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의 천주교 신앙에 대한 논란
문제는 정약용이 천주교 신앙을 버린 것이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계
기가 되었기에, 그가 겉으로만 천주교를 떠나고 마음속으로는 천주교 신
앙을 계속 지니고 있지 않았나 하는 의심을 낳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정조, 말년 그리고 사망 후 천주교를 에워싼 정치적 상황이 변함에 따
라 정약용이 천주교를 마음속으로 깊이 받아들이고 있었으면서도 그것
을 감추어야만 했을 가능성을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실제
로 그가 마음속으로는 천주교 신앙을 버린 것이 아니었다는 의혹이 정
약용 당대에는 물론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정조가 정약용의 자명
소의 내용을 액면 그대로 믿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으며, 황사영의 백서
에도 정약용·이가환·이승훈 등이 비록 겉으로는 천주교에 대해 욕하지
만 마음 속에는 믿음이 남아 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심지어는 그가
말년까지 천주교 신앙을 지니고 있었다는 주장이 제기 되기도 했다.
그러나 정약용이 1790년대 이후로도 천주교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는
주장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그가 마음 속으로는 천주교를 믿으면서
도 겉으로는 자신의 신앙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철저히 감추고 있었을
뿐 아니라 위에서 본 여러 차례에 걸친 그 자신의 이야기들이 모두 거짓
을 말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물론 이 같은 해석이 이론적으로 불가
능한 것은 아니겠지만 나로서는 매우 받아 들이기 힘들다. 그 같은 무리
한 해석보다는 정약용이 천주교 신앙을 버린 상황을 훨씬 더 수긍이 가
게 해주는 설명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당시의 상황을 깊이 검토해 보
면 조선 정부가 서학의 불순함, 위험함을 인지하고 본격적으로 탄압을
시작하는 시점에 정약용도 그간 자신이 믿어 온 천주교 교리에 그같은
불순하고 위험스러운 점이 있음을 인식하고 환멸을 느껴 그것으로부터
스스로 벗어났다고 보는 편이 더 적절해 보인다.
사실 18세기 말까지 조선의 학자들은 [천주실의] 등 보유론적 성향
의 한역 서학서들을 통해 천주교에 대한 지적 흥미를 지니게 되었으
며, 이에 따라 그들에게 천주교와 유교 사이의 양립 불가능한 차이들
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초기부터 유학자들은 천주
교 교리 중 몇 가지에 대해 의혹을 표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예를 들
어 섭향고葉向高(1559~1627)는 알레니와의 대화에서 창조주의 세계창조·
악의 존재 · 천당지옥 · 영혼의 불멸성 · 예수의 탄생 등에 의문을 표
했다. 그중에서도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것과 그 후 부
활했다는 것에 대해 중국 학자들의 거부감이 특히 심했다. 그리고 고
해告解와 고행苦行 같은 신앙 행위 또한 유학자들로서는 이해하기 힘들
었던 것으로 보인다. 기독교 교리가 유학자들에게 그런 식으로 문제
가 될 수 있음을 인식한 리치 등 초기 예수회 선교사들은 문제의 소지
가 있는 관념들을 강조하지 않고 감추려 들었다. 심지어 리치의 [천주실
의]에는 ‘예수[耶蘇]’라는 이름이 마지막 부분에 한 번 등장할 따름이었
다. 이에 따라 유학자들에게 기독교 교리가 유학과 상충되는 측면들
이 두드러지게 드러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의 유학자들이 천주교를 종교가 아니라 단지 새
로운 학문의 조류인 것으로 생각했을 수 있다. 그런 예는 중국의 초기
기독교 신자들에게서 실제로 찾아 볼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왕징은 기독
교를 “새로운 학문[新學]”이라 칭했다. 그리고 앞에서 보았듯이 정약용
도 자신이 처음에는 기독교를 “유가의 또 다른 일파”로 인식했다고 이
야기했으며, 실제로 그가 천주교를 고대 유학에 더 충실한 유학의 한
분파일 수 있다고 생각했을 가능성도 있다.
따라서 정약용 같은 조선의 유학자들이 처음 천주교에 관심을 지니게
되었을 , 처했던 상황은 유학과 기독교 둘 중에 하나를 택하고 하나를
버려야 하는 것이 아니었으며, 그들에게는 기독교도가 된다는 것이 유
가 전통을 떠나는 것이 아니었다. 이들이 기독교도가 되었다고 해서 양
반, 관리, 유학자 노릇을 할 수 없는 것이 아니었고, 자신들의 기독교 신
앙을 위해 유학적 세계관 전체를 바꿔야 하는 것으로 생각지 않았던 것
이다. 그런 면에서는 이들은 기독교로 개종한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몇몇
기독교 교리들이 유교 성현의 가르침과도 통한다는 인식을 지니게 된 것
이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실제로 리치 자신도 유학의 가르침이 “몇몇 경
우를 제외하고는 기독교의 교리와 전혀 상반되지 않고 오히려 기독교로
부터 큰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했었다. 따라서 서광계
徐光啓(1562~1633)·이지조李之藻(1565~1630)·양정균楊廷筠(1557~1627 )같은 초
기 중국인 개종자들이 그러했듯이, 이들 조선 유학자들도 유학의 기본
을 유지한 채 기독교 사상 몇 가지를 받아 들이고 있었던 것이고 유학이
지닌 적응력과 탄력성은 그같은 일을 얼마든지 가능하게 해주었던 것이
다. 사실 제도적 종교—엄격한 교리와 의례규율에 따르도록 하고 배타적
인 유일신 신앙을 강제하는—의 경험이 없었던 정약용 같은 사람에게,
세례를 받아 천주교도가 되는 일이나 그렇게 해서 지니게 된 천주교 신
앙을 나중에 버리는 일의 의미는 서양의 기독교도들이나 오늘날의 기독
교신자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랐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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