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정약용의 천주교 신앙에 대한 논란
그렇다면 당초 유가의 학문을 보완해 줄 것이라는 보유론적 믿음에
서 받아들인 천주교 교리들이 유가의 핵심적 가르침에 어긋난다는 실
상에 접하고 이들 조선 유학자들이 천주교 신앙을 버리게 되는 것은 자
연스러운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1790년 북경의 구베아Alexandre de
Gouvea 주교의 제사 폐지령이 조선에 전달되자 그때까지 기독교를 믿던
많은 학자들이 큰 충격을 받았다. 처음 제사 폐지령에 접한 윤유일尹有
一의 다음과 같은 반문이 그들이 느낀 당혹감을 보여준다. “제사란 곧
죽은 사람을 섬기기를 산 사람처럼 하는 것이다. 만약 이를 천주교聖
學와 병행할 수 없다고 하면 이는 어려운 노릇이다. 혹 타개할 길이 있
을 수 있겠는가?” 결국 이 일을 계기로 정약용을 포함해서 초기 조선
유학자 신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천주교 신앙을 버렸다. 그리고 이들은
‘배교背敎’했다기보다 그동안 자신들이 천주교에 대해 오해한 것을, 심
지어는 속은 것을 깨닫고 그것을 떠난 것이었다.
조선 유학자 개종자들의 이같은 반응은 1801년 신유사옥의 추국 중
행한 발언들에 드러나 있다. 이가환은 천주교 서적에서 “신주에 절하지
않고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구절”을 접하고서 그 부분을 칼로 도려
내고 다시는 천주교 책을 읽지 않았으며 “아비도 임금도 없는 이적夷狄
과 금수禽獸”로 배척했다고 이야기했다. 이승훈은 자신이 1791년 제사
폐지령 이후 이미 천주교 신앙을 버렸음을 이야기하면서 천주교를 “아
비도 임금도 없는 ‘멸륜난상蔑倫亂常’의 학學”이라고 불렀다. 정약전 또
한 “사학邪學 천주교를 믿는 사람들이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말을 들
은 후 사학이 ‘멸륜패상滅倫敗常’임을 잘 알게 되었다”고 하여 제사 폐지
에 대해 같은 반응을 보였다. 제사 폐지령에 대한 정약용 자신의 반응
은 1797년의 자명소에 담겨 있는데, 역시 단호했다. “제사를 폐한다는 설
에 이르러서는 신이 과거 접했던 그 책들에서는 읽은 적이 없는 바입니
다 …… 조금이라도 사람의 리理가 아직 타서 없어져버리기까지에 이르
지 않은 자라면 어찌 마음이 무너지고 뼈가 떨려서 어지러운 싹을 잘라
내지 않고 홍수가 언덕을 넘고 열화가 벌판을 태우도록 하겠습니까?”
제사 폐지령 이후 정약용이 접한 상황은 중국의 초기 유학자 기독교 신자
들의 상황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절박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제사 폐지령에 접한 이들 조선 유학자들에게 문제는 천주에 대한 신
앙을 버리는가 아닌가 이기보다는 제사와 같은 유가의 핵심 의례를 유지
할 것인가, 포기할 것인가였던 것이다. 사실 이들에 대한 조선 정부의 박
해 또한 천주교 신앙 자체보다는 이들이 조선 사회의 확립된 예禮인 제
사를 거부했기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들로서는 제사를 지낸다
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기에 그것을 지내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
할 수도 없었을 것이며, 더구나 유가의 핵심 덕목인 ‘효孝’의 근본이 되는
제사를 미신으로 간주하여 금지하는 일은 그들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양반층에서는 20명 정도의 극소수만
이 제사를 폐했는데 최기복에 의하면, 그들 중 “관직을 가진 사람은 하
나도 없고 모두 벼슬을 포기했거나 또는 벼슬길이 막힌 향반들이었으며
기존사상과 사회에 불만을 품고 이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면서 새로운 사
상으로 이상향을 실현 시키려는 혁명적 성향을 갖고 있었다".
조선 양반 사회와 유학의 틀을 유지하고자 했던 정약용은 제사를 폐
한 이들과는 전혀 다른 부류의 사람이었다. 그가 비록 초기에는 천주교
교리를 받아 들이고 정통 주자 성리학과 벗어나는 생각들을 하기도 했
었지만 1790년의 제사 폐지령 그리고 다음 해의 진산사건을 겪은 후 천
주교에 회의를 느끼게 되고 유학으로 돌아오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
었을 것이다. 1795년 이가환·정약용 등에 대한 계속되는 공격을 무마하
기 위해 정조가 정약용을 금정金井 찰방察訪으로 보내서 수 개월 체재하
도록 하는데, 이 시기에 이황의 저서의 독서를 통해 주자 성리학에 대
한 이해가 깊어진 그가 천주교 교리에 단지 제사 폐지의 문제만이 아니
라 그 외의 다른 문제들이 더 있음도 깨닫게 되고 더욱더 천주교로 부
터 벗어나서 유학을 깊이 신봉하게 되었으리라는 것도 수긍이 가는 일
이다. 사실 정약용이 천주교에 처음 접한 20대 시절은 아직 주자 성리
학에 대한 그의 이해가 충분히 자리 잡기 이전이었고, 그런 미숙한 상황
에서 그가 천주교를 쉽게 받아들인 면이 있는데, 나이가 들어가며 주자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정약용이 점점 더 주희 쪽으로 기울
게 된 면도 볼 수 있다.
또한 이런 식으로 천주교 신앙을 버리고 유학으로 돌아온 후 정약용
이 자신의 과거 잘못된 생각으로부터 거리를 두려 했던 것도 당연한 일
이었다. 그는 마테오 리치를 한 번도 인용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
의 생각이 리치와 차이가 난다는 점을 애써 드러내려 했다. 예컨대 자
신의 견해가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로부터 영향 받은 것이라는 혐의
를 피하기 위해 말년의 정약용은 심心·성性 등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자
주 주희와 맹자에 연결 시켰다. 그가 「자찬묘지명」에서 자신이 [중용강
의]를 작성한 시점을 1784년 여름이 아니라 [천주실의]에 접하기 이전인
1783년으로 굳이 잡고 있는 것도 자신의 생각이 [천주실의]의 영향을 받
은 것이 아니라는 점을 드러내고 싶어서였을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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