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이 천주교 신앙을 버린 것과 관련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
은, 이상에서 살펴본 1790년대 정약용의 상황을 돌이켜 보면 1790년 제
사금지령과 1791년의 진산사건을 거치면서 천주교 신앙을 버리는 것이
그에게는 극히 자연스러운 아주 당연한 일로 보인다는 것이다. 정약용
과 같은 유학자가 그런 상황에서도 계속 천주교 신앙을 고수하려 했다
면 그것이야말로 지극히 특이한 설명이 필요한 일이 될 것이고, 정약용
에 대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떤 것도 그런 설명을 제공해 주지는 못하
기 때문이다. 물론 그가 마음 속으로는 계속 천주교 신앙을 지니고 있었
으면서도 1797년의 자명소로부터 시작해서 이후 긴 시기 동안 「자찬묘
지명」 등의 여러 글들에서 자신의 신앙을 감추려 한다는 것이 이론적
으로는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만약 그가 실제로 천주교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면, 적어도 우리가 아는 정약용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였
을 것이다. 아마도 그는 제사금지 등의 천주교 교리나 방침이 유학의 참
된 가르침과 통한다는 점을 주장하려 들었을 것이다. 실제로 ‘상제’· ‘영
명’· ‘ 사천事天’ 등의 개념을 두고서는 그는 천주교 신앙을 버린 후에도
드러내 놓고 그것들을 논의했으며 , 그 개념들을 유학의 참된 일부로서
유지했던 것이다 . 이런 개념들과 달리 제사 폐지란 그로서 전혀 받아들
일 수 없었을 뿐 아니라, 그같은 내용을 포함한 천주교의 참 모습에 대해
회의하도록 하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앞에서 본 것처럼 1795년 금정 찰
방 시절 그는 천주교 금령을 열심히 시행하고 공들여 제사를 지냈는데
이같은 그의 행동은 제사 폐지를 주장하는 천주교 교리가 잘못된 것임
을 확신하고 있는 사람의 행동으로 볼 수 밖에 없으며, 실제 마음속으로
는 천주교 신앙을 가진 사람의 거짓 행동으로 본다는 것은 지극히 힘든
일이다.
이와 관련해서 주희까지를 포함해서 수 많은 유학자들이 젊은 시절
불교에 심취 했다가 나중에 그로부터 벗어나 유학을 신봉하게 되고, 심지
어는 불교에 대한 강력한 비판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상기 할 필요가 있
다. 천주교에 대한 정약용의 태도가 불교에 대한 이들 유학자들의 태도
와 같은 성격이었을 가능성을 생각해 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젊은
시절, 천주교에 대한 그의 깊은 신앙이나 나중에 가서 천주교를 부정한
것 중 어느 한쪽이 반드시 거짓일 필요가 없다. 양쪽 모두가 그의 진심
일 수 있는 것이다. 한때 불교를 믿었던 사람이 유학으로 되 돌아와 불
교 비판자가 되는 일이 있을 수 있다면, 마찬가지로 한때 천주교를 믿었
던 사람이 나중에 가서 천주교를 믿지 않거나 비판하게 되는 일도 얼마
든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 젊은 시절 받아들였던 천주교의 관념들이
자신이 어려서부터 그 속에 젖어 자라고 교육 받았던 유가 전통의 개념
들과 정면으로 충돌함을 인식하게 되었을 때 그것들을 버리고 오히려
비판하게 되는 일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던 것이
다. 실제로 이헌경李獻慶(1719~1791)은 “이단異端의 학學은 말이 매우 신기
하고 공부하는 길이 빠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쉽게 빠져들게 된다”
고 이야기하고 그렇지만 “주부자朱夫子가 초년에 불교에서 (도를) 구했
으나 다행히 육경으로 되돌아 왔고 그 후 우리 (유가의) 도가 세상에 크
게 밝아졌다”는 것을 예로 들면서 초년에 빠졌던 이단을 버리고 유학으
로 되돌아오면 제대로 도를 깨우칠 수 있음을 주장했다. 정약용 자신
도 [여유당전서] 맨 처음에 실린 「석지부惜志賦」라는 시에서 장재가 원
래 불교를 믿었지만 유학으로 돌아왔고, 주희가 그를 스승으로 모신 것
을 읊기도 했다. 정약용이 처음에 일본 고학파나 청의 고증학에 대해
관심을 지 녔다가 나중 자신의 경학 연구를 통해 유학에 대한 자신감을
회복하고 이것들에 대해 비판적이 된 것도 비슷한 태도를 보여 주는 것
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주희에 의한 신유학의 종합이 불교의 도전을
유학의 틀 속에 포용하려는 시도였다면, 정약용 또한 젊은 시절 자신을
매료시켰던 천주교의 관념들을 유학의 틀 속에 포함 시키려고 노력할 수
있는 일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