는 정치적
으로도 체제 전복적인 세력으로 인식되어 천주교 신자에 대한 더 심한
박해가 뒤따랐다.
정약용은 천주교에 심취한 이들 초기 조선 학자들과 가까웠다. 초
기 조선 천주교를 주도했던 사람들 중에는 정약용과 인척 관계인 사람
들이 많았다. 이들 중 정약종丁若鍾(1760~1801)은 그의 셋째 형이었고
이승훈은 매형, 이벽은 큰형의 처남으로 정약용과 인척 관계였으며 특
히 정약용에게 지적으로 큰 영향을 준 두 사람 이가환(이승훈의 외숙)과
정약전이 그와 인척 관계였다. 또한 이황李滉(1501~1570)에서 윤휴尹鑴
(1617~1680)로 그리고 이익으로 이어지는 학맥에 속했던 정약용의 학파
적 배경이 그로 하여금 기독교 교리에 흥미를 느끼기 쉽게 해 준 측면
도 있었다. 리理의 능동성과 자발성 그리고 천天에 대한 외경畏敬 을 강
조한 이황과 윤휴의 경향이 그 학맥에 속했던 정약용 같은 사람으로 하
여금 천주교를 어렵지 않게 받아 들이도록 한 면이 있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정약용은 10대 후반부터 이벽·이가환·이승훈 등의 영
향 아래 이익의 유저를 학습하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서학—과학기
술과 함께 기독교—에도 접하게 되었다.
정약용 자신이 권철신의 강학회에 참여한 것을 보여 주는 증거는 없
다. 그러나 그는 그 모임에 참석했던 정약전을 통해 강학회에 대해 전
해 들었을 것으로 생각되며 이 모임 이후 권철신과도 교류하게 된 것으
로 보인다. 정약용이 천주교 교리에 관해 직접 들은 것은 알려진 대로
1784년 4월 큰 형수의 제사를 지내고 오던 중, 배 안에서 이벽으로부터 였
다. 그는 이벽의 이야기에 큰 감동을 받고 곧 이벽의 집에 가서 [천주실
의]· [칠극] 등을 빌려와 읽었으며, 얼마 후 세례를 받고 천주교 신자가 되
었다. 그 후 정약용은 이벽을 중심으로 진행된 천주교 교리 모임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1787년에는 이승훈과 함께 성균관
근처 사가에서 교리 학습 모임을 가졌다고 하여 동료에게 고발되는 이른
바 ‘정미반회丁未泮會’ 사건에 연루되기도 했지만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
에서 “정미년 이후 45년 상당히 마음을 기울였다”14)라고 토로한 것처
럼 정약용의 천주교 신앙은 그 후 얼마간 지속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
천주교 신학이 당시 새로운 것을 추구하던 정약용 같은 청년 학자에
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을 것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20대 청년
기에 서학과 천주교를 접한 것이 정약용에게 큰 지적 깨달음을 불러 일
으키고 사고의 범주를 크게 넓혔다. 기독교가 정약용의 ‘하늘天’ 개념
에 깊은 영향을 미쳤고, 그에 따라 상제上帝·리理·귀신鬼神·제사祭祀 같
은 것들에 대한 생각에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특히 상제에 관한 정약
용의 생각은 기독교의 인격적인 신 ‘천주天主’와 비슷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