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기독교, 서양 과학기술, 중국 과학 전통
기독교와 서양 과학기술에 대한 이상에서 살펴본 정약용의 태도에서
는 다른 학자들과 비교했을 때 독특한 면이 있다. 처음 대부분의 유학
자들은 서양으로부터 함께 동아시아에 들어온 서양 과학기술과 기독교
를 하나로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서로 구분되지 않은 채 ‘서
학西學’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불린 이 두 가지가 중국의 초기 기독교 개
종자들에게는 본질적으로 서로 연결된 것으로 느껴진 듯 하다. 심지어
는 서양 과학 지식과 기독교 교리 사이에 혼동도 찾아볼 수 있고 그같
은 혼동은 특히 서광계나 이지조처럼 서양 과학과 함께 기독교를 받아
들인 초기 학자들에게서 두드러진다. 예를 들어 서광계는 주로 수리水
利 방법과 기계 등에 관한 내용을 담은 [태서수법](1612)의 서문에서 기
독교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이지조도 [성수기
언聖水紀言]의 서序에서 기독교 교리에 대해 언급한 후 “그 서언緖言이
수법水法·산법算法·역법曆法에 미치는 바 …… 크게 도움이 된다”고 썼
다. 그리고 기독교와 서양 과학기술 사이의 이같은 긴밀한 연결 때문
에 유학자들이 이 두 가지 각각에 대해 지닌 태도도 연결되어 있었다.
사실 유학자들 중에는 기독교를 탐탁지 않거나 위험스러운 것으로 생
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그런 사람들 중에는 서양 과학기술과 기
독교 두 가지를 다 거부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같은 경향은 조선에서
더욱 두드러져서 19세기에도 지속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서양 과학기술에 관심을 지니는 사람
들이 생겨나게 되었는데 이들은 대부분 기독교와 과학기술을 서로 분
리하여 기독교는 거부하면서 서양 과학기술 지식은 받아들였다. 예를
들어 방이지 등 이른바 ‘방씨학파’의 학자들이나 황종희黃宗羲(1610~1695)
같은 사람들이 그같이 서양 과학을 기독교로부터 분리하는 경향을 보
였다. 매문정梅文鼎(1633~1721)도 서양 역법은 받아들이면서도 서교는
배척했으며 “예수를 섬기지 않으면서도 능히 그들 (서양인들)의 전문지식
[術[을 탐구할 수 있었다”고 하여 설봉조薛鳳祚(1600~1680)를 높이 평가했
다. [사고전서총목四庫全書總目]의 편찬자들도 [천학초함天學初函]에
대한 개요에서 “서학의 우수한 점은 측산測算에 있으며 그것의 부족한
점은 천주를 숭봉崇奉하여 인심을 현혹하는 데 있다”고 썼다. 사실
예수회 선교사들과 중국인 기독교 개종자 자신들도 남경박해南京迫害
(1616~1617), 역옥曆獄(1664~1669) 등을 겪은 후 자신들의 과학기술 지식과
활동을 기독교 교리로부터 분리하여 중국인들의 의심과 저항감을 회피
해 보려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서양 과학기술을 받아들인 조선 유학자들도 대체로 비슷한 경향을
보여서 자신들이 받아들이는 과학기술 지식을 기독교와 분리시키고 있
었다. 예컨대 조선 학자들 중 거의 처음으로 서양인의 천문, 지리 지식
을 높게 평가한 유몽인柳夢寅(1559~1623)도 그들의 천당지옥설이나 신부
들의 불혼不婚 풍습에 대해 “괴휼怪譎”하다고 비판했다. 조선 학계에
서 리치의 [천주실의]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했다고 할 수 있는
이익의 「발천주실의跋天主實義」도 천주의 존재, 천당지옥설 등을 비판
하는 등 천주교 교리에 대해 전반적으로 부정적이었으며 이익의 이같
은 비판적 태도는 그의 제자인 신후담愼後聃(1701~1762), 안정복 등으로
이어졌다. 박지원 같은 북학론자도 천주교에 대해 “입지立志가 지나
치게 높고 그 설說이 교묘함에 치우쳐서 오히려 하늘을 빙자하여 사람
을 속이는 일로 들어가 의리와 윤리를 망치는 구렁텅이에 빠지는 것을
모른다”고 비판했고 “서양인들이 비록 역법에 정통하기는 하지만 모
두 사람을 어지럽히는 것”이라고까지 이야기했다. 정약용의 후원자였
던 정조도 이들 유학자들과 같은 태도를 보였다. 그는 1791년 천주교 금
령의 일환으로 규장각의 서학서들을 태우라는 명령을 내리면서도 수학,
천문학, 기술 서적들은 제외시켰으며, 1799년에는 이가환에게 서양 역
산 지식을 담은 서적을 펴내고 북경으로부터 천문 역산서를 구입해 올
것을 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약용은 기독교와 서양 과학에 대해 이들과는 다른 태도를
보였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정반대였다고도 할 수 있겠다. 그가 천주교
교리에 대해서는 젊은 시절 깊은 관심을 보였고 그것이 그의 사상에 깊
은 영향을 미친 데 반해 앞 절에서 보았듯이 서양 과학기술에는 별 관
심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앞에서 보았듯이 1797년 자명소에서
자신이 서양 과학기술 지식 때문에 처음 천주교에 관심을 지니게 되었
다고 변명했지만 곧이어 자신의 성질이 ‘조솔躁率’해서 과학기술의 어려
운 지식에 대해서는 깊이 탐구하지 못하고 오히려 천주교 교리에 빠져버
렸다고 실토했다. 그리고 정약용의 이같은 태도는 이승훈, 권철신 등
천주교 신자가 된 일부 조선 학자들에게서도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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