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기독교, 서양 과학기술, 중국 과학 전통
한편, 시간이 지나면서 서양 과학기술을 받아들인 학자들 중에 서양
과학 지식에만 빠져 들지 않고 중국 과학 전통의 우수성을 인식하는 경
우가 생겨났다. 처음 서광계, 이지조 단계에서는 중국 학자들이 아직
중국 전통에 무지한 채 서양 과학기술의 우수성만을 본 면이 있었지만
차츰 중국 과학의 우수성을 주장하게 된 것이었다. 예컨대 ‘방씨학파’의
학자들은 게훤揭暄(1625~1705)의 [선기유술璇璣遺述](1675)에서 중국 과학
의 우수성이 서양을 능가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았다. [명사明史], 「역
지曆志」의 저자들은 초고에서 서양 역법을 칭찬하는 부분을 삭제하기
까지 했다.
이런 상황에서 서양 역법이 제대로 리理를 갖추지 못했다고 생각하
는 경향까지 생겨났다. 서양의 격물이 “기수器數의 말末”에만 치중해서
“통기通幾”에 모자라다는 방이지의 생각에서 볼 수 있듯이 서양의 과
학이 실제 데이터와 정밀한 수학에 근거했다는 장점은 인정하면서도 제
대로 된 리理를 밝히지는 못했다고 생각하는 인식이 있었던 것인데, 이
는 당초 서광계 단계에서 서양 역법이 리를 갖추었다고 생각했던 것과
완전히 반대되는 생각 이었다. 나아가 서양 과학기술의 지식을 유가 전
통 속에서 이해하고 그 틀 안에 포함시키려는 웅명우熊明遇(1579~1649·
방이지 등의 시도도 있었다. 조선 학자들 중에서도 서양 과학 지식을
자신들의 상수학적 우주론 체계 속에 포함시키려는 김석문·서명응 등
의 시도는 같은 경향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애초에 서양 과학기술에 깊은 관심을 지니지 않았던 정약용
은 서양 과학과 중국의 과학 전통의 관계 같은 문제에도 관심이 없었
다. 또한 서양 과학 지식이 정약용에게 더 깊은 인식론적·방법론적 자
각을 일으킨 것으로도 보이지 않는다. 예컨대 [기하원본]에 관한 정약
용의 관심은 단순히 유용한 수학적·기하학적 지식에 대한 것이었을 뿐
서광계에게서 볼 수 있듯이 그것이 확실한 지식을 보여줌으로써 지식의
기초의 역할을 한다는 식의 인식은 그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직접 예
수회 선교사들과 접해서 기독교 교리와 함께 서양 과학 지식을 습득했
던 중국의 초기 개종자들과는 달리 장소나 시기적으로 멀리 떨어진 상
태에서 서적을 통해 서양 과학에 접한 그로서는 과학 지식이 지적인 호
기심을 끌거나 효용성이 있는 지식이었을 뿐 깊이 있는 이론적·철학적
함의를 전수 받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 그에게서는 김석문·정제두·서명
응 같은 학자들처럼 서양 과학 지식을 자신의 철학 체계 속에 포함시키
려고 노력하는 태도도 보이지 않았다.
끝으로, 기독교와 서양 과학기술 양쪽 모두에 대한 정약용의 태도에
서 그의 사상과 활동 전체를 일관하는 실용성 추구의 경향이 드러난
다. 그는 기독교 신학 체계 전체를 받아들이지는 않으면서 기독교 교리
중 ‘상제’· ‘ 신독愼獨’· ‘권형權衡’ 개념 등 도덕적 실천을 확보하는 데 실제
효용이 있는 부분은 관심을 지니고 도입했다. 또한 천주교 신앙이 정부
와 주위로부터 빚어내는 어려움 속에서 유학자로서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제사 폐지령에 접해서 그가 천주교 신앙을 쉽게 , 그리고 단호하게
버릴 수 있었던 것도 그의 실용주의적 특성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천주교 교리에 대해 보인 이같은 태도를 그가 서양 과학기술 지
식 중에도 직접 실용성이 있는 것들은 받아들이면서도 구체적 실용과
연결되지 않은 과학 기술 지식이나 그 철학적 함의 같은 것에는 깊은 관
심을 보이지 않는 데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